"대한항공 발전을 위해 회초리 들겠다"



한국 민항사의 산 역사로 불리는 조중건(72) 전 대한항공 부회장이 3월25일 회고록 출판기념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10여년 전 갑자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조 전 부회장은 그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끊고 하와이에 머무르며 골프장 사업을 비롯한 개인 사업에 열중해 왔다. 현재 대한항공 비상임 고문직을 맡고 있는 그를 지난 3월16일 남대문 대한항공빌딩에서 만났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언론과 처음으로 갖는 인터뷰였다.





 국 나이로 일흔셋. 은퇴 후에도 집에서만 소일하지 않고 활발한 사업을 했던 탓인지 조중건 전 부회장은 건강해 보였다. 매년 100만달러의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기업 대한항공공사를 인수, 5년만에 흑자로 돌려놓았던 패기와 추진력이 여전히 녹슬지 않았음을 그는 드러내고 있었다. 탁월한 외교력과 사교술, 미래를 꿰뚫는 예리한 판단력 등 그에게 붙었던 현역 시절의 각종 수식어들도 인터뷰 내내 충분히 엿보였다. 분위기를 압도하는 호탕한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농담도 자주 곁들여졌다.

 재계에선 조중건 전 부회장을 가리켜 비즈니스와 인생 모두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한항공 남대문빌딩 15층에 마련된 그의 사무실 책상에는 아직도 ‘부회장 조중건’이란 명패가 놓여 있었다. 빛바랜 대한항공 기(旗)도 눈에 띄었다.

 대한항공을 떠난 후 그는 밖으로는 사업을, 안으로는 일본 고대사 공부를 하며 살았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일본 고대사를 읽으며 느꼈던 게 많다”며 “죽기 전에 일본에서 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집념도 내비쳤다. ‘역사학자 조중건’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말 없이 미국으로 건너갔던 10년 전의 심경에 대해서도 조 전 부회장은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경영권 분쟁이니, 형제간 재산 다툼이니 하는 억측들이 난무했지만 그는 아직까지 경영 일선 퇴진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그는 “(어떤 이유에서든) 떠날 때 깨끗하게 떠나야 한다”며 “식구들끼리 30년을 함께 했는데 쓸데없는 이야기가 나오면 싸움이 된다”고 잘라 말했다. 한마디로 마음 가쁘게 떠나야 할 때 적당하게 떠났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한국의 형제끼리 재산권이다, 경영권이다 해서 싸움을 많이 하는 걸 본다”며 이에 대한 경멸의 시선도 감추지 않았다.

 특히 한국민항사의 산 역사라는 별명이 무색치 않을 만큼 조 전 부회장의 대한항공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이제 개인 사업도 정리한 만큼 자주 한국을 찾아 대한항공의 아픈 곳만을 찌르고 다닐 것이라고 그는 농담처럼, 그러나 힘을 주어 말했다. 특히 “대한항공이 최고야” 하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 말을 듣기 위해 각 분야에서 느끼는 것을 이야기하고 경영진을 향해 ‘회초리질’도 하겠다”고 강조했다.



 건강은 어떠신가요.

 좋습니다. 서울에 오면 매일 4km를 빨리 걷고 다리 운동을 80번 합니다. 이를 악물고 하는 거죠. 건강하고 적당하게 살려고 합니다(웃음).



 벌써 10년째 외국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갑자기 은퇴를 하게 되니까 사람이 어렵지 않소. 실제로도 굉장히 어려워요. 기자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웃음). 현역 시절 한미경제협의회 부회장으로 일했는데, 마침 하와이 회장이 함께 멤버로 일을 하면서 친하게 지낸 분이었어요. 그래서 “야, 돈 좀 꿔줘라” 해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처음엔 골프장을 운영했어요. 쉬운 사업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3년 동안 어렵게 운영해 궤도에 올려놓고 아주 좋아졌는데 중국 사람이 사겠다고 해서 미련 없이 팔았어요. 그 돈으로 은행 빚 갚고, 소일하며 이것저것 했어요. 쉴 수가 없고, 하루 종일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또 일을 해야 건강도 지킬 수 있고.



 사업 이외에 공부도 많이 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일본 고대사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어요. 일본 건국에 백제 사람들이 지대한 역할을 했더군요. 신라와 고구려도 역할을 했지만 백제만 못했어요. 일본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영향이 컸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어요.

 지난 10년 동안 이런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대한민국이 어디에 있는지, 또 한민족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뿌리를 캐는 일에 재미가 붙었어요.

 아직 정확하게, 또는 많은 공부를 못했는데 고구려 연개소문이 일왕(日王)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일본 역사책에 나오더군요. 신라 김춘추도 일왕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어요.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거든요. 여유가 있으면 후쿠오카나 교토대에 가서 공부를 좀더 하면서 뿌리를 캐봐야 되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꼭 알아보고 싶습니다.

 역사학자로 변신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막가고 있습니다(웃음).



 한국에 들어와 사실 계획은 없는지요.

 그게 주파수가 맞아야지요. 이제 한 15년 남았는데…. 그렇지만 자주 오려고 합니다.



 한국 민항사에서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립니다. 알려지지 않은 대한항공 인수 비사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처음엔 대한항공을 인수하면 안된다는 게 제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돌아가신 우리 회장님(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자신의 친형)을 소개해 준 사람도 바로 저였어요. 박 전 대통령은 1952년 광주 포병학교에서 제가 특별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알게 됐는데, 그 분이 저를 아끼고 사랑해 줬어요. 그리고 1953년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또 그 양반이 이듬해 미국에 왔어요. 그래서 6개월 정도 같이 있었어요. 한국에서 만나고 미국에서 또 만나고, 그래서 저를 친아우 같이 대해 주셨어요. 아, 그런데 혁명이 났을 때 바로 그 분이 아니겠어요. 저는 ‘박정희 소장? 나 이 사람이 잘 아는데’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 나서 어떤 기회가 있어 우리 회장님을 소개했어요.

 박 전 대통령은 한진그룹이 월남에서 돈을 많이 벌게 되니까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라고 요구했어요. 그런데 인수해서 돈이 벌릴 만한 그런 사업이 아니었어요. 매년 적자가 100만달러였어요. 군사정부가 골치 아프기 때문에 처리해야겠다 했던 거죠. 그런데 마침 한진이 외화를 많이 벌었고, 제가 있고, 우리 회장님이 있으니까 청와대로 호출한 거죠. “봐줄 테니 인수해.” 나는 그때 우리 회장님에게 “형님 이거 인수하면 큰일 납니다. 월남에서 번 거 다 도로아미타불 되니까 절대 인수하지 마십시오” 했어요. 형님도 “내가 미쳤어” 하고 청와대로 갔는데 이 양반이 나올 때는 얼굴이 하얗게 되신 겁니다. “아니, 인수했어요?” 하니 “야 임마, 대통령 앞에서 어떻게 No를 하냐” 그러시는 거예요. 현실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큰일 났수다, 큰일 났어” 했어요.



 인수 이후 초창기엔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보스가 Yes를 했으니 직원들은 죽어나겠지만 별 수 있나요. 24시간중에 4시간 자고 20시간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일했어요. 그래서 대한항공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았죠. 그땐 노선도 몇개 없었고 60년대, 70년대인데 국내선도 탈 사람이 몇명이나 됐겠어요. 부산 가는 사람도 비싸니까 기차 타지, 미쳤어? 국내선도 손님이 없고, 해외는 더 없고…. 그런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그래도 운이 좋았어요. 아시안게임이 있었고, 오사카박람회도 있었고. 매년 여러 가지 행사가 따라 주면서 대한항공도 같은 파도를 타면서 흘러 왔지요. 게다가 월남전이 있었지, 중동 건설 붐으로 우리 근로자들 타고 다녔지…. 그래서 외화를 벌어들이게 되고 중동·미국도 가게 됐고, 화물기도 띄웠어요. 대한항공 역사를 간단히 이야기하면 대한민국의 경제 부흥과 동일한 파도를 타고 오지 않았나 싶어요. 모두 국민들이 타줘서 발전했고 시기도 맞았어요. 결국 국민이 아껴주고 뒷받침을 해준 결과가 오늘의 대한항공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떠날 때는 아쉬움이 더 많았던 것 아닙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떠나야죠. 할 일을 다 했고, 하고 싶은 것은 많이 했어요. 그래서 아쉬움도 특별히 없었어요. 그리고 떠날 때 깨끗하게 떠나야지, 한국에서 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 형제끼리 재산권이다 뭐다 해서 싸움을 많이 하지 않소. 식구들끼리 월남전서도 한진을 경영했고 이후에 대한항공 등 30여년을 함께 했는데 싸움을 할 게 뭐 있습니까. 떠난다고 하니까 인터뷰하자고 하는데 인터뷰 하면 쓸데없는 이야기도 나오고 또 그것이 커지면 싸움이 되잖아요. 형제끼리 뭘 돈 가지고 싸우고, 전 싫어요. 그런 게.



 사실 부회장님 떠나실 때 ‘형제 불화’라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야기도 않고 갔어. 조용히 사라지면 1년 동안은 기억을 하겠지만 그 이후엔 기억하겠어? 기억도 못하고 싸움도 안 붙일 거다, 그래서 도망가 버린 거야(웃음).



 대한항공에 근무하면서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88년 서울올림픽 때 제가 테니스협회 회장을 했어요. 테니스는 23년 동안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빠져 있었어요. 그런 테니스를 88년부터 정식 종목으로 부활시켰죠. 그때 세계테니스협회 운영위원장도 했는데, 그 명함을 갖고 소련 체육부 장관과 항공청장을 만나 시베리아 노선 개설을 요청했어요. 올림픽이 평화의 상징인데 이번 기회에 시베리아 노선 개설하자고 말이죠. 그런데 국교가 없어 안된다고 해요. 그때 우리가 헝가리 올림픽 선수단을 실어 오는 계약을 따냈어요. 그래서 부다페스트에서 파리와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에 오면 헝가리는 너희 위성 국가인데 기록은커녕 창피만 당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그러지 말고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왕복 20회만 시베리아 상공을 뜨자, 이렇게 설득했지요. 시베리아 노선만 개설되면 헝가리에서 서울까지 여섯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어요. 그때 기름값만 시간당 1만5천달러인데 편도에 9만달러가 절약되잖아요. 왕복이면 18만달러를 절약할 수 있어요. 손님 편한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올림픽 때 시베리아 노선 개설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어떤 논리냐면 키스도 첫번째가 힘들지, 두번째는 쉽잖아(웃음). 첫번째 키스만 하면 나중에 올림픽 끝나더라도 ‘야 임마, 첫번째 키스했는데 뭘 그렇게 비싸게 굴어’ 할 수 있거든. 그 작전으로 올림픽 끝나고 몇달 후 시베리아 노선이 개설됐어요.



 지금 대한항공이 세계 항공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 한 10위권에 들 거예요. 화물은 첫번째로 알고 있고. 매출도 7조원 가까이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정도면 제 욕심과 비슷한 궤도에 올라갔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디 만족을 해서 되겠소. 아직도 승객에 대한 서비스, 음식, 안전 운항 등을 더 개선해야죠. 대한항공을 처음 인수해서 운영을 해보니까 조종사와 기술자들의  의식이라는 게 보통이 아닙디다. 가만히 보면 각자 자기 임무를 다하지 않았던 거예요. 비행기가 사고 나면 어디 손님만 죽습니까. 그래서 “손님만 죽어? 너도 죽어. 손님 목숨이 가장 중요하지만 네 목숨도 그렇게 죽으면 되겠느냐, 다른 것 말고 규정대로만 하자”고 직원들을 독려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했던 그땐 한심한 게 많았어요.



 선배 경영인으로서 기업 최고경영자가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이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하시겠습니까.

 전경련 부회장을 할 때 한 이야기가 있어요. 근로자들이 매년 18~20%나 인건비를 올려달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설득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회장·사장·부사장·전무가 먼저 봉급을 깎자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솔직히 봉급으로 사는 사람들이예요? 윗물이 먼저 앞으로 3년 동안 현 봉급에서 매년 20%면 20%, 15%면 15%를 깎는다, 그래서 먼저 회사를 살리자 해야 한다고 했던 겁니다. 이건희 회장에게도 그랬어요. 지금도 이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스톡옵션이다 하는 것도 줄어들 겁니다. 한마디로 막 해먹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근로자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맨날 지들끼리만 스테이크 쳐먹고, 벤츠 600 탄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요. 대통령도 마찬가지예요. 봉급을 10% 줄여서 인플레 조정하고 경제 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죠.

 늙으면 아무 소용없어요. 저도 하와이에서 돈을 좀 벌긴 벌었지요. 그런데 한 달에 5천달러 쓰기가 힘들어요. 욕심 부릴 필요가 없어요. 한국 사람들 과욕 부리고 사치의 극을 걷는 사람들이 많은데 은퇴를 하고 살다 보니까 우리가 조금 덜 떨어져도 한참을 덜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이에요. 루이뷔통은 뭐고 명품은 다 뭡니까. 내가 입고 있는 이 양복도 한 20년 된 거 그냥 입고 다녀요. 누가 뭐래요. 그런데 이게(허리가) 좁아요. 부족해(웃음).



 회고록을 발간했는데 언제부터 준비하셨는지요.

 이럭저럭 몇년 됐습니다. 책 쓰는 게 힘들더라고. 기억에만 의존하다 보니 마음에 있는 것 모두를 쓸 수가 없었어요. 또 나이가 70이 넘으니까 그런 거지 뭐 구차하게 책을 써?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한 번 정리를 해봤습니다.



 비상근이지만 현재 대한항공 고문을 맡고 있는데, 앞으로 한국엔 자주 오실 계획인가요.

 자주 왔고, 또 자주 올 겁니다. 자주 와서 아픈 데만 찌르고 다닐 거예요. 앞으로는 현장도 다니면서 손님 입장에서 발길질하고 다니려고 해요. 더 발전을 해야 하니까요. “대한항공 최고야” 하는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 말을 듣기 위해 각 분야에서 내가 느끼는 것을 이야기하고 회초리질도 좀 해야겠어요(웃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안에서는 안 보여요. 저는 바깥에 있으니까 보이거든요. 선배 입장에서, 그리고 대한항공에 일생을 바친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그런 식으로 밀어 주려고 합니다.

한정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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