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관(舊官)만 명관(名官)이 아니라 신관(新官)도 명관이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지명자에 대한 뉴욕 월스트리트와 언론의 평가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버냉키는 지난 10월24일 부시대통령에 의해 내년 1월 말 18년 만에 물러나는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후임으로 지명됐다. 누가 후임이 되더라도 그린스펀의 유명세는 물론 리더십이나 능력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라던 월스트리트와 전 세계 언론이 버냉키에 대해 이처럼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린스펀 현 의장에 대한 월스트리트와 언론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그린스펀 의장이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는 잘못된 보도가 나가자 뉴욕증시가 급락한 적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같은 그린스펀 의장도 18년 전인 1987년 처음 취임했을 때만 해도 햇병아리 취급을 받았다. 그린스펀은 뉴욕에서 경제경영컨설팅회사 회장을 하다가 중간에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3년간 역임한 경력으로 FRB에 입성했다. 뉴욕대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도 받는 등 그만하면 훌륭한 경력이었지만, ‘인플레이션 투사’로 불리면서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13%대에서 3년 만에 3%로 낮춘 전임 폴 볼커 의장에 비하면 역부족이었다.



 신관도 명관

 그린스펀이 단숨에 월스트리트는 물론 국제금융시장의 신뢰를 받게 된 계기는 1987년 10월 취임 2개월 만에 발생한 뉴욕증시의 폭락사태였다. 1929년 10월의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보다 낙폭이 더 큰 대폭락이어서 지금도 ‘검은 월요일’(Black Monday)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당시 월스트리트와 언론들은 검은 화요일로부터 촉발된 1930년대의 대공황(大恐慌)을 떠올리면서 야단법석이었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금융기관들이 필요로 하는 유동성(돈)을 얼마든지 공급하겠다’는 한 줄짜리 짤막한 보도자료로 시장의 우려를 잠재웠다. 호들갑 떨지 않으면서도 시장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당시 FRB의 보도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서 대신 2001년 9월11일 9·11 사태 발생 직후 FRB가 내놓은 보도자료를 한번 보자.

 “연방준비제도는 정상적으로 운영 중이고, (금융기관에 돈을 빌려주는) 할인창구는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열려 있음(The Federal Reserve System is open and operating. The discount window is available to meet liquidity needs).”

 1987년 10월의 보도자료도 이와 거의 비슷한 ‘FRB가 있으니 걱정마라’는 식이었을 것이다.

 이후 뉴욕증시는 물론 전 세계 금융시장이 곧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당시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필자는 언론들의 그린스펀에 대한 평가를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구관(볼커 전 의장)만 명관인 줄 알았더니 신관(그린스펀 현 의장)도 명관이다.”

 버냉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글에서 그린스펀 현 의장에 대한 사설이 길어진 이유는 버냉키가 그린스펀의 18년간 쌓아온 신뢰에 버금가는 신뢰를 받으면서 의장직에 취임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신뢰받지 못하는 중앙은행, 특히 그런 중앙은행의 수장이 내놓는 정책이나 보도자료는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에 따라 정책의 효과도 반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뢰는 중앙은행의 전부(Credibility is everything in the central bank)’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 같은 신뢰를 받으며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는 FRB의 수장에 오르는 버냉키는 어떤 사람인가? 이제 세계경제의 방향타는 그의 성향과 지도력에 따라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버냉키는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수재형 경제학자라고 할 수 있다.  11살 때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철자 맞추기 대회(spelling bee)에서 1등을 차지했고, 우리나라의 대학수능시험격인 SAT(Scholastic Aptitude Test)를 만점(1600점)에 가까운 1590점을 얻어 MIT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MIT를 최우등으로 졸업하면서 하버드대 대학원에 진학, 4년 만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던 해인 1979년부터 스탠포드대에서 가르치기 시작해서 1985년에 프린스턴대학으로 옮겼다. 2001년 부시대통령에 의해 FRB 이사로 임명되었다가 지난 6월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CEA 위원장으로 건너갈 당시 차기 FRB 의장이 될 게 확실하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학계가 알아주는 유능한 경제학자로서 FRB 이사와 CEA 위원장으로 중앙은행과 행정부 사람들과도 발을 맞춰 본 경험을 갖추게 하려는 게 부시 대통령의 속셈이라는 풀이였다.

 학자로서 버냉키는 두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대공황의 사나이’(Depression man)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인 1930년대에 일어났던 대공황의 원인은 물론 진행과정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기 때문이다. 프린스턴대에서 버냉키 교수의 제자였던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버냉키는 “수십 번의 약한 지진보다 단 한 번의 강진(强震)이 지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에 훨씬 더 유용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버냉키가 금융이론에 전문가일 뿐 아니라, 중앙은행의 역할이 약한 지진을 몇 번 허용하더라도 외환위기나 금융위기와 같은 결정적인 강진을 사전에 탐지하고 막아 내는 데 있다고 본다면, 이번 의장 지명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대공황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일 수도 있다.

 두 번째 별명은 ‘헬리콥터 벤’(Helicopter Ben)이다. 첫 번째 별명과는 달리 FRB 이사로 근무할 때 얻은 것으로, 본인도 썩 내키는 별명은 아닐 것 같다. 2002년 당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경제는 디플레이션(Deflation : 경기침체 하의 물가하락 현상)에 대한 우려가 높은 상황이었다. 2000년 말 IT 거품이 꺼지면서 2년 가까이 성장률이 2%를 밑돌았을 뿐 아니라 소비자 물가상승률 또한 1%대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버냉키는 한 연설에서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는 밀턴 프리드먼(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이 말한 것처럼 헬리콥터에서 돈을 마구 뿌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후 버냉키가 디플레이션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는 반면, 인플레이션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면서 일부 비판자들이 비아냥조로 붙여준 별명이 헬리콥터 벤이다.

 버냉키의 이 같은 견해가 FRB 내에서, 또 그린스펀 의장에게 어느 정도 먹혀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FRB는 역사상 가장 가파른 속도로 기준금리를 내렸다. 2001년 새해 업무가 시작하자마자 임시회의를 열어 금리를 내리기 시작, 2001년에 11차 인하(4.75%포인트), 2002년에 1차 인하(0.5%포인트), 2003년에 1차(0.25%포인트) 등 총 13차에 걸쳐 5.5%포인트의 금리를 인하했다. 이후 성장세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물가도 올라 디플레이션 위험으로부터 빠져나왔다.

 2003년 6월 FRB의 기준금리는 연 1.0%로 40년여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와 함께 미국의 GDP 성장률이 2004년 4.2%로 올라간 데 이어 올해와 내년에도 3% 중반의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FRB는 작년 6월부터 금리를 다시 올리기 시작했다. 경기회복세가 본격궤도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고유가의 지속으로 인플레이션 위험이 닥쳐오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2001년 금리를 내릴 때에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금리를 올려 무려 12차에 걸쳐 3.0%포인트를 인상, 기준금리가 연 4.0%로 올랐다. FRB의 기준금리는 ‘연방기금금리(Federal funds rate)’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의 콜금리와 비슷한 금융기관간 초단기 금리다. 연방기금금리의 목표수준이 정해지면 은행들이 그에 따라 대출금리(=연방기금금리+3.0%)를 즉각 올리기 때문에 소비와 투자의 흐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앞으로의 행보다. 현재로서는 그린스펀 의장이 내년 1월 말 퇴임하기 전까지 두 번 남은 정기회의에서 두 번 모두 금리를 0.25%포인트씩 올릴 것이 확실하다. 이 경우 연방기금금리는 연 4.5%로 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내년 2월1일 바통을 이어받는 버냉키는 과연 금리인상 행진을 계속할 것인가?

 버냉키는 후보지명 수락연설에서 “그린스펀 시대의 정책 일관성을 유지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리인상의 지속 여부는 FRB가 경기중립적인 연방기금금리 수준을 어느 정도로 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경기중립적 금리는 ‘지나치게 높아서 경기를 후퇴시키거나 지나치게 낮아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는 수준의 금리’를 뜻한다고 설명할 순 있다. 하지만 실제로 ‘경기중립적 금리가 몇 %냐?’는 전문가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정의상 용어다. 현재 전문가들은 FRB가 보는 경기중립적 금리를 4.5~5.0%로 보고 있다. 만약 4.5%라면 내년 초 금리인상을 멈출 것이고, 5.0%라면 두어 차례 더 금리를 올릴 것이다.



 버냉키의 시나리오

 결국 향후 시나리오는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버냉키가 취임 후 금리인상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취임 후 금리를 한두 차례 더 올려 ‘인플레이션 파이터(inflation fighter)’라는 자신의 첫 인상과 FRB 내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첫 번째 시나리오가 더 유력하다는 견해가 더 많다. 그린스펀 의장이 기준금리를 4.5%로 올려놓고 나감으로써 후임 버냉키 의장에게 추가적 금리인상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버냉키는 그에 따라 급속한 금리인상에 따른 금융시장은 물론 실물경제의 동향을 추스르면서 다음 행보를 위한 준비기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반면 버냉키가 취임한 후 첫 번째 정기회의가 3월28일에 개최되는 만큼 2개월 정도면 충분히 금융 및 경제 동향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금리를 계속 올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일부 언론에서 버냉키가 인플레이션보다는 성장에 더 치중할 수 있다면서 금리인상을 중단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고 있다. 이 점이 버냉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중앙은행의 수장으로서 인플레이션에 대해서만큼은 매파라는 이미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냉키는 원칙주의자라기보다는 유연한 실용적 균형감각을 중시하는 평소의 성격에다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는 유형이라서 자신의 이미지나 FRB 내의 입지만을 고려해 정책 결정에 나서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금리인상은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한국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조사대상 24개국 중 올 하반기 중 기준금리를 인상한 나라는 절반에 가까운 11개국으로 나타났다. 반면 동결한 나라는 8개국, 금리를 내린 나라는 5개국이다. 미국·캐나다·칠레 등 미주 지역에서 시작된 금리인상이 한국·홍콩·대만·인도·필리핀·태국·뉴질랜드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번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체코가 지난 달 금리인상 대열에 합류했고, 올해 말과 내년 초에 걸쳐 금리인상에 나서는 나라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세계 각국이 금리를 인상하는 이유는 전 세계적인 저(低)금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국내 경제의 호조와 고유가가 겹쳤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는 지난 해 30년 만에 가장 높은 성장률(5.1%)을 보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9월 올해와 내년 세계 성장률을 각각 4.3%로 전망했다. 작년보다는 낮지만 과거 10년 동안의 연평균 성장률 3.9%보다는 여전히 높은 편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면,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인플레이션은 물론 거품이 발생하고 언젠가는 거품이 꺼지면서 급격한 경기침체로 빠져드는 경착륙(硬着陸 : hard landing)이 나타나게 된다. 이에 따라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인상하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사전에 차단하는 동시에 경기의 연착륙(軟着陸 : soft landing)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전 세계 경제의 30%를 차지하는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금리를 올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성장세에 브레이크가 걸린다는 뜻이다. 금리인상으로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면서 성장률이 낮아지고 수입과 수요 또한 줄어드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나라 수출의 둔화로 이어지면서 내년 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예상컨대, 이럴 경우 지난 10월 11개월 만에 처음으로 금리를 인상한 한국은행이 추가로 금리를 올리기 힘든 상황이 발생한다. 또 미국 등 다른 나라들은 금리를 계속 올리는데 한국은행은 올리지 못하거나 인상 속도가 느릴 경우 국내·외 금리차가 커지면서 국제 투자자금은 물론 국내 투자자금도 해외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될 것이다.

 금리인상으로 우리 경제에 좋은 점도 있다. 그간 저금리에 따른 세계적 과잉유동이 야기시켰던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의 급등과 부동산거품이 진정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가의 하락안정이 이어질 경우 각국의 인플레이션 압력도 줄어들면서 금리인상 행진 속도 또한 느려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