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적인 개성상인 중 한 명인 고홍명(80) 한국빠이롯드만년필 회장이 개성을 다녀왔다. 꿈에 그리던 고향땅을 밟고 온 덕분인지 그의 목소리엔 힘이 넘쳐났다. “내가 개성 갔다 와서 몇 자 적어봤어. 한번 봐 봐” 그가 A4용지 6장에 적은 기행문을 읽다 보니 그의 출발 전부터 도착 후까지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했다. ‘긴장→흥분→감회→아쉬움’ 그 자체였다. <편집자 주>
 2005년 8월26일. 나는 현대아산에서 마련한 15대 버스 중에 7호차에 몸을 실었다. 꼭두새벽인데 부속실 직원 두 사람이 긴장된 표정으로(마치 수만 리 길을 떠나는 사람 보내듯이)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수행사원 없으니 조심하시고…” 한다.

 나는 눈을 감고 아무 말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웬만하면 이른 새벽에 배웅해주니 ‘고맙소’ 한마디 해야 할 것인데… 엄숙한 기분으로 그저 무언무답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나나 그들은 서로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당일로 갖다오는 북측이기에 여러 걱정이 서로 교차됐던 것이다. 그들이 버스에서 내린 후 한참 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5시15분이다.



 버스 속 잡담하는 사람 없어

 목에 개성시범관광증을 걸고, 버스 안을 휭 하고 돌아보니 약 40명 대부분이 70대, 80대, 90대 분들이다.

 버스안은 아주 긴장된 분위기로, 잡담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현대아산에서 7호차 책임 관리자가 차안 마이크로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말하자 버스가 출발했다. 오전 6시 버스가 1호차, 2호차 순으로 조용히 엑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옆에 앉은 분이 “저 사람 인사 받으시죠” 해줘 창밖을 내다보니 내내 엄숙했던 직원들은 얼굴에 곱게 웃음을 띄우며 두 손 들어 환송해 준다.

 서울 경복궁 주차장을 떠난 버스는 자유로를 달려 경기도 파주시 장단골 마을을 지나 군내 삼거리에 도착했다. 바로 가면 판문점이고 좌회전하면 개성이다. ‘개성 18km’라는 표지판을 지나 2km쯤 가서 버스가 멈춘다. 북한으로 가기 위해 수속을 밟아야 하는 출입사무소(도라산)이다.

 이곳에서 현대아산 이름이 인쇄된 봉투에 휴대전화를 넣어서 현대아산직원에게 건네니 그가 다시 자루에 집어넣는다(휴대폰은 못 가지고 간다 한다).

 오전 8시 드디어 버스가 비무장지대를 통과한다. 얼마 있다가 중앙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에 들어섰다.

 북한군 초소를 지나 ‘통일다리’(임진강을 건너는 새 다리인 듯)를 지나자 북한 기전동 마을이 저 멀리 보인다. 남측과 높이 경쟁을 벌였다는 160m 깃대가 나타났다. 안내원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깃대”라며 “게양 시는 군인 40명이 필요하답니다”라고 말해줬다. 날이 흐리고 나는 시력이 나빠 보지 못했으나 일행 중 한 분이 여전히 인공기가 걸려 있다고 한다.

 북방한계선에 도착한 뒤 버스에서 내렸다. 북측 출입사무소에서 금속탐지기로 몸 전체를 검색하고 소지품(크고 작고 가릴 것 없이) 검사를 받았다. ‘역시 내 나라가 아니구나…’ 생각하면서 검사대를 통과했다.

 오전 8시 55분 버스는 북한 사복 차림에 ‘인상 좋은 분’ 두 명이 올라타자 곧바로 출발했다. 버스 안에서 바깥을 촬영하지 않게끔 단속 감시하는 사람인 듯싶었다.



 개성공업지구 오니 고(故) 정주영 현대명예 회장 떠올라

 출발 2분 뒤 개성공업지구로 들어갔다. 남한과 똑같이 4차선 길도, 전선도, 건물도 공장답게 설계되어 있고, 정리정돈 안전제일이라 씌어진 헬멧, 작업복, 굴착기, 공단 안을 왔다 갔다 하는 트럭 등 전부가 ‘현대건설’ 표시여서 마치 2000만 평이 현대건설 작업장 같았다.

 나중에 이 글 말미에 기록하겠지만, 고 정 회장이 사석에서 “고 박사(나의 애칭인지 고 정 회장은 꼭 고 박사라 했다. 사실 나는 경제학 박사 학위가 있다) 두고 보시오. 개성사람 다 잘살게 하겠으니까” 한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놀랍도다. 20년 이상 앞날을 내다보신 고 정 회장. 예언대로 연기 뿜는 굴착기, 포클레인 자동차 전부 현대건설 마크다. 지금 개성사람 3500명이 공단에서 일하고 있단다.

 그립고 꿈에 항상 그려온 개성 시내로 버스는 조용히 들어섰다. 구체적으로 쓰기 힘들지만(몇 시간 방문으로 어떻게 직감적인 글을 쓰겠나) 여하간 일반인은 볼 수가 없다. 골목마다 정장한 군인이 한손에 빨간 기를 들고 부동자세로 서 있고, 집집마다 창밖에 화분을 내놓았는데 창마다 ‘커튼’이 쳐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를 갔을까. 내가 2003년 평양 방문(4박5일)시에는 일반인과 많이 마주쳤고, 웃으면서 “반갑습네다” 하고 말을 건네주던 모습과는 차이가 너무 크구나 하고 비교도 해보았다.

 남대문이 보였다. 안내하는 사람이 알리지 않아 각자가 눈이 빠져라 하고 주위를 살피다가 앗! 저기 남대문이… 그러나 내가 어려서 보았던 남대문이 지금은 작게 보이고 관리, 보수가 안 된 듯해 안타까웠다.



 영통식당 11첩 반상기 약식 맛 으뜸

 남대문에서 선죽교, 성균관(고려박물관), 숭양서원은 아주 가까운 거리 같았다. 옛날엔 참 멀기만 했는데 버스를 타서였을까? 2분, 3분 거리에 불과했다(우리 버스 이외의 다니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시내는 생각했던 것보다 옛날보다 엄청나게 작아진 듯이 느꼈다.

 가장 먼저 고려박물관(고려 성균관 유적을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을 돌아보면서 우리 개성송상 선배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의 송암박물관, 윤장섭 성보실업 회장이 세우고 전시 중인 호림박물관을 연상해 보았다.

 옛날 여러 번 가 본 선죽교에선 한석봉(국보 명필)의 선죽교라고 새겨진 비석이 새로웠다.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어 오전 11시45분 영통식당에 들어서니 11첩 반상기로 차려진 둥근 탁자의 4인분 식탁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제사 때 쓰는 유기그릇에 여러 가지 개성 전통음식(우리는 서울에서도 똑같이 차려 먹는다)을 먹었다. 그 중에 약식은 달지 않고 아주 진미가 있었다.



 노인들 폭포 앞 경사로 말없이 올라

 박연폭포에 도착하니 주차장 이정표에는 ‘박연폭포 560m’라고 표시돼 있고, 경사가 30~60도까지 급경사다.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어 미끄럽진 않았지만 560m 언덕 같은 고개를 내 나이에 오르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일행을 보니 지팡이를 짚은 분, 옷을 벗은 분 모두에게 험난한 길이었는데, 한 사람도 말없이 꾸벅꾸벅 걸어 올라가 나도 용기를 내어 폭포에 도달했다.

 70년 만에 다시 찾아보는 박연폭포였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송악산을 도보로 넘어와서 본 자리. 폭포 위쪽에 고사찰이 있었고, 거기서 하룻밤 묵었는데…, 이번에는 폭포 위로 올라갈 용기가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인가. 일행을 잠시 떠나 안소통(소악산 뒷산)에 우리 제주 고씨 선조의 산소가 대대로 모셔졌고 추석에 자손들이 모여 차례 지내던 생각에 잠겨 눈 감고 잠시나마 조상님들의 명복을 빌었다.

박연폭포를 끝으로 개성관광 버스가 다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 도라산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 버스가 통일대교를 지나 자유로로 들어서자니 도로 오른쪽 임진강은 말없이 남북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마치 한반도는 임진강이 누구누구 가리지 않는 한 핏줄이라고 조용히 말하는 듯.



 마지막으로 개성 만월동(가마골)에서 같이 자란 친구(서철식-작고했음)가 “여보게, 같이 개성 가서 옛날처럼 만월대 잔디에서 형설시대(螢雪時代) 가지고 언쟁하세” 하며 그렇게 가보고싶어 했는데 나만 다녀와 아쉬웠다. 같이 자란 한해석군은 지금 미국 샌프란시스코 산다며 서울 오면 찾아와 “여보게 개성 갈 땐 같이 가자” 했는데…

 내 고향 개성에 밝은 태양 빛이 구석구석 밝힐 날을 기원하면서 필을 놓는다.                                  松江 高洪明



 추기  일행 중 여러분이 반갑게 인사 주셨는데 아려 뵙지 못한 것 송구스러웠습니다. 나이 탓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