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가 발발한 지 어느덧 8년이 되어 간다. 단기외채 상환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한 1997년 11월21일, 일부에서는 이날을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1910년 8월29일의 경술국치일에 비견하기까지 한다.

 2 외환위기 이후 8년이 남긴 성과와 오류



 국의 외환위기는 대기업 부실 등 내부결함이 누적된 상태에서 태국 등에서 발생한 외환위기가 파급되면서 발생했다. 당시 구소련 해체, 중국의 부상 등으로 글로벌경쟁이 가속되고 개방화가 급진전되었으나, 새로운 경제체제로의 전환은 지연되고 있었다. 세계화 추진, OECD 가입 등 표면적인 변화의 노력은 있었지만, 경쟁력 강화, 시스템 개혁 등 근본적인 대책이 미흡했다. 여기에 1997년 하반기 동남아에서 발생한 외환위기의 전염, 정권말기의 정책혼선, 상황 오판, 리더십 약화 등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1997년 들어서면서부터 한국경제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했다. 우선 1996년부터 반도체 가격의 급락 등 반도체쇼크로 인해 교역조건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1995년에 전년 대비 30%의 증가율을 기록한 수출이 1996년에는 4% 증가에 그쳤다. 1997년에도 이런 현상은 지속되었다. 반도체 가격의 하락세가 지속됨에 따라 교역조건이 악화되면서 전년 대비 수출증가율이 5%에 머물렀다. 수출둔화로 인해 무역수지 적자폭도 크게 확대되었다. 1996년에는 무역수지 적자가 최대 규모인 206억달러를 기록했으며, 1997년에도 85억달러 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1997년 한국경제는 대외수지에서 이미 적신호가 켜진 상태였다.

 1997년 초 한보를 필두로 시작된 기아 등 대기업의 도산은 수출부진으로 하강하던 한국경제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대기업의 연쇄도산은 이들 기업이 1994~96년의 호황기에 정부의 노사화합 강조 분위기 속에서 과도한 임금인상이 이루어진 데다 그동안 이뤄진 대규모 투자 등 양적 확대 위주의 경영이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기업의 수익성이 떨어지고, 제조업 부채비율이 1997년에 396%에 이르는 등 재무구조도 크게 악화되었다. 또한, 대형투자에 실패하면서 당시 30대 대기업 중 기아 등 6개 대기업이 부도에 직면하면서 연쇄도산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와 일부 여론 주도계층 및 노조들의 반대로 부실기업의 퇴출이 지연되면서 부실규모는 더욱 크게 확대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금융회사의 부실문제로 연결되어 금융시장의 신용경색 현상이 발생하는 등 금융 불안을 가중시켰다.



 극한 상황이 단기간에 개혁과제 추동

 이런 상황에서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해외 투자가들은 동아시아 지역에 대출한 자금의 만기연장을 불허하고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OECD 가입과 준비가 안 된 개방정책 과정에서 이미 외채가 크게 늘어나 있는 상태였다. 특히 금융회사들이 단기자금을 집중적으로 차입함에 따라 단기외채 비중이 크게 늘어남으로써 해외 투자자들의 자금상환 압력에 매우 취약한 구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남아 외환위기가 전염되고, 그러면서 한국경제는 점차 위기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해외 투자자들의 자금회수가 지속해서 이뤄지고 외환시장에서 달러화 공급이 끊기게 되자, 금융회사들은 한국은행으로부터 조달할 수밖에 없었으나,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마저도 곧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에 결국 한국정부는 1997년 말에 IMF에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지난 8년간 한국경제는 우여곡절 끝에 외환위기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우선 2001년 8월23일 IMF로부터 지원받은 195억달러의 자금을 당초 예정보다 3년 앞당겨 상환하면서 IMF를 ‘졸업’했다. 또한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계속 확대되기만 하던 경상수지 적자가 외환위기를 계기로 원화가치가 대폭적으로 평가 절하되고, 설비투자와 국내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흑자로 반전했다. 1998~2004년 경상수지 흑자 누적액은 1301억달러에 달했으며, 올해도 8월까지의 흑자액이 97억달러에 이른다.   경상수지의 흑자 반전에 힘입어 바닥이 났던 외환보유액이 크게 늘어나  2005년 8월 말 현재 2067억달러로 일본과 중국, 그리고 대만에 이어 세계 4위의 외환보유국으로 올라섰다.

 지난 8년간 시스템 개혁 작업도 추진되어 경제구조도 상당히 달라졌다. 주로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금융부문, 기업부문, 공공부문, 노동부문 등에 대한 시스템 개혁으로 상당부분 성과도 있었다. 상당수의 부실금융기관을 퇴출 또는 합병했고,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외환위기 당시 7% 수준에 머물던 은행들의 BIS 자기자본비율이 국제 권고기준인 8%를 크게 상회해 10%대로 높아지는 등 건전성도 강화되었다. 30대 그룹에 속하는 상당수의 대기업 집단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축소·해체되었고, 400%에 육박하던 기업의 부채비율이 100% 미만으로 크게 낮아졌으며, 회계제도의 개선과 주주권 강화 등 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제도들을 대거 도입하기에 이른다.

 외환사정의 급속한 개선과 지속적인 구조개혁은 외환시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환율안정과 외국인 투자자본의 유입을 촉진하였다. 외환위기 이후 2005년 8월까지 유입된 외국인직접투자는 448억달러에 달했으며, 이는 1980년 이래 국내에 유입된 외국인 직접투자 누적잔액 596억달러의 4분의 3이 넘는 규모다.

 지난 8년간 한국경제에 나타난 이런 변화와 성과들은 외환위기라는 극한상황이 아니었다면 실로 이뤄지기 어려운 것들이다. 구조개혁의 필요성과 요구는 외환위기 이전에도 줄곧 제기돼 왔으나, 제대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고, 그 결과 상황은 외환위기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외환위기라는 극한상황을 계기로 그 동안 제기해 왔던 개혁과제들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추진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외환위기는 한국경제에 상당한 고통을 안겨 준 독약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치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양약으로도 작용했다. 외환위기 직후에 나왔던 ‘외환위기는 한국에게 위장된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다’라는 주장은 이런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8년간 한국경제가 이룬 이런 성과는 그에 상응하는 상당한 비용을 동반했다. 비용의 구체적인 형태는 우선 정부부채의 증가로 나타났다. 금융부문과 기업의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2005년 8월까지 168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다. 공적자금의 투입은 한국경제가 외환위기로부터 탈출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공적자금을 신속하게 대규모로 투입한 결과, 신용공황과 금융시스템 붕괴라는 파국을 막고 한국경제는 국가부도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적자금의 투입과정과 사후관리에서 시행착오와 도덕적 해이가 광범위하게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게 투입된 공적자금 중에서 상당부분은 회수하지 못했으며, 결국은 불가피하게 국가 재정 부담으로 전가될 것으로 보인다.

 공적자금처럼 직접적이진 않지만, 지난 8년간 위기탈출과 경기부양을 위해 적극적인 내수 진작 정책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도 있다. 거시경제 및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당국은 경기과열 양상을 보이는 시점에서도 일관되게 저금리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저금리는 대규모 무역흑자로 비롯된 해외부문의 통화 공급과 함께 과잉유동성을 창출해 ‘벤처거품’, ‘코스닥 광풍’ 등으로 불리는 주가거품을 야기했다. 저금리와 과잉유동성은 다른 한편으로 저축률 하락과 개인들의 차입 증가를 유도했고, 이에 대응해 은행 등 금융기관들은 소비자금융에 주력한 결과 가계신용이 크게 늘어났다. 여기에 소비진작과 세수증대를 목표로 시행한 당국의 신용카드 사용 장려정책은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8년 말 184조원 수준이던 금융기관의 가계신용 잔액이 2002년 말에는 439조원으로 4년 만에 255조원이나 증가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GDP의 64%에 해당하는 규모다. 가계는 이렇게 빌린 돈으로 부동산 등에 투자하거나 소비를 늘리는 데 활용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경제성장률에 못 미치는 저금리에 만족하지 못한 시중의 부동자금이 가세하면서 부동산가격이 폭등하는 한편, 신용불량자 수가 400만명에 근접하는 등 신용카드 대출을 중심으로 가계부실이 심각하게 확대되는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이런 가계부실 문제는 2003~2004년 민간소비가 사상 처음으로 2년 연속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하는 소비 위축과 금융회사들의 부실 확대 요인으로 작용하는 등 경제적 비용을 야기했다.

 외환위기 이후 지난 8년 동안 이루어진 금융기관과 기업의 건전성, 수익성 등의 개선은 구조조정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부분 정부부채와 가계부채 확대에 의지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금융부실 해소와 기업부채의 축소과정에서 정부부채와 가계부채 증가라는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또 다른 부실을 낳는 원인

 외환위기 발생을 계기로 진지하게 이뤄졌던 과거에 대한 반성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보다 건강한 경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규율(Economic Discipline)’이 확고하게 정착되지 못한 점이 그것이다. 과거의 비합리적 경제활동에 대한 반성으로 시장경제 논리에 바탕을 둔 합리적 경제활동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음에도, 개인들의 ‘묻지 마 투자’와 과다한 차입 행태, 금융기관의 경쟁적 가계대출과 비합리적 규모의 경쟁, 기업의 무모한 사세 확장 등 구습이 재현되었다. 그리고 이런 행태들이 필연적으로 몰고 올 부작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시행착오와 도덕적 해이 현상이 또 다시 나타났다.

 외환위기라는 위기상황은 한국경제에 부족했던 경제적 규율을 보다 확고히 정착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차후에도 건강한 시장경제 체제에 걸맞은 경제적 규율의 정착에 실패한다면, 이는 곧 그동안 상당한 비용을 치르면서 진행해 온 구조조정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으로, 향후 한국경제에 또 다른 부실을 낳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결국 외환위기 이후 8년간의 한국경제는 ‘외환위기 탈출’이라는 하나의 숙제를 해결한 반면, 그 과정에서 크게 늘어난 정부부채와 가계부채, 그리고 기타 유·무형의 시행착오는 앞으로 한국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며, 이런 점에서 보면 새로운 숙제를 떠안게 된 꼴이다. 따라서 지난 8년간의 한국경제 변화는 아직까지는 ‘절반의 성공’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결론이 최종평가는 아니다.

 지난 8년간 한국경제의 성과를 최종적으로 평가하는 데 빠뜨리지 말아야 할 핵심사항은, 그동안 해온 구조개혁 성과가 향후 한국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에 얼마나 도움을 줄 것이며, 이런 성과를 내는 과정에서 한국경제가 지불한 비용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우선 구조조정과 관련해 그동안 추진된 구조조정이 한국경제가 안고 있던 문제점을 치유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상호저축은행 등 비은행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비율이 여전히 높은 수준이고, 상장기업 중에 영업이익이 이자비용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업이 30%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공공부문은 개혁이 지연되거나 유보되는 경우가 생기면서 당초목표에 비해 성과가 미진하고, 노동부문 역시 정리해고제 등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제도들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도 구조조정 과정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이미 시행된 구조조정 조치들이 정착되어 성과를 내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한 만큼 구조조정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판단이다.

 한국경제가 외환위기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지불한 비용을 최소화하는 문제는 직접적으로는 향후 공적자금의 회수율에 의한 간접적인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크게 늘어난 가계부채 등이 가져온 부작용 정도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이다. 공적자금 회수율은 공적자금 출자 금융기관들의 주가에 따라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향후 이들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성과와도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 그리고 가계부채 급증에 따른 금융기관들의 부실화와 심각한 소비위축의 부작용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지가 변수다.

 이런 현안 과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한다면, 지난 8년간 한국경제에서 나타난 변화들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이런 과제들을 다루는 데 실패해 상당한 대가를 치른 구조개혁의 과실을 향유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지난 번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외환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한국경제의 가장 큰 강점이던 재정과 가계의 건전성이라는 무기를 이미 다 써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대변혁의 시기였던 지난 8년간의 한국경제에 대한 평가는, 그동안의 구조개혁을 바탕으로 한국경제가 앞으로 안정적, 지속적 성장이 가능한 경쟁력 있는 경제체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느냐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