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도 변화하지 않으면 은행식 구조조정 당할 것"
 고려대학교를 특징짓던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막걸리, 민족, 전통…. 하지만 2003년 어윤대(59) 교수가 고려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후 이 단어들은 그 유효성을 상실했다. 대신 그 자리에 와인, 글로벌, 첨단이란 단어들이 들어서고 있다.

 고려대 개혁 선구자 어 총장과의 인터뷰 장소는 총장실. 서울 안암동 고대 캠퍼스에 들어서는 순간 세련된 조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지하주차장으로 차량을 유도한 후 지상을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입구에서부터 고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는데 지난해 10월에 준공된 LG-POSCO경영관은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변화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었다. 최첨단 기능과 시설로 중무장한 미래 지향적인 강의실도 그렇지만 최고경영자 라운지, 멀티 펑션 룸 등은 파이브 스타급 호텔의 그것에도 뒤지지 않는 감각을 보여 주고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보다 기능적인 면에서 뛰어나다”는 어 총장의 말에서 자부심이 드러났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어 총장의 취임 일성에 걸맞게 하드웨어적인 변화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인터뷰를 통해 소프트웨어적인 변화를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 대학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기업체에서는 대학에 리콜제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국가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까지 이야기되는데 한국의 대학이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그 이유부터 묻고 싶습니다.

 “26년 동안 학교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우선은 부끄러울 뿐입니다. 대학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성하고 개혁해야죠. 그래도 굳이 구차한 변명을 들자면 우리나라 교육 현실은 5000원을 들고 와 10만 원짜리 음식을 달라는 형상입니다.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은 미국의 5분의 1 수준입니다. 기업체에서 대학에 대해 졸업생 리콜제를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전 거꾸로 과연 기업이 대학생을 돈을 주고 샀는지 묻고 싶습니다. 즉, 기업에서 대학을 위해 어떤 투자를 했는가 하는 거죠.”

- 내부적인 요인보다 외부적인 이유가 더 크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내부적인 요인이 더 크죠. 대학도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던 곳입니다. 폐쇄된 조직이기에 안일했던 거죠.”

- ‘전환기의 대학’이란 문구가 회자됩니다. 교육시장 개방도 준비되고 있고요. 

 “총장으로 취임한 후 ‘명문’이란 타이틀을 버린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했습니다. 누구나 갖고 싶어 하던 명문이란 타이틀을 오히려 돈을 주고 버린 겁니다. 변화 없이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1997년 환란이 오기 전만 해도 은행은 안정적인 곳이었습니다. 은행이 없어진다는 걸 상상조차 못했죠. 하지만 서른세 군데 은행 중 지금은 스무 개만 남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대학교에도 옵니다. 변화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 그렇다면 어떤 전략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계십니까?

 “솔직히 교육시장 개방은 두렵지 않습니다. 외국의 초일류 대학이 국내에 들어와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교육시장을 개방한 일본의 사례에서도 충분히 예견되는 결과입니다. 그보다는 글로벌시대에 경쟁력을 갖추는 게 핵심이라고 봅니다. 이를 위해 로컬과 보스란 단어를 버리고 글로벌과 리더란 단어를 키워드로 삼으려고 합니다.”

 어 총장은 지난해 취임 초부터 글로벌KU 프로젝트를 가동시키고 있다. 국내 명문 사학이라는 타이틀에 안주하지 않고 경쟁력 있는 세계의 대학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가 집약된 프로그램이다.

 우선 눈여겨봐야 할 것은 학생 교환 프로그램의 활성화.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타 문화에 대한 적응력이 필수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에 따라 캐나다의 UBC, 미국의 UC DAVIS,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리피스대학, 영국의 런던대학, 그리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등에 글로벌 고려대 컴퍼스를 구축해 매년 1000명의 학생들을 보낼 계획이다. 세계 굴지의 대학에 고려대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설립한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하다. 또 2005년까지 영어로 강의하는 전공과목의 비율을 50%로 늘릴 계획이다.

 어 총장은 ‘CEO형 총장’이라 불린다. 그가 경영학을 전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려대에 불어넣고 있는 개혁적인 요소들이 기업체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 총장에게 대학 구조 조정이란 질문을 던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업체 체질 개선의 제1단계는 구조 조정에서 오기 때문이다.

 “대학 구조 조정 차원에서 입학 정원을 축소할 의향은 없나”란 질문에 어 총장은 한동안 망설이다   “대학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도 그 방향이 옳다고 본다”란 답변을 내놓았다.

- 그렇게 못한 혹은 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등록금 비율이 50% 이하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재정적인 요인은 아닙니다. 대학 내부와 동문들의 반발입니다. 규모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 반길 조직은 없습니다.”

- 그래도 입학 정원 축소가 옳은 지향점이라면 그에 대해 총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총장 취임 후 하고 싶은 개혁의 30%만 실시하고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저항, 그 임계점이 그 정도까지는 되더군요(웃음). 재정적인 측면에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정원 축소를 위해선 대학 등록금의 현실화가 선행돼야 합니다. 대학 등록금은 각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액 정도가 돼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만 달러이면 대학 등록금도 1만 달러가 돼야 하는 거죠. 하지만 현실에선 그러지 못하니까 더 많은 학생을 모집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실업이 문제라고 말하는데 전 이 부분도 등록금과 결부시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등록금이 싸니까 과도한 고등교육이 이뤄지고 있고 잉여인력이 양산되니까 고등실업이 생산되고 있는 겁니다. 중소기업에 가 보십시오.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 전통적인 입장에서 교육은 평등이란 단어와 매치됩니다. 등록금 인상 등은 교육의 불평등을 조장할 듯싶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교육은 산업입니다. 대한민국 안에서만 아옹다옹할 수 없어요.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합니다. 한국에 있는 대학의 경쟁력이 떨어지면 이제는 외국으로 나가면 됩니다. 실제로 그러고 있고요. 경쟁력 확보가 시급한 현안입니다. 일부에서 평등을 이야기하는데 대학에 평등을 요구하려면 대학의 재정을 100% 책임지고 나서 요구해야 해요. 대학 시스템을 유럽식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미국식으로 갈 것인지 결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제도와 재정 확보를 해주어야죠. 재정은 미국식으로 알아서 마련하라고 하고 제도는 유럽식으로 가라면 말이 안 되죠.”

 어 총장이 CEO 총장으로 주력하고 있는 부분은 기금 모금을 통한 재정 확보이다. 대학이 최고의 교육을 서비스하려면 그만큼 돈이 있어야 한다는 명확한 논리 때문이다. 임기 동안에 필요한 기금은 무난히 달성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기금을 토대로 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실내체육관 건립, 외국인을 위한 기숙사인 I-HOUSE 준공도 진행되고 있다.

 “시카고대학 설립자가 명문으로 발돋움하는 조건을 묻자 초대 총장인 엘리엇 박사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돈’이라고 답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대학 순위를 매기는데 첫 번째 요소가 확보된 기금입니다. 하버드대학이 22조 달러, 예일대학이 10조 달러 정도라고 하더군요.”

 화제를 돌려 어 총장에게 ‘잿빛’으로 가득한 한국 경제에 대한 해결책을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낙관적이어서 필자를 당혹하게 했다.

 “경제가 어려운 데에 대한 원인 분석으로 내수 부진을 들고 있습니다. 환란 극복책으로 내놓았던 내수 증진책의 부작용인데, 시계추가 한쪽으로 쏠리자 반대쪽으로 움직인 거죠. 해결 또한 시계추가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움직이듯 해결될 겁니다.”

- 혹자는 기업가의 투자 의지가 없어졌다는 심리적인 요인, 사회 갈등적인 요인도 드는데요.

 “우리 사회가 초스피드로 발전돼 왔습니다. 하지만 외형이 빠른 속도로 발전한 것에 비해 사회 내적으로는 변화의 속도에 맞춰 변화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 요소들이 한꺼번에 분출돼 나온 것인데,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거죠.”

 “기업가와 정권이 충돌하는 형국이다. 어느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보는가”란 질문에 어윤대 총장은 웃음으로 답변을 피해 갔다. “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고려대학교에 해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웃음 뒤의 대답이었다. 행간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어 총장은 지난 10월1일 GE 이멜트 회장과의 라운드 테이블 미팅에 최태원 SK 회장, 정구현 삼성경제연구소 소장, 박용성 대한상의회장 등과 함께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한국의 10대 성장산업, 교육문제, 북핵문제 등 다양한 논제를 거론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언론에선 GE의 기업 지배 구조에 대한 논의가 화제였다고 했다.

 “최태원 SK회장이 GE가 지금과 같은 기업 지배 구조를 만드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가라고 질문하더군요. 그에 대한 이멜트 회장의 답이 놀라웠는데, 최근이라는 겁니다. 기업회계 부정으로 미국 경제계를 뒤집어 놓았던 엔론 사건 이후라는 거예요. 전임 회장이었던 잭 웰치 때만 해도 사외이사가 이사회의 의견에 반하는 발언을 하면 묵살당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에도 글로벌 스탠다드가 확실히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회의석상에서 오간 이야기 중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에 대한 이멜트 회장의 집념이라고 한다. 갈수록 성장 분야를 찾기가 어렵지만 기업체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여서 회장이 직접 60여 개를 관리한다고 말했단다. GE 예를 들며 어 총리는 CEO들이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는 관리자(manager)가 아닌 리스크가 있더라도 모험을 할 줄 아는 기업가(entrepreneur)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정부의 정책이 기업가 정신을 수용, 육성해 줄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또 다시 말끝을 흐렸다.

 정부를 상대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어 총장에게 화제를 돌려 다시 총장의 역할과 조건에 대해 물었다.

 “이 시대가 원하는 총장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학문적인 카리스마, 도덕적인 리더십 그리고 관리 능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고려대학교 한 해 예산의 규모로만 보아도 국내 30대 기업에 들어가는 수준입니다. 그러니 관리 능력을 빼놓을 수 없지요.”

그의 관리 능력은 분권화에서도 드러난다. 대학별 예산과 행정을 각 단과대학 학장에게 넘겼다. 인사에서도 각 단과대학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며 총장은 거부권 정도만 행사한다. 총장에게 집중되던 권한을 줄이는 대신 교직원에게 역할을 주고 독려하고 있다. 통치권자에게 조언을 하라면 어떤  말을 하겠는가란 질문에 어 총장이 대답한 내용도 권한 위임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캠퍼스를 거닐었다. 어 총장은 변화하고 있는 고려대학교를 조금이라도 더 보여 주기 위해 교내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안내하는 열정을 보여 주었다.

 하드웨어의 변화는 분명 어 총장이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할 만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어 총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소프트웨어 측면의 변화 또한 감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소프트웨어와 관련된 부분은 대학 내부보다 외부에서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다는 점. 가치관과 철학이 개입된 문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고교 등급제가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일년 후, 십년 후 그리고 백년 후 대한민국을 위해 가장 나은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