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고등학교 성적 480명 중 400등, 서울대 교수 임용 탈락, 6개월 시한부 진단, 10시간에 걸친 두 번의 수술…

 어떤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뚝심의 소유자



 우석(53) 교수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왔던 지인들은 최근 그가 이룬 업적과 현상만 부각시키지 말고 그 과정에서 황 교수가 쏟은 열정에 대해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황 교수는 1999년 젖소 복제에 성공하기 전까진 평범한 수의학자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의 지난 삶은 ‘엘리트 코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온갖 역경과 시련으로 얼룩져 있다. 그래도 그에겐 소 같은 뚝심이 있었다. 그 어느 것에도 굴하지 않았다. 하늘까지 감동시킨 그의 의지…. 지인들이 그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다. 황우석 교수의 휴먼 스토리 외에 연구팀과 연구 내용, 향후 과제, 그리고 줄기세포의 경제적 효과를 취재했다.



Part 1 인물탐구



“마이 웨이, 시련과 고통이 황우석을 만들었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소와 평생을 함께하겠노라고 결심했다. 방과 후에는 소와 함께 들판을 쏘다니며 풀을 뜯겼으니 소와 친구처럼 가깝기도 했지만 단지 소가 좋아서 그런 결심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 가족과 이웃들의 가난이 가슴 아팠다. 겨울을 제외하고는 1년 내내 허리가 휘도록 일해도 자식들을 학교조차 보내기 어려웠던 그 시절, 소는 땅조차 없는 가난한 농부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새끼 많이 낳는 소, 튼튼하게 잘 자라는 소를 연구해서 배고픈 우리 가족과 내 이웃들의 삶을 기름지게 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으로 나는 평생 소를 화두로 삼았다.

 줄기세포 연구나 동물을 이용한 이종장기 연구에 뛰어든 계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현대의학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을 앓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내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우리 연구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병 때문에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들에게 작은 희망의 단초라도 제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 같은 뚝심으로 역경 헤쳐

 황우석 교수가 공동으로 집필한 <나의 생명 이야기>(효형출판)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리고 위에 등장하는 소년은 40여 년이 흐른 지금 자신의 바람을 이루고 있다. 하나씩 차근차근. 서울대 수의학과에 진학, 20대 이후를 소와 함께 보내고 있고, 1999년에는 한우 복제에 성공, 배고픈 이웃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터전을 닦았다. 여기에 2004년과 2005년 연이어 줄기세포 복제에 성공, 난치병 치료의 길을 트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황 교수가 이룬 국내 최초, 세계 최초라는 업적은 그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로 만들어 주었다.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연구소에서 그에게 SOS를 청하고, 국가에서는 황 교수에게 초특급 경호로 ‘국보’급 대접을 하고 있다. 대한항공에서는 10년 동안 퍼스트클래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황 교수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왔던 지인들은 최근 그가 이룬 업적과 현상만 부각시키지 말고 그 과정에서 황 교수가 쏟은 열정에 대해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황 교수의 고향은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홍선2리. 벽촌 중에서도 벽촌이라고 한다. 1953년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전쟁이 막 끝난 그때, 시골 사람들은 누구나 천형처럼 가난을 짊어지고 살았다. 황 교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다섯 살 적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어머니 조용연씨(91) 혼자 6남매를 키워야 했으니 경제적으로 더 빈궁할 수밖에 없었다. 황 교수는 일전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생존’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살았죠. 1000평 남짓한 논밭, 그리고 배냇소 세 마리가 전 재산이었어요. 배냇소라는 게 남의 소를 길러 주는 대신 그 소가 커서 송아지를 낳으면 그 대가로 송아지를 받는 식이니까 결국 남의 소를 키워 내는 것이 유일한 생계수단이며, 우리 가족의 전부이고 미래였던 거죠. 전 식구가 소에 온 정성을 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학교에 갔다 오면 꼴을 베러 다녀야 했습니다. 운명적으로 소와 연결되기 시작한 거죠.”



 ‘방바닥에 등 대지 않는다’는 각오로 공부

 황 교수가 자신의 미래를 소와 직접 연결시킨 것은 중·고등학교 시절이다. 가정형편으로 봐서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지만 은산초등학교 시절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당숙의 도움을 받아 대전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황 교수는 당시를 회고하며 ‘생각해 보면 턱없다 싶을 정도인, 나의 인간에 대한 한없는 신뢰는 아마 그 당숙 어른 때문에 시작되었지 싶다. 나는 인생의 고비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로 인해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많은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거다’라고 적고 있다.

 당숙의 후원으로 황 교수는 남들이 모두 입학하길 원하는 대전중학교에 지원해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그는 대전서중학교를 선택했다. 신설학교였던 대전서중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의를 한 까닭이었다.

 중학교 3년 동안 당숙의 집에 의탁해 있던 황 교수는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당숙의 집을 나와 자취생활을 했다. 집안 형편은 여전히 어려웠기에 손을 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

 “어렵게 살았죠. 우선 배가 고팠습니다. 그게 제일 큰 고통이었어요. 라면 한 번 먹어 보는 게 가장 큰 소원이었는데 결국 한 번도 못 먹어 보고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 첫 시험에서 황 교수는 전교 480명 중에 400등을 했다. 충청도에서 시쳇말로 난다긴다 하는 아이들이 모이는 대전고에서 남들은 공부에 몰두할 때 생활비를 벌며 학업을 병행했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황 교수는 400등이란 성적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지만, 그 시절 내 어깨에 지워진 책임을 생각하면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질 수 없었다. 부모도 아니면서 나를 믿고 내 앞날을 열어준 당숙 어른에게도, 뼈 빠지게 일해 나를 가르치는 형들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나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고 싶었다. 적어도 내 형제, 내 어머니에게만큼은 성실하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황 교수는 방바닥에 등을 대지 않겠다는 각오로 ‘등 안 대기 클럽’을 만들어 공부에 매진해 2학년 때는 전교 200등, 3학년 때는 상위 10% 안에 드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루 4시간밖에 안 자며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이끌어낸 뚝심은 고교시절부터 그 싹을 보였던 것이다.

 ‘간혹 놀면서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만큼 머리가 좋지 않은 나를 비관해 본 적은 없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고군분투했다. 세상사는 공정한 것이어서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내 노력에 충분히 답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라는 에디슨의 말은 성공한 천재가 범인들을 위로하려 지어낸 말이 아니라,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99%의 노력만이 천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며 우울해 하거나 포기하겠다는 학생들을 만나면 나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혼찌검을 낸다. 할 만큼 했는데도 안 된다고 포기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결과를 따지기 때문이다. 눈앞의 결과에 연연해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혼신의 힘으로 최선을 다하라. 안 되면 될 때까지 노력하라. 될 때까지 하겠다는 각오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황 교수는 이런 고난 속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갔다. 하나는 서울대에 입학해 교수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수의학을 전공해 소를 연구하겠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가족들을 먹여 살려준 소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학맥에 막혀 교수 임용 취소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계획대로 서울대 수의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반대가 심했다. 시쳇말로 충남지역 수재들이 모이는 대전고에서 전교 2?등을 다투던 그였으니 어찌 보면 반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소신을 꺾지 않고 서울대 수의학과에 지원해 수석합격을 했다. 면접관들이 하나같이 “이 성적으로 왜 수의학과에 지원했는가”라고 물을 정도였기에 그 자리에서 4년 장학금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운명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최종 신체검사에서 폐결핵 4기란 진단이 내려져 눈물을 머금고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기침을 하면 피가 한 사발씩 나오는데, 그때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눈물로 밤을 지새는 어머니 때문에라도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는 의지로 버텼습니다.”

 다행히 1년 만에 기적적으로 치유가 됐고 서울대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어렵게 학교에 다니게 돼서 그런지 대학생활을 알차게 보냈다고 자부합니다. 미팅하고 축제 다니고 그런 낭만을 구가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치스럽게 느껴졌던 거죠. 학부시절부터 전공공부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황 교수는 비공식(?) 세계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다. ‘직장검사 최다 시행’이 그것이다. ‘직장검사’란 소에게 시행할 수 있는 독특한 검사 방법으로 소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어 내장을 촉진해 소의 상태부터 임신여부, 태아의 정상 여부를 알아내는 것이다. 많은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돼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황 교수는 미팅 대신에 도축장이나 가축병원을 드나들며 이를 연습하기 시작해 직장검사를 그보다 많이 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한다. 대략 40만번 이상을 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소의 자궁에 수정란을 집어넣어 수태에 성공시키는 확률이 60%를 넘는 경이적인 수준이라고.

 이런 노력 끝에 서울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황 교수는 그 실력을 인정받아 1981년 박사학위 취득 후 지도교수로부터 이듬해에 전임교수가 될 것이란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지도교수가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그의 운명은 다시금 꼬이기 시작했다. ‘학맥’이 작용하면서 그의 교수 임용은 무산 되었고 엉뚱한 전공의 소유자가 교수가 되었다. 배정되어 있던 연구실에서 쫓겨났고, 잡혀 있던 강의마저 취소되었다. 심지어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여러 대학의 시간강사를 전전하며 3년을 보냈다. 그 과정에 전임으로 오라는 대학이 나타났다. 오래 망설이던 나는 전임 제의를 거절했다. 세상 일은 잘 몰랐지만 이미 교수로 내정되어 있던 나를 제치고 비전공자가 교수가 된 게 옳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내가 다른 학교의 전임 제의를 받아들이면 결국 현실에 안주하고 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합리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반드시 내 꿈을 이루고 말겠다는, 우직한 소 같은 정신이 다시 한 번 발동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학장님 권유로 인공임신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홋카이도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해 보라는 권유를 받은 겁니다. 그곳에서 수정란 이식의 대가인 가나가와 히로시 교수로부터 복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월화수목금금금’ 1년 365일 연구에 몰두

 ‘세계적인 과학자들 틈에 뒤섞여 연구를 하는 동안 나는 내가 모든 면에서 그들과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것이라곤 오로지 나이뿐이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자각은 내 투지에 불을 붙였다. 기왕 모자란 것은 한탄해 봐야 소용없는 일, 이를 만회하기 위해 나는 그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인공임신과 복제 연구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 우왕좌왕하던 나는, 열 살이나 어린 동료들을 귀찮게 따라다니며 조금씩 눈이 트이기 시작했다.’

 1986년 서울대로부터 ‘특채’ 통보를 받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황 교수는 ‘송아지 복제’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축산 농가들이 선진국에 맞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유전적으로 우수한 소를 값 싸게 무한정 생산하는 길뿐이란 확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1982년 교수 임용 탈락은 황 교수 인생에 주어진 최대의 기회였던 셈이다.

 그러나 운명이 황 교수 앞에 예정해 놓은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대 병원에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황 교수는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문제라며 끝끝내 병명을 밝히지 않았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죽음은 가까웠고 삶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루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의 의지에 운명도 굴복한 것인지 황 교수는 기적적으로 소생하였다.

 “열흘 간격으로 대 수술을 두 번이나 연이어 받았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무던히도 넘나들었습니다. 온몸은 내가 보기에도 흉측스러운 수술 자국으로 도배됐고, 척추에는 내 뼈가 아닌 이물을 삽입한 상태였어요.”

 상처가 아물자마자 국선도를 시작했다. 그날 이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새벽 4시에 일어나 단전호흡을 하고 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술, 담배, 자극적인 음식은 일절 하지 않고 있다.

 이후 황 교수의 삶은 송아지 복제에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벽 6시 출근에 밤 12시 퇴근. 월곂춠수겦?금겚?금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연구에 모든 것을 바쳤다. 수정란을 체취할 적에는 무박 3일로 전국을 누빈다. 젊은 연구원도 쓰러지는 강행군 길이다.

 “새벽 6시에 일을 시작해 밤 12시까지 하니까 출퇴근이 불가능해요. 그래서 연구원들 같은 경우는 연구실 앞에 자취방을 잡고서 숙식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지원비가 없을 때는 식사도 사먹지 못하고 당번을 정해 세 끼를 다 해 먹기도 하죠.

 일 년에 한 두 번씩 연구실을 거쳐 간 사람들끼리 모이면 그런 고생담으로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요즘 팀원들이 힘들다고 그러면 예전 팀원들이 군기가 빠졌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먹을 라면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라면도 없어서 굶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입니다.(웃음) 정말 신발 밑창이 닳도록 돌아다녔고 굶어가며 연구했습니다. 석사고 박사고 다 그렇게 말입니다. 다들 사명감이 없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겁니다.”

 한 번의 세표융합을 성공시키기 위해 수천번씩 같은 실험을 반복했다.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면 실험실엔 그야말로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흐른다. 전 팀원이 슬럼프에 빠진 채 묵묵히 똑같은 실험을 반복해야 했다. 그러다 또 뭔가 될 듯한 조짐이 보이면 모두 눈을 반짝이기 시작하고 말 못할 기대감에 부푼다. 그러나 실패는 순식간에 또 다시 찾아온다. 반복되는 절망과 계속되는 실험. 결국 12년 만에 신은 황 교수에게 송아지 복제를 허락한다.

 “연구비나 장비보다 사명감이랄까, 연구에 대한 열정 덕에 이룬 성과라고 봅니다.”

‘기쁨의 순간은 찰라였다. 축배조차 들지 못하고 또 다시 실험실에서 고독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지만, 팀원들의 가슴 속에는 가장 큰 선물인 자신감이 자리 잡았으리라. 실패를 딛고 기적을 이뤄본 우리들은 이제 더 힘차게 불가능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늘을 열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적막한 실험실에서 세월을 잊는다.’

 황 교수가 연이어 줄기세포 등의 성과를 거두자 세계 각국에서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 황 교수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겠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는 한 마디로 잘라 버린다. 황 교수는 연구를 통해 획득한 특허권을 서울대에 넘겼다.

 고3 시절 황 교수가 의대가 아닌 수의대를 지원했을 때 모두 말렸지만 선생님 한 분이 그의 결정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편안하고 잘 닦인 길을 선택하지 않고 황무지를 가려는 네 선택은 앞으로 20∼30년 크게 뒤에 돋보일 것이다”라고. 선생님 말씀대로 황 교수는 세계가 놀랄 업적을 이루었다. 무수한 시련과 역경을 딛고. 황우석 교수의 수필을 인용하며 이 글을 닫는다.

 ‘세상 어디에도 왕도는 없다. 단 하나의 왕도가 있다면 그것은 성실이다. 하늘을 감동시킬 만큼 성실하다면 바보라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리 연구팀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산 증인이다. 모든 게 부족한 우리 실험실이 만들어낸 조그만 결과가 또 다른 증거다. 나는 매일매일 학생들을 보면서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삶의 원리를 체험하고 있다.’



Plus Best Partner 안규리 서울대 의대 교수



“태생적으로 총무체질”

모은희 여성조선 기자 girl@chosun.com



 규리 교수(50. 서울대 의대 신장내과)는 황우석 사단의 ‘빛나는 조연’이다. 황 교수의 이번 연구에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장기이식 후 면역거부 반응을 해결하는 것이며, 이 분야를 담당한 사람이 바로 안 교수였다. 현재 황우석 사단의 공식 대변인으로, 장기이식 임상시험의 진두 지휘자로 일하는 ‘연구 내조자’ 안규리 교수. 그녀는 스스로를 ‘태생적으로 총무 체질‘이라고 말한다.

 “굉장한 위기에 봉착했지만 안규리 교수가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안 교수 덕분에 20년 걸릴 연구가 1년 만에 해결되었죠. 안 교수는 생명공학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역을 하고 있습니다.”

 황우석 교수가 극찬한 서울대 의대 안규리 교수. 최근 황 교수와 더불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안 교수는 ‘황우석 사단’의 대변인이자 실질적인 ‘넘버투’ 역할을 하고 있다.

안 교수가 황우석 사단에 들어간 것은 지난 2002년. 말기 신부전증 환자를 매일 봐왔던 안 교수는, 새로운 장기이식 치료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6년 전 황 교수가 복제소 영롱이 탄생으로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시상식장에서 두 사람은 잠깐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만난 인연으로 안 교수는 황 교수를 찾아갔다.

 이후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장기이식용 무균돼지를 공동 연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황 교수가 동물연구의 권위자라면, 이를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부분에선 안 교수가 전문가다.

 안 교수의 중요한 역할 중 또 하나는, 황 교수 연구에 대한 직접적 자문. 20명으로 구성된 황우석 사단의 분야별 자문의원들을 규합하고 연구의 문제점을 점검하는 것도 안 교수의 몫이다. 

 안규리 교수는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안동혁 박사. 6대 상공부장관을 지낸 안 박사는 지난해 10월 작고한 한국 과학계의 거물. 안 교수의 영문 이름은 ‘퀴리 안’인데, 부친이 과학자로 성공하라는 뜻에서 퀴리부인의 성을 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특히 주변 사람들에게 안 교수는 3가지가 없는 ‘3무(無)교수’로도 통한다. 첫째, 표정이나 목소리에 티가 없다는 점. 주위에서는 안 교수를 ‘소녀 같은 중년 교수’라고 부른다. 둘째, 벽이 없다. 그녀는 제자나 환자와 허물없이 늘 친구처럼 지낸다. 자신 역시 바깥으로 벽을 쌓지 않아 환자를 진료실에서만 보지는 않는다. 각종 환자모임을 만들어 대화를 유지하고 있다. 셋째, 55년생인 안 교수는 남편이 없다. 대신 그의 연구실 한쪽 벽에는 선·후배 교수들과 그들의 자녀 사진이 빼곡하다.

 실질적인 연구를 담당하는 안 교수지만 그녀는 태생적으로 무대 전면이 아닌 뒤편에 서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고 스스로 얘기한다.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총무 혹은 써포터 체질이라는 것’.

 또한 안 교수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매달 두 번씩 외국인 근로자에게 무료진료 활동을 벌이는 ‘라파엘 클리닉’의 핵심멤버이기도 하다. 9년째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고, 매주 일요일이 되면 바쁜 일정을 쪼개 봉사 활동에 참석한다. 이를 두고 주위 사람들은 두 사람의 만남을 두 종교의 만남이라고 말한다. 황 교수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데 반해, 안 교수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연구가 난관에 봉착하면 황 교수는 절을 찾고 안 교수는 성당을 찾는다.

 앞으로 안규리 교수는 황 교수와 같은 목표를 두고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시너지를 창출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연구 뿐 아니라 의사로서도 ‘환자에게 충실할 수 있고, 나에게 찾아오지 못하는 환자들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밝혔다.



 Part 2 줄기세포 연구 성과 & 향후 과제

 실용화 최소 10년… 윤리 논란 극복해야



 
‘신의 손’ 황우석 서울대 교수팀이 환자의 세포로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해 또 다시 전 세계 과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이는 환자 자신의 세포로 면역거부 반응 없이 치료용 세포를 만들어 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2004년 인간 배아를 복제해 줄기세포 추출에 성공한 데 이어 이번에는 환자에게 맞는 맞춤 치료용 세포를 생산할 수 있는 줄기세포를 대량으로 만드는 성과를 얻은 것이다. 지난해 첫 성과와 비교할 때 줄기세포 추출 효율이 10배 이상 높아졌다고 한다.



 아직 갈 길 멀어, 지금부터가 관건

 연구팀은 한양대병원을 통해 18명의 여성 기증자로부터 모두 185개의 난자를 기증받았다. 이들 난자에서 핵을 빼낸 뒤 난치병 환자와 남성, 그리고 폐경기 여성 등 11명에게서 채취한 체세포 핵을 원래의 난자에 주입, 핵이식 난자를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모두 31개의 복제배반포기 배아를 얻었다.

 황우석 교수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환자 자신의 세포로 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게 됐다”며 “줄기세포를 활용한 난치병 치료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됐다”고 말했다. 줄기세포는 심장근육, 신경, 뼈 등 220여 개에 달하는 인체 모든 장기의 세포로 자랄 수 있는 만능 세포다. 자신의 세포로 줄기세포를 만들면 면역거부 반응이 없어 치매나 당뇨 등 각종 질환을 치료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번 연구 결과를 난치병 치료에 즉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실제 환자 치료에 적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최소 10년 이상 기다려야 하고 윤리적 논란은 물론 임상시험을 통한 중요한 의학적 과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선 추출한 줄기세포를 치료에 필요한 세포로 분화시키는 것이 첫번째 과제다. 척수마비 환자의 몸 세포로 만든 줄기세포라면 척수신경 세포로 자라게 해야 한다. 엉뚱하게 뼈세포로 자라 버리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또 안전성이 검증돼야 한다. 줄기세포의 특징 중 하나인 암세포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야 치료에 쓸 수 있다.

 황 교수가 “이번에 얻은 줄기세포가 피부, 근육, 위장 등 다양한 장기 세포로 자라는 것을 확인했다”면서도 “환자의 손상부위에 딱 맞는 한 종류만으로 분화시키는 연구는 아직 초기단계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함께 임상시험에 앞서 반드시 환자와 복제배아줄기세포의 생물학적 특성 규명이 선행돼야 하며 원숭이 등 동물을 이용한 전임상시험도 이뤄져야 한다. 실용화 여부는 주로 안전성을 검증하게 되는 이 동물실험이 지금까지의 시험관내 실험과 같이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 실제 난치병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효과를 검증하는 본격 임상시험을 거쳐야 결정된다. 황 교수팀은 현재 이번에 추출한 복제배아줄기세포로 동물실험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환자의 체세포로 복제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려면 반드시 여성의 난자를 필요로 한다는 면에서 윤리적인 한계와 논란도 따른다. 난치병 환자가 순수 난자 기증자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상업적 난자 매매 행위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전문가는 “연구팀이 나름대로 난치병 치료를 위한 사명감으로 연구를 수행한 점은 인정하지만 연구 과정에서 버려진 난자와 배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팀은 황우석 교수 외에 미국 피츠버그의대 제럴드 샤튼 박사, 미즈메디병원 노성일 박사, 서울대 수의과대 이병천, 강성근 교수 등 25명으로 구성됐다.



 인간배아 줄기세포 실용화되려면

1. 인간 체세포 복제 성공

2. 체세포 복제로 인간배아줄기세포 개발(2004년)

3. 실제 환자의 체세포 복제로 인간배아줄기세포 탄생(2005년)

4. 인간배아줄기세포가 신경세포, 췌장세포 등 원하는 대로 순수 분화되는지 확인(진행 중)

5. 분화과정에서 암세포가 되거나 유해물질이 나오는지 검증(진행 중, 1~2년 내)

6. 원숭이 등 영장류 동물 실험에서 안전성 입증(1~3년 후 예상)

7. 난치병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3~5년 후 추정)

8. 줄기세포를 조직수준으로 키워 장기이식 치료 시작(5~10년 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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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연구팀 24시



1년 365일 24시간 불 켜져 있는 연구실



 
이번 연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황우석 사단’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수의과대에 자리잡고 있다.  

 연구팀에는 60여 명의 연구원이 있다. 줄기세포, 동물 복제, 바이오장기, 기초연구지원팀 등 4개 팀으로 나뉘는데 교수, 연구원 같은 고정 연구 인력에다 외국인 유학생과 객원연구원이 참여하고 있다.

 연구 시간은 공식적으로는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다. 그러나 연구가 밀리면 밤새 연구실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오전 6시에 연구소 문이 열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황 교수가 새벽에 연구하는 걸 선호하고 이 시간에 시작하지 않으면 그날 실험에 필요한 동물 난자 1400여 개를 채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난소채집팀’의 경우는 새벽 5시에 가락동 도축장으로 향한다. 난소가 온도 변화에 민감하고 외부환경에 노출되면 변질 위험이 높기 때문에 난소 채집에 주어지는 시간은 도축 후 1분도 채 안 된다. 도축되는 모습을 지켜보다 즉시 작업을 해야 한다. 시뻘건 피가 흥건한 곳에서 살을 뒤적이며 난소를 찾는 일은 신입연구원에겐 보통 고역이 아니다. 처음 난소채집을 다녀온 연구원들은 평균 2~3주 정도 식사를 제대로 못한다고 한다.

 연구실에는 황 교수가 말한 대로 월곂춠수겦?금겚?금만 있을 뿐이다. 1년 365일 쉬는 날이 없다. 여기에 황 교수가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하면 새벽 2시에라도 즉시 모여야 한다. “우리가 잘 때 지구 반대편은 깨어 있다”는 황 교수의 말에 “그들이 잘 때 우리는 깨어 있습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연구원들은 보통 연구실에 간이침대를 가져다 놓고 새우잠 자고 밥 먹을 시간이 없어 점심은 컵라면으로 때우기 일쑤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홈커밍데이를 맞아 연구소를 방문하는 예전 연구원들은 “요즘은 배고프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만 우리 때는 라면 사 먹을 돈도 없었다”며 “요즘 연구원들은 군기가 빠져 있다”고 아쉬워(?)한다고. 

 이렇게 힘든 일정 속에서도 연구원들은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다. 한 연구원은 이에 대해 “황 교수님의 카리스마와 리더십 때문이다. 예전에는 큰 잘못을 하면 체벌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래도 교수님이 외국에 가시면 현지에 있는 제자들이 선생님 얼굴 한 번 뵙기 위해 차로 8시간씩 달려온다. 면담시간은 기껏해야 5분이다”라고 말했다. 황 교수는 매일 아침 60명 연구원과 일일이 면담을 한다. 이름을 불러 주며 근황과 고민거리를 묻는 방식인데 2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고 한다.



 Part 3 줄기세포 연구의 경제적 효과

 5~10년 안에 500억달러 시장 생성



 
우석 교수가 연구하고 있는 줄기세포 연구의 시장은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해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유발 효과에 대해 아직까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몇몇 기관에서 추정치를 내놓는 수준인데 ‘Drug&Market Development Publications’사는 최근 보고서에서 세포치료분야 시장의 규모가 2010년 약 300억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가기술지도에서는 5~10년 안에 100억~500억달러 시장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르면 5년 후 당뇨병 치료부터 적용될 듯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 성과에 따른 경제 효과만 따로 유추한 자료도 있다. 2004년 황 교수가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처음으로 발표했을 때 <사이언스>는 연 약 500억달러에 이르는 새로운 의약시장이 창출될 것으로 전망했다. <사이언스>는 또 줄기세포 치료법이 실용화되면 1억2000만명의 환자가 치료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했을 정도로 줄기세포 치료는 엄청난 의료산업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경제적 효과 중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분야는 줄기세포 연구 결과가 신의약품 창출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줄기세포 분화과정에 관여하는 중요한 조절인자가 발굴돼 의약품으로의 발전 기반만 마련되면 그 규모가 1000억달러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효과가 가시화되는 시기와 치료 대상 병명은 어떻게 될까? 이 또한 섣불리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전문가들은 대체적으로 이르면 약 5년 후부터 당뇨병치료분야에서부터 적용될 것으로 전망한다. 본격적인 임상 응용 시기는 10~15년 후로 예상된다. 줄기세포로 치료가 가능한 질병은 당뇨, 치매, AIDS, 대머리 등 그 분야가 무궁무진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당뇨병의 경우 기증된 췌장 이식을 통해 치료할 수밖에 없었지만 줄기세포 치료법이 시행되면 췌장세포로 분화된 줄기세포를 이식하는 방식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AIDS나 대머리 치료도 방법은 유사하다. 면역 기능을 정상화시킨 줄기세포를 이식하거나 모낭 줄기세포를 이식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 수준은 이미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한국은 미 국립보건원(NIH)이 줄기세포 관련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한 전 세계 14개 연구기관 중에 미즈메디병원, 마리아병원, 차병원 등 3개의 국내 병원이 포함돼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한국이 배아줄기세포 연구에서 이처럼 강점을 보이는 것은 국내 병원들이 인공수정 시술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생명윤리 논쟁이 심한 외국과 달리 국내 환자들 대부분이 불임시술에 쓰고 남은 배아를 연구용으로 기증하는 것을 꺼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도 줄기세포 치료법을 ‘10대 차세대 성장동력산업’의 하나로 선정, 힘을 실어주고 있다.

 황 교수는 “줄기세포 치료가 실용화되면 비행거리 4시간 내에 살고 있는 20억명이 우리나라 병원을 찾을 수 있다”며 “인천 송도에 줄기세포 치료 전문병원을 세워 외국인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상시험 경험 축적하고 있는 중국 주목해야

 황 교수의 복제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미즈메디병원은 영리 목적의 의료법인이 허가되면 국내외 기업들로부터 1000억~1300억원의 투자를 유치, 줄기세포 치료 전문병원을 세울 계획이다.

 국내 병원들이 세운 바이오 벤처기업들도 구체적인 성과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불임전문병원인 마리아병원이 2000년 세운 벤처기업 마리아바이오텍은 최근 인간배아줄기세포로 척수가 손상된 닭을 치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차바이오텍은 차병원에서 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창업한 벤처 기업이다. 차바이오텍은 최근 차병원이 인수한 미국 LA 현지 병원을 중심으로 미국 줄기세포 치료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다.

 배아줄기세포와 관련된 외국의 연구 동향은 2004년 전 세계적으로 약 200여 종의 인간배아줄기세포주가 확립돼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98년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줄기세포주가 확립된 후 2002년 미국의 NIH에 등록된 인간배아줄기세포주는 12개 연구기관에서 72종이 등록되었지만 현재 분양 가능한 세포주는 7개 기관의 19종으로 확인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황우석·문신용 교수팀에 의해 1종류의 복제배아줄기세포주가 확립되어 있다.

 줄기세포와 관련해 한 전문가는 “정부 규제가 약해 다양한 임상시험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중국을 주목해야 한다. 이미 심근경색 환자 69명에게 성체 줄기세포 이식술을 시행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올해 생명공학(BT) 육성을 위해 총 7086억원의 예산을 투입할 예정이다. 여기엔 물론 줄기세포 및 세포치료 분야도 있지만 이 외에도 유전체·단백체 이상으로 생기는 질병의 진단과 예측, NT(나노기술), IT(정보기술)를 융합한 신기술 등 미래 유망 신기술도 포함돼 있다.

 올 BT 예산은 지난해의 6016억원보다 17.8% 증가한 규모로 연구.개발 및 시설 부문에 각각 4877억원, 2209억원씩 투입된다. 여기에 민간부문 투자금액 1290억원을 합치면 올해 국내 생명공학분야의 전체 투자액은 8376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식 과기부 기초연구국장은 “생명공학 육성시행계획이 차질 없이 추진될 경우 우리나라는 2012년 전략분야에서 세계 5위 수준에 이르러 세계 생명공학시장의 5% 이상을 점유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