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의 경제정책 결정 과정은 다소 어수선하다. 경제팀의 수장이라는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리더십이 각 부처 장관에 의해 반발을 사고, 청와대 참모진과도 갈등을 보이기 일쑤다. 다양한 의견이 취합되는 과정이라고는 하지만 정책 결정 이후에 표출되는 이 같은 혼선은 사전 의견 조율 과정이 없었거나 부실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또 경제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조정 기능이 상실됐다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있다. 누가 경제정책의 조타수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대 정권에서 경제정책의 조타수는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다. 통치권자의 경제운용 방침은 경제수석실을 통해 정립되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경제팀의 몫이었다. 대통령의 의사 결정 시 부족한 정보와 지식 및 전문성을 보완함으로써 최고 정책 결정권자인 대통령이 합리적인 경제정책을 결정하도록 보좌하는 역할을 경제수석실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대통령을 보좌하겠다는 ‘경제수석’이 너무 많다. 한마디로 ‘사공’이 너무 많은 것이다.



 사공 많은 경제정책 조율



 참여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청와대 직제에서 아예 경제수석실을 두지 않았다. 대통령비서실이 정부 각 부처의 업무에 과도하게 개입함으로써 청와대 수석이 장관을 거느리는 식의 폐단을 없애겠다는 의지에서였다. 특히 동북아 경제 중심국 건설과 이를 위한 과학기술의 발전,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을 위해서 종래의 경제수석실을 폐지하고 특별위원회로서 장관급의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와 경제보좌관제도를 운영했다.

 또 경제수석실이 담당하고 있던 각종 업무는 정책수석실을 신설해 이관시켰다. 정책수석실은 경제는 물론 교육문화·노동복지 분야를 담당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 전 분야를 총괄했다. 초대 정책수석은 권오규 현 OECD대표부 대사였다.

 그러나 2003년 12월 청와대는 정책수석실의 업무 분야가 너무 광범위해 꼼꼼히 정책을 챙길 수 없다는 이유로 두 개의 수석실로 분리했다. 경제 분야만을 전담토록 하는 정책기획수석실과 경제를 제외한 분야를 담당하는 사회정책수석실이 그것이다. 김영주 정책기획비서관이 승진, 정책기획수석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이 또한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번에는 혼선을 주고 있다는 이유로 2004년 12월 경제정책수석실로 개편을 한 것이다. 김영주 정책기획수석이 유임한 경제정책수석실은 참여정부 출범 이후 끊이지 않았던 정책 혼선을 줄이고 정부의 경제정책 조정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겉으로는 과거 경제수석실의 부활로 해석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는 과거의 경제수석과는 다른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주문한다. 명확하게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분야별로 확실하게 챙기자는 취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일상적인 경제현안 처리는 국무조정실로 넘긴 만큼 과거처럼 현안과 중장기 정책을 모두 총괄하는 위상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김영주 수석도 올 초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부에서는 과거 경제수석이 부활됐다고 하는 얘기들도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고, 경제정책수석으로 됐다 하더라도 경제는 경제부총리께서 1차적으로 조정 책임을 지고 이끌어 나간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책기획수석이 외교안보를 제외한 많은 분야를 맡아 왔는데 이제는 분리해서 분야별로 특화하고, 또 경제문제에 보다 전념하기 위한 개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경제정책수석실이 과거의 경제수석실과 동일한 위상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명칭만 비슷할 뿐 업무는 극히 축소돼 있다.



 4개 비서조직이 분담



 현재 청와대 조직별 업무 내용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과거 경제수석실이 담당했던 업무와 관련된 참여정부의 청와대 조직은 모두 4개. 정책기획위원회와 정책실, 경제정책수석실, 경제보좌관이다.

 이 가운데 경제정책수석실은 국무회의 기획 지원과 정책 관련 국정 운영 전략 기획 업무를 담당한다. 따라서 경제정책 조율은 김영주 경제정책수석의 몫이다. 또 현재 공석인 경제보좌관은 국가경제 운영과 관련된 판단 및 정책 대응 보좌를 담당함으로써 대통령 자문으로 그 역할이 주어졌다. 참여정부 출범 당시부터 경제보좌관으로 재직했던 조윤제 씨는 지난해 말 주영국대사로 임명됐다.

 김병준 실장이 맡고 있는 정책실은 부처 혁신 관리·국정 과제 업무 지원·민원 처리·제도 개선 등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특히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에 있어 실질적인 사령탑으로 불리고 있는 이정우 위원장이 거느리는 정책기획위원회는 각 국정과제위원회에서 수행하는 참여정부 국정 과제의 종합적인 관리·조정 기능을 맡음으로써 큰 그림을 그리는 측면에서 중장기 비전을 제시하는 기구다. 때문에 과거 경제수석실에서 총괄했던 업무가 참여정부에서는 4개의 비서실 조직에서 분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김영주 수석은 “각 참모들은 수석의 경우 경제 부처가 수행하는 경제 현안에 대해서 점검과 지원 평가 기능을 수행하고, 보좌관은 국민경제자문회의를 담당하는 한편 그때그때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대한 자문에 응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 “정책기획위원장은 중장기 국정 과제에 대해서 자문과 정책 건의 기능을 맡고 있다”고 덧붙인다.

 표면적으로는 업무가 분담됨으로써 효율적인 기능으로 조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사공’이 많아졌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즉 경제정책수석 위에는 정책실장이 있고 그 옆에는 경제보좌관이 버티고 있다. 또 그 옆에는 정책기획위원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다소 복잡한 형국이다. 경제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조직이 너무 많아 통일성이 없으므로 내부의 의견 통일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지난 2년 동안 참여정부의 경제정책과 관련한 로드맵 자체가 정책수석실(권오규 수석) → 정책기획수석실(김영주 수석) → 경제정책수석실(김영주 수석)로 이어지는 경제수석실의 후신(後身)보다는 출범 초기 정책실장을 맡았던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과 김병준 정책실장의 목소리가 컸다는 점에서 경제정책수석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다소 신뢰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다소 어정쩡한 위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경제정책수석에게 경제정책 조정 기능을 완전 위임하는 조직 개편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참여정부 2년 동안 세 차례씩이나 개편 대상이 됐던 경제수석실은 역대 정권에서도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던 참모조직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경제수석실이라는 명칭 자체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와 함께 경제수석실은 또 가장 오래 존속했던 참모조직이기도 하다.



 가장 많은 변화, 가장 오래 존속



 경제수석실의 잦은 기구 변화 이유를 김태승 씨(고려대 행정학과)는 그의 석사학위 논문에서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첫 번째는 매우 가변적인 경제 상황에 따라 그러한 경제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상황 적응적으로 변화했다는 해석이다. 즉 환경의 변화에 대한 반응으로 기구가 변화됐다는 것이다. 3공화국 당시 설치됐던 외채관리수석실은 대표적인 것으로, 당시 경제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 그 밖의 잦은 기구 통합과 분리도 담당 경제 업무의 비중 변화에 따라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대통령의 개인적 선호에 따라 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 능력을 획득함과 동시에 잦은 변화가 시작됐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즉 경제수석실은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을 옆에서 보좌하는 기능을 하므로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 의지가 강한 경우에는 대통령의 선호에 더 큰 영향을 받아 가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경제수석실이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경제 분야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와 정책을 다룬다는 역할의 중요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한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역대 정권에서 경제문제 해결은 이를 상쇄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정치적 수단이었다. 청와대 조직에 경제수석실이 처음 탄생했던 시기가 3공화국이었던 것도 이에 다름 아니다.



 비서실 기원은 브라운로위원회 권고안



 대통령비서실의 기원은 1937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재임 시 구성된 대통령 특별위원회인 브라운로위원회(Brownlow Committee)의 집행부서의 재편성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안에서 최초로 제기돼 설치됐다.

 브라운로위원회는 세 가지 이유에서 비서실의 설치를 주장했다. 즉 대통령 수행 업무의 계속적인 복잡화와 거대화, 이러한 상황에서 대통령을 거치는 모든 업무에 대해 전반적인 관리 입장에서 조사되는 것에 대한 분명한 필요성, 그리고 정보의 흐름 원활화가 그것이었다. 대통령이 행정부의 광범위한 업무에 대해 보다 자세히, 그리고 쉽게 이해하면서 결정과 집행에 필요한 지식을 신속하고 명확히 얻을 수 있는 보좌 집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서실은 본질적으로 독자적인 정책 결정 및 지시 권한이 없다는 점과 비서진은 대통령과 부처 책임자와의 중간적·중재적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도 비서진은 대통령 직무대행이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 대통령과의 직접적인 대면이 가능해야 함과 보직 수행 후 보직 전의 원직으로의 복귀를 명시하기도 했다.

 옥상옥(屋上屋) 또는 소내각(小內閣)이라 칭해지면서 대통령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비서실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청와대비서실 역시 브라운로위원회의 이 같은 설치안을 기초로 편성됐다.

 1946년 1월6일 마련된 최초의 대통령비서실 직제는 건국과 함께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단촐한 청와대비서실(당시 경무대비서실)을 구성했다. 비서관장(현 비서실장) 밑에 정무·공보·서무·문서·경무대를 두고 사실상 대통령 개인비서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며, 정부 부처의 기능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따라서 정책 자문과 집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당시 비서실은 대통령에 대한 외부 인사의 접근 가능성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강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윤보선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제2공화국은 내각책임제로 비서실 자체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1명의 비서실장과 대변인·국방·공보 3명의 비서관만 두어 비서실 사상 가장 단촐했다.

현대적 대통령비서실의 면모는 제3공화국에 이르러 그 모습을 드러낸다. 빠른 경제 발전을 위해 근대화된 행정 수행을 필요로 했고 그에 따라 체계적인 비서실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브라운로위원회의 권고안과는 달리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군부의 참모시스템을 기본 모델로 기능적으로 분화된 대통령비서실을 구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통령비서실 조직에 경제수석실이 처음 등장한 시기도 이때다. 물론 제3공화국이 출범했던 1663년 당시부터 경제수석실이 선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제3공화국 시절 경제수석실 첫선



 5·16 쿠데타 당시의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경제 상황 역시 최악의 수준이었다. 박정희 군부의 쿠데타 이유도 이에 근거하고 있었다. 즉 당시의 정치·경제 상황을 바라보는 데 있어 박정희는 정치적 혼란을 경제적 발전의 걸림돌로 지목했던 것이다. 결국 집권 후 박정희는 경제 발전이 정치 발전에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의지를 행정부에 명확하고 강하게 전달했다. 그 후속조치로서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정부정책의 수립 및 집행 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현대적 행정(관리) 능력을 갖춘 비서실 조직을 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정치적 정당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경제적 업적을 통해 이를 보충하려 했고, 그 결과 능률적이며 강력한 보좌기구의 필요성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수석실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69년 3월의 청와대비서실 기구 개편 때였다. 박 대통령은 주요 경제정책의 결정을 주로 장기영과 김학렬 두 부총리에게 의존했는데, 이는 당시 박 대통령이 경제정책 결정 과정과 관련된 경제이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는 경제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자 경제정책을 직접 관리하려고 했다. 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전문적인 경제 지식을 자문받기 위해 청와대비서실에 경제수석실을 설치하고 그 역할을 강화시켰다.

 대통령의 경제 지식의 한계로 경제 부처가 중심이 됐던 경제정책 관리권이 1969년 3월을 기점으로 경제수석실 신설과 함께 청와대비서실로 넘어간 것이다. 이러한 주도권 이전은 비서실이 내각에 비해 대통령과의 접촉이 월등히 잦다는 사실이 중요한 원인으로 해석되고 있다. 특히 김학렬 수석 같은 경우 경제에 대한 전문 지식이 약했던 박 대통령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했을 만큼 친분관계를 형성했고 접촉 횟수 역시 잦았다. 따라서 이러한 대통령과의 거리가 경제수석실의 기능 확대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볼 수 있다.

 경제수석실 신설은 시대적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경제 상황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었고, 이러한 위기 관리를 위해서는 기존의 정무수석실 체제로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기존 제도의 한계로 인해 새로운 전문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그 결과가 바로 경제수석실의 신설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처럼 1969년 3월 청와대 조직 개편에서 처음 등장한 경제수석실은 단일 조직이 아니었다. 경제1수석실과 경제2수석실로 선을 보였던 경제수석실은 5개월 후인 8월 경제1·2·3수석실로 개편된다. 또 11월1일 개편에서는 경제2수석실이 사라지고 경제1수석실과 경제3수석실만 남게 되는데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1월20일 다시 경제3수석실이 폐지되고 대신 외채관리수석설이 신설된다.

 외채관리수석실은 1970년 7월 개편에서 사라지고, 경제 관련 수석실은 경제수석실로 일원화된다. 이때 박 대통령의 경제 개인교사였던 김학렬 부총리는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에 1971년부터 실질적인 경제정책 관리의 권한이 비서실로 넘어오고 그 규모와 기능에 있어서도 비서실은 중요한 확대를 가져왔다.



 경제상황 따라 3개의 경제수석실도 등장



 1972년 개편에서 다시 경제수석실은 세분화 과정을 겪는다. 1971년 7월 경제1·2수석실로 분리됐던 것이 관광 진흥을 위해 경제3수석실이 신설돼 3개의 수석실로 분리된 것이다. 특히 과학기술과 중화학기술을 담당했던 경제2수석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는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 의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즉 산업화 전략의 추진이 바로 이 시기였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1962년 장면 정부의 경제 계획에 기반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는데 당시의 산업화 전략은 수입 대체 산업화와 내포적 산업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내포적 산업화 전략은 수출보다는 대내적 산업의 내부 연관성을 중시하고 1차 상품의 수출을 통해 외화를 획득하려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산업화 전략은 당시 한국에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요구하던 미국의 압력과 무리한 개발 자금 조달 계획 및 방만한 투자 계획으로 인해 수정이 불가피해졌고, 그 결과 경공업 중심의 수출 지향적 산업화 전략이 채택됐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에는 경공업 위주의 수출 지향이 중화학공업화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박 대통령의 중화학공업화라는 경제정책 의지가 청와대 비서실 기구에 반영돼 경제2수석실에 과학기술과 중화학기술 비서관제가 신설된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1973년 공업진흥청이 상공부 소속하에 신설되었으며 박 대통령의 커다란 관심 속에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1973년 2월 설치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청와대의 중화학기술비서관 신설은 당시 관련 제도들의 신설과 상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또 경제3수석실의 신설은 당시 경제 상황과 관련돼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당시 국내 저축 증가율과 투자율을 보면 꾸준히 증가한 총 투자율에 비해 점차 감소 추세를 보였다. 또 60년대 말과 70년대 초반의 외채 잔액과 차관 도입이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는 결국 투자할 곳은 많은데 투자할 재원은 부족하고 대신 외채만 늘어가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 부족한 외화 획득의 방안으로 비서실에 직접 관광 진흥을 도모하기 위해 경제3수석실을 신설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1974년 2월 경제수석실은 다시 축소, 개편된다. 경제3수석실이 폐지되고 그 업무는 경제1수석실로 이관된다. 또 경제1수석실이 관장하던 중화학공업 기획 업무를 경제2수석실로 이관, 그 업무 일부도 조정했다.

 그리고 1979년 12월 개편에서는 분리돼 있던 경제1·2·3수석실을 다시 경제수석실로 일원화한다. 이는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저격으로 사망하고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가 12월6일 대통령으로 취임, 청와대 비서실 조직을 개편한 데 따른 것이다. 즉 최 대통령에게 더 이상 박정희 스타일의 비서실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1970년대 들어 청와대 경제수석실의 강화를 통해 주요 경제정책을 직접 관리했던 박 대통령에게 경제수석실의 분리와 통합이란 자신의 편의와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바뀌는 선택적인 사항이었다. 이에 따른 정책 기능 중복이나 혼선 따위는 박 대통령에게 커다란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문화와 분업화의 이점을 얻기 위해 자신의 기호에 맞는 맞춤복처럼 비서실 기구를 조직화했으나, 신임 최 대통령에게는 이 같은 경제수석실이 적절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 중정(中情)부장’오원철 수석



 박 대통령이 집권했던 제3·4공화국 시절의 경제수석실은 무엇보다 경제 성장 제일주의에 의한 경제정책 보좌 기능의 강화라는 측면이 크게 부각됐다. 또 경제 전담 직제의 강화가 그 특징으로 꼽히고 있다.

 업무적 기능은 철저히 대통령의 경제 상황 인식에 따르고 있었다. 1970년대의 박 대통령은 중요한 경제정책을 언제나 단독으로 결정했으며, 경우에 따라 남의 입을 빌리면서 최종 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세부적인 내용은 아래로 위임해 경제수석실에서 강력한 결정권을 갖도록 하기도 했지만 최종 결정은 역시 박 대통령의 몫이었다.

 예를 들어 70년대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큰 흐름으로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 기조를, 구체적인 산업정책으로는 중화학공업화를 확고히 했다. 즉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으로 압축된다. 이처럼 경제정책의 큰 테두리가 결정되고 나면 나머지 중요한 경제정책 문제는 구체적인 사업에 대한 미시적 결정이 되는데, 박 대통령은 이 같은 미시적인 결정인 중화학공업정책도 비서실을 통해 직접 관리했다.

 때문에 박 대통령은 경제수석에 직업 관료나 전문가를 임명했다. 1968년 처음 등장한 경제수석은 차관급으로 경제정책 결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70년대에는 이들이 경제장관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 재임기간인 60년대와 70년대에는 모두 11명의 경제수석이 대통령비서실을 거쳐 갔다. 김학렬·신동식·정덕진·정소영·오원철·양윤세·김용환·이경식·이희일·서석준·최창락 수석이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관료 출신이었다.

 이들은 모두 박 대통령의 성장철학을 믿고 따르며 경제정책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역할을 주저하지 않았다. 또 이들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워 성장 제일주의 기수로 68년 초대 김학렬 경제1수석은 부총리로 영전됐으며, 김용환 수석은 재무부 장관으로, 이희일·정소영 수석은 농수산부 장관으로 각각 승승장구했다. 또 8년간 제2수석을 맡으며 방위산업 등 국가사업을 관장했던 오원철 수석은 ‘경제 중정(中情)부장’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막강한 권력자였다.

 이들 경제수석 밑에는 평균 4~5명의 국장급 비서관이 근무했다. 3공화국 시절 약 25명의 비서관이 있었는데 그 중 14명은 관료 출신이었고 2명만 군 출신이었다. 경제비서관은 주로 국장급 관료로 충원됐으며 이들은 각 부처의 엘리트였다. 젊고 유능한 국장들이 각 부처에서 선발돼 경제비서관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정 기간(보통 2~5년)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원래의 소속 부처로 돌아갔는데 소위 ‘엘리트 코스’ 수료자였음은 당연하다.

 경제수석실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시기는 역시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다. 제5공화국 비서실은 가장 큰 특징으로 ‘비서실 권한의 축소’가 지적되고 있지만 경제수석실은 사정이 달랐다.



 막강 파워 제5공화국 경제수석실



 전 대통령은 박 대통령 시절처럼 대통령비서실장이 정권의 제2인자로 행세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비서실은 주로 대통령과 내각 사이의 연락관과 같은 비서 기능 위주의 역할을 했다.

 1980년 9월 청와대비서실을 개편하면서 당시 이웅희 청와대 대변인의 논평은 제5공화국의 비서실 역할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비서실 개편은 정치와 행정을 완전히 분리하고 비서실을 순수한 대통령의 참모 역할만으로 활성·강화함으로써 종전과 같은 비서실의 일부 부패를 방지하며, 대통령비서실이 미니 행정부가 아니라 순수한 참모진으로서 역할을 함으로써 장관들의 대통령에 대한 보고 체계를 확립, 누적된 폐단인 ‘인의 장막’을 제거하며, 모든 행정 업무는 내각의 각부 장관 중심으로 운영토록 하려는 데 취지가 있다.”

 그러나 경제수석실은 이 같은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나 있었다. 역대 정권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 시절과 함께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또 가장 오랜 재직 기간도 제5공화국 경제수석들이 가지고 있는 기록이다.

 전 대통령 시절의 경제정책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나라 국가정책의 기본 방향이자 통치 이념이었던 ‘경제 제일주의’가 계속 이어졌다. 경제 성장 제일주의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산업자본 축적을 위한 국가정책의 기본 이념과 비슷했다. 다만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에서의 경제 제일주의는 경제 성장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데 반해, 제5공화국 이후에는 경제 안정, 특히 물가 안정을 통한 경제 발전을 추진하게 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전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1980년에는 1960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해였다. 생산은 위축되고 물가는 폭등했으며 정치는 혼란 속에서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 대통령은 ‘경제 성장 제일주의’와 ‘물가 안정을 통한 경제 성장’을 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노사관계 억압과 임금 가이드라인 설정에 의한 저임금 유지, 농산물 가격 통제 등은 당시의 주요한 정책 기조가 됐다.

 따라서 경제수석실은 전임 정권과 같이 그대로 운영이 됐지만 경제수석실로 통합 운영됨으로써 힘의 분산을 막았다. 또 비서실 조직 개편에서도 경제수석실의 비서관 명칭 변경 외에 특이한 변화를 주지 않았다.

 경제수석실에 변화를 주지 않은 전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임명에서도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마지막 6개월 정도를 맡은 박영철 수석을 제외하면 5공화국 7년 동안 김재익·사공일 두 수석만이 경제수석의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특히 1983년 김재익 수석이 아웅산 참사로 작고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5공화국 경제수석 자리는 교체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게 당시 정부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8명의 국무총리가 명멸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이처럼 5공화국 경제에서 김재익·사공일 수석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두 사람을 빼고 제5공화국 경제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그만큼 전 대통령은 두 사람에게 경제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의지했고 경제 자체를 맡겼다. 김재익 수석을 향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당시 전 대통령의 경제수석에 대한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전한다.

 그러나 두 수석의 스타일은 전혀 달랐다. 김재익 수석은 이상주의자로 과격할 정도로 개혁을 추구했지만, 사공일 수석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두는 실천가였다.

 제5공화국 초기는 김재익 수석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시기다. 대통령이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하고 경제수석이 대통령의 손발과 같이 움직이면서 실질적인 결정권은 행정 부처가 아닌 경제수석에게 집중됐다. 이는 전 대통령이 거시적·미시적 논리가 동시에 요구되는 복잡한 문제를 짧은 경제지식으로 판단하기에 어려워 대통령의 지시에 장관들이 반대논리를 내세울 때 자신의 결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줄 경제수석을 필요로 했고 김재익 수석은 이런 자리에 늘 함께 했다. 때문에 김 수석은 행정 부처 관료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비쳐졌다. 더욱이 경제 부처 국장급 이상의 고위 관료에 대한 인사권을 대통령과 경제수석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 수석의 영향력은 더욱 강했다. 대통령 ← 경제수석 ← 부총리 ← 부처 장관의 정책 결정 체제가 형성되었던 시기였다.

 이런 대통령의 강력한 신임 속에서 경제수석은 경제 관료들에 대한 인사권까지 행사하기도 했다. 이석채·홍철 박사 등이 비서실 경제팀에 합류한 것과 이승윤 재무장관의 퇴임, 김만제 KDI 원장을 김기환으로 교체한 것도 김 수석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수석 등 개혁파들이 추구했던 제5공화국의 경제정책은 수출 증대와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정부가 주도하는 성장 위주 정책 기조로부터 자율화·개방화·경제 안정을 추구하는 정책 기조로의 전환이었다. 이 가운데 경제 안정은 물가 안정이라는 형태로 전 대통령의 머릿속에 깊숙이 자리 잡아 제5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경제부총리와의 권력싸움 폐해



 도매물가 42.3%, 소비자물가 32.2%. 1980년의 물가 상승률이다. 그동안 우리 경제에서 유례가 없던 상승률이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 도매물가는 2.4%, 소비자물가는 4.7%로 끌어내려졌다. 가히 혁명적이 아닐 수 없었다.

 물가 안정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김재익 수석에게 전 대통령은 전폭적인 신임과 함께 그의 주장과 논리에 제5공화국 경제를 맡겼다. 이처럼 김 수석과 강경식 등이 중심이 된 개혁파는 전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혁명적인 개혁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이상주의적이고 급격한 개혁을 시도했던 김재익·강경식과는 달리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서석준 부총리가 등장하면서 두 사람의 개혁은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경제기획원에서 함께 일하면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서석준 부총리에게 김재익과 강경식이 주도하는 급격한 안정화·자율화 개혁이란 당시 계속되는 불황으로 도산에 직면한 기업 실태를 간과한 위험천만한 도박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립은 불과 4개월도 가지 못했다. 1983년 10월 아웅산에서 김재익 수석과 서석준 부총리가 함께 순직하는 참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김 수석에 이어 경제수석에 임명된 사공일 수석은 초기 김 수석의 그림자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숫자 암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김 수석과 항상 비교가 됐고, 특히 전 대통령의 김 수석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사공 수석에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공 수석은 특유의 설득력으로 이를 극복했다. 사공 수석이 경제수석을 맡았을 때는 이미 물가가 안정됐고 미국의 통상 압력 증가에 따라 개방화가 꾸준히 추진되었다. 또 자율화는 거의 포기 상태였다. 때문에 사공 수석은 타성에 젖은 부처 관료들과 개혁을 위한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부처 실·국장들과 의논하고 장관과도 사전 협의를 함으로써 원만하면서도 적극적인 정책 협조가 가능했다. 특히 김 수석 재임 때와는 달리 사공 수석은 조용한 업무 추진 스타일로 비서실의 신임도 얻었을 뿐 아니라 1986년 안정화·고도성장·국제수지 흑자라는 소위 세 마리의 토끼를 잡음으로써 대통령의 신임도 얻었다.

 제5공화국의 경제수석실은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면서도 가장 뒷말이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경제수석실이라 평가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권한이 편중됨으로써 비서실의 역할을 뛰어넘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는 경제문제에 있어 문외한이었던 전 대통령이 원인 제공자였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경제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던 제3·4·5공화국과는 달리 헌정사상 최초로 평화적 정권 이양을 통해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의 제6공화국은 권위주의 청산을 표방했다. 대통령 비서실이 축소되고 내각 중심의 국정 운영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특히 경제정책과 관련해서는 국가 주도형의 발전 형태를 지양하고 “기업인의 창의와 자유를 북돋으며 근로자와 농어민, 중소상공인의 권익을 신장”시킬 것을 강조했다. 또 “그동안 이룩한 고도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미치는 정직하고 정의로운 국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제6공화국은 ‘안정 속의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성장 원동력이 약화되고 분배의 불균형과 경제 운용의 불공정에 따른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대외적으로 통상 마찰, 국내시장 개방 압력이 거세지면서 능률과 형평을 토대로 ‘자력 성장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산업 구조 조정을 통한 성장 잠재력을 배양하고 경제의 자율화와 개발화를 추구하며 경제의 균형 성장을 위한 사업에 주력하게 된다.

경제수석실의 역할도 제5공화국과는 전혀 달랐다. 호황기에 취임했던 노 대통령은 정치 민주화와 올림픽 성공에만 관심이 있었고, 경제는 그냥 둬도 저절로 굴러가는 줄 알고 있었다. 또 경제수석이 정책 결정에 나서는 것을 별로 마땅치 않게 여겼다.

 그러나 1992년 2월 비서실 개편을 통해 경제수석실은 크게 확대됐다. 이는 노 대통령의 직접적인 경제정책 관리에 따른 통치 스타일의 변화로 해석되고 있다.

 이전까지 노 대통령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경제는 뒷전이었다. 제6공화국 초기만 해도 제5공화국 때의 3저(저금리·저유가·저환율) 호황의 영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한 학자 출신의 박승 교수가 초대 경제수석에 임명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집권 중반을 넘기면서부터 각종 경제지표에 빨간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장은 둔화됐고 여기저기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제가 별 이상 없이 굴러간 데다 복잡한 경제 분야에 애당초 관심이 없었던 노 대통령도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991년 노 대통령은 경제정책과 관련된 각종 회의를 주재하는 등 직접 관리 체제로 전환했다. 또 1992년 “이제부터 경제를 직접 관리하겠다”고 공식 표명하기까지 했다. 정권 초기 5개 비서관제로 구성돼 있던 경제수석실을 7개 비서실제로 확대한 것도 이 시기다. 당연히 강한 경제수석도 필요했다.

 이처럼 제6공화국 당시 경제수석실의 힘이 약화됐던 이유는 5공화국 때와는 달리 정치 민주화·행정 분권화·개방화 그리고 통치이념의 갈등이 계속되는 속에 설상가상으로 노 대통령의 방임적 태도, 약한 리더십 등이 겹쳤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1988년 12월 실무에 강하고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줄곧 주장해 왔던 문희갑 수석과 그 뒤를 이은 1990년 김종인 수석의 등장으로 경제수석실은 한때 과거의 위상을 되찾기도 했다.

 문 수석은 배짱 있는 관료 출신으로 실무 관료들을 이끌고 특유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토지공개념 등 파격적인 조치들을 밀어붙였다. 또 금융실명제를 강력히 추진했지만 반대론자들에게 휩싸인 대통령과 뜻이 맞지 않아 1989년 하반기부터 그 힘이 급격히 약화됐다.

김 수석 역시 추진력과 고집이 있었지만 실무 지식이 약했다. 특히 최각규 부총리 등장 이후에는 노련하고 실무 지식이 풍부한 정통 관료 출신인 부총리에게 밀려 권한도 상당 부분 넘겨줘야 했다. 그러나 김 수석은 노 대통령의 신뢰 아래 약 2년간 수석직을 지키며 재벌의 과다한 부동산 소유에 철퇴를 가하는 ‘5·8 부동산대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반면 학자 출신이었던 박승 수석은 실무 지식이 부족했던 탓도 있었지만 경제수석의 역할을 대통령을 보필하면서 경제의 줄기만을 잡는 것이라고 여겼던 탓에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스스로 경제수석실의 권한을 축소시킨 것이다. 이는 제6공화국 말기의 이진설 수석도 비슷했다.



융실명제 까맣게 몰랐던 경제수석



 1993년 2월 14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다. 김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개혁을 위한 3대 당면 과제로 부정부패 척결, 경제 살리기, 국가 기강 확립을 제시하고 ‘작은 정부’를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이에 경제 부처인 상공부와 동력자원부를 통합한 상공자원부를 신설하고 경제수석실에는 간접자본비서관제를 신설해 산업 발전의 기반 확충을 꾀했다.

 그리고 취임사를 통해 밝혔던 신한국 창조의 3대 당면 과제의 하나였던 경제 살리기의 일환으로 ‘신경제’를 주창하며 취임 직후인 1993년 9월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 문민정부의 경제 청사진으로 기능하게 했다.

 이 계획은 기본 목표를 “우리 경제가 직면한 안팎으로부터의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제2의 도약을 이룩함으로써 우리 경제를 선진국에 진입시키고 머지않아 다가올 통일에도 대비하는 튼튼한 경제를 건설하는 데 두고 있다”고 밝혔다. 또 목표 달성은 과거와 같은 정부의 지시·통제가 아닌 민간 부분의 자발적 참여와 능동적 창의를 전제로 해야 가능한 것으로 보고, 모든 국민의 참여와 창의가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과 정당한 보상이 보장되는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경제 개혁을 추진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불합리한 경제 행정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고, 경제사회 전반의 효율과 형평을 증진시키기 위한 재정·금융· 세제 등 각 분야의 제도 개혁을 강조했다.

 이 같은 경제 살리기를 위해 대통령비서실에 역시 경제수석실을 유지했다. 다만 과거 정권과의 차이라면 금융실명제와 같은 금융 개혁을 위한 조세금융비서관제와 정보화와 관련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정보통신비서관제가 운영된 것이다. 정보화와 관련해서는 정책수석실하의 정책4비서관제 또한 정보화 혁명을 위한 보좌 기능 확보를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이와 함께 개방과 경쟁을 특징으로 하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등 농산물 시장의 개방에 대한 대책으로 농어촌 구조 조정을 통한 농어촌 경쟁력 강화가 국정 운영의 목표로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1994년 1월 개편에서는 농수산수석실이 신설됐다. 그 결과 농수산정책 보좌 기능이 경제수석실에서 독립되어 강화됐다.

 김영삼 정부 초기의 경제는 각종 개혁적인 조치들이 취해지면서 청신호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대통령 긴급명령 형태로 1993년 8월12일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함으로써 금융제도 개선 의지를 드러낸 것은 대표적이다. 이는 신경제 5개년 계획의 금융산업정책을 구체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특히 금융실명제 실시는 김영삼 정부가 시도한 여러 개혁 가운데 가장 개혁적인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석의 비참한 말로



 초대 박재윤 수석이 등장하면서 경제수석실도 사실상 제5공화국 시절에 비유될 만큼 막강했다. 김 대통령 후보 시절 경제담당 특보로 발탁됐던 박 수석은 김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임을 바탕으로 ‘신경제 계획’을 ‘불도저’라는 별명답게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그러나 박 수석을 중심으로 한 경제수석실이 경제 부처 및 관련 단체 업무에까지 간여,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다른 경제 부처들과 마찰을 빚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 영향력은 급격히 약해졌다.

 특히 금융실명제 실시 과정에서 이경식 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경제팀이 대통령 특명으로 금융실명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도 박 수석만 실시 직전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일화는 경제수석실의 위상 약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박 수석은 이 부총리와 대화조차 꺼렸을 정도로 불편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신경제 5개년 계획’ 수립 과정에서부터 정책 결정에 혼선을 빚어야 했다.

 박 수석 주도로 입안됐던 문민정부의 경제 청사진에 해당하는 신경제 5개년 계획이 정권 출범 1년이 지나면서 사문화돼 버린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대신 잇따라 성급하게 마련된 ‘세계화’(94년), ‘경쟁력 10% 높이기’(96년) 등의 경제 청사진은 문민정부 시절 경제를 왜곡시키는 대표적인 사례다. 결국 정권 말기 국가 부도 사태로 비유되는 IMF 금융 지원을 받게 되면서 경제수석과 경제팀의 불화는 국가적 경제 위기로까지 이어졌다.

 박 수석에 이어 문민정부의 경제수석을 맡았던,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의 경제 가정교사 한이헌 수석과 문민정부 후반 최고의 경제 실세로 군림했던 이석채 수석도 경제부총리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경제수석이다.

 문민정부 시절의 경제수석은 박재윤·한이헌·구본영·이석채·김인호·김영섭 수석 등이 거쳐 갔다. 이 가운데 서울대 교수 출신인 박재윤 수석을 제외하곤 모두 경제 관료 출신이란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IMF 금융 위기로 이들은 모두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경제 파탄에 이르게 한 주역들이라는 이유에서다. 안정이 필요할 때 경기 부양책을 쓰고 종금사를 무더기로 허용하고 환율의 점진적인 평가 절하 시기를 놓쳐 결국 외환 위기를 불렀다는 것이다.

 때문에 김인호 수석은 퇴임 후 외환 위기와 관련 감사원의 조사를 받았고, 막강한 힘을 행사했던 이석채 수석은 PCS 선정 특혜 의혹을 받고 사법 처리되기도 했다.

 

 부총리 퇴진시킨 경제수석



 문민정부의 유산인 IMF 관리 체제라는 금융 위기 사태와 함께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적 구조 조정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는 데 경제정책의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 위해 금융·기업·공공·노동 4대 부문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함으로써 기업의 투명성 제고 및 지배 구조 개선, 기업 재무 구조 개선을 골자로 한 재벌 개혁 작업을 본격화했다. 또 금융 개혁과 자본 자유화를 단행했다. 또한 참여와 협력의 새 노사문화 추진을 위한 노사정 협력 체제를 강화했으며, 구조 조정에 의한 실업 확대에 대해 범정부적인 실업 대책을 마련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영상 이유로 인한 해고제도, 근로자 파견제도도 신설했다.



 특히 정보화 추진에 대한 노력이 심화됐다. 이는 97년 말 경제 위기 후 산업 구조 재편과 구조 조정 과정에서 정보화 역할이 증대했으며, 세계 경제 질서의 재편과 신기술의 발전은 구조 조정기 이후 한국경제의 도약을 위한 새로운 환경을 조성할 것이라는 기대에 의한 것이었다.

 경제수석실도 이와 같은 커다란 전제하에 재편됐다. 금융 위기와 이에 따른 심각한 경제 위기 아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첫 조치로 ‘작고 강한 정부’의 구축을 강조한 국민의 정부는 경제수석실로 하여금 각종 경제 개혁과 구조 조정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했다. 또 경제수석실 안에 통신비서관제가 설치돼 정보화 관련 정책 보좌 기능을 수행토록 했다.

 초대 경제수석도 전혀 의외의 인물이 발탁됐다. 개혁과 원칙을 강조하는 진보적 성향의 경제학자로 알려진 김태동 당시 성균관대 교수가 임명된 것이다. 진보적 경제학자 그룹인 중경회 멤버인 김 수석의 경제수석 기용은 그동안 고도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구사했던 서강학파 중심의 경제정책이 진보적 학자그룹인 학현학파 주도로 변화되는 것을 뜻하는 ‘사건’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에서도 문민정부와 같은 경제수석과 경제부총리의 불협화음이 이어졌다. 경제장관 간담회 개최 장소를 청와대 근처에서 할 것인지, 아니면 과천청사에서 할 것인지를 놓고 부총리와 경제수석이 충돌한 사례는 대표적이다. 또 최장수 경제수석인 이기호 수석과 당시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갈등은 급기야 이 부총리를 8개월 만에 도중하차시켰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경제수석실 순기능 재평가돼야



 이처럼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지난 25년 동안 한국 경제 성장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령부로 기능해 왔다. 경제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제3공화국하에서 신설된 경제수석실은 특히 제4공화국 들어 경제1·2·3수석실로 분리되어 강화·운영되었는데 이른바 유신 이후 더욱 약화된 민주적 정당성을 경제 성장을 통해 보완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또 경공업산업의 발전으로 경제 성장이 어느 정도 빛을 보기 시작하자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도모할 필요성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 때 우루과이라운드에 대비해 농수산수석실과 분리돼 운영됐으며, 김대중 정부 때는 경제수석실이 축소돼 운영됐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경제수석실이 폐지되고 정책수석실과 경제보좌관실이 신설돼 운용되고 있다.

 즉 경제 내부적 또는 외부적 상황에 따라 여러 변신을 겪으면서도 경제수석실이라는 본래의 명칭을 고수하며 긍정적인 역할과 함께 부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경제수석실이 한국 경제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비서 조직이었다는 점에서만큼은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 4명의 경제수석이 부정비리 사건에 연루돼 사법 처리가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그 필요성은 여전히 축소되지 않는다. 또 여러 이유에서 경제부총리와 끊임없이 갈등을 표출했던 점 역시 역대 경제수석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지만 이는 단면일 뿐이다.

 오히려 경제수석실은 청와대와 경제 부처 간의 원활한 경제정책 조정을 통해 정책 혼선을 줄일 수 있으며, 경제정책의 집행력과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또 경제정책에 대한 정부 역량이 보다 집중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다만 역대 경제수석들이 정부의 경제팀 수장인 경제부총리와 권력싸움으로까지 불릴 만큼 심각한 갈등을 보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인사정책이 필요하다고 경제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국민의 정부에서 경제수석을 역임했던 현정택 인하대 교수는 대통령 중심제하에선 경제수석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며, 특히 요즘처럼 경제적 비상시국에서는 더더욱 그 필요성이 강조된다고 말했다. 또 김중수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도 “그동안 정책기획수석의 업무 범위가 너무 넓어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은 문제점이 있었다는 점에서 경제수석 부활은 바람직하다”고 말한 바 있다.

 경제평론가 이성태 씨도 “현 정부가 경제수석실의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면서 “경제수석실의 부정적인 측면은 결국 경제수석을 거느리고 있는 대통령에게 책임이 지워져야 한다는 점에서 비서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을 경제수석의 역기능을 강조하기에 앞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재경부가 추진했던 종합투자계획에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노골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양도세 중과제도를 놓고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과 이헌재 부총리 사이에 이견이 노출되는 등 경제정책에 대한 갈등과 혼선은 심리적 불황을 한층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은 익히 확인된 바 있다. 또 성장과 분배 사이에서 경제팀과 청와대가 대립하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는 현실에서 이를 조정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경제수석의 필요성은 한층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