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사장이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19’ 행사 도중 자사의 5G 모뎀칩 ‘스냅드래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사장이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19’ 행사 도중 자사의 5G 모뎀칩 ‘스냅드래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잡스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애플을 창업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바일 인터넷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위대함’이라는 말로는 그를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그는 엄청나게 위대(super-great)했다.”

매출 122조원의 중국 정보통신기술(ICT) 공룡 화웨이의 런정페이(任正非)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15일(현지시각) 미국 경제전문방송 CNBC 인터뷰에서 대뜸 경쟁사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극찬하기 시작했다. 화웨이가 애플에 모바일용 5G 모뎀칩 독점 공급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상황이어서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졌다. 런 회장은 관련 소문에 대해서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 열려 있다”며 부인하지 않았다. 발언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다만 런 회장이 기대하던 것과 방향이 정반대였을 뿐이다.

애플은 당시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과 2년 넘게 최대 270억달러(약 30조원) 규모의 초대형 특허 분쟁을 진행 중이어서 5G 모뎀칩 공급에 차질이 불가피해 보였다. 2016년 아이폰7을 출시하면서 퀄컴의 독점 공급 시대를 끝내고 인텔과 퀄컴 양쪽으로부터 모뎀칩을 공급받기 시작했지만, 퀄컴이 수년간 특허 사용료를 과도하게 청구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둘의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이에 맞서 퀄컴은 애플이 인텔 모뎀칩을 사용하는 아이폰의 취약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사 모뎀칩의 소스코드와 로그 파일을 포함한 기밀 정보를 인텔에 유출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양사의 갈등이 본격적인 소송전으로 이어지면서 애플은 퀄컴과 거래를 끊고 인텔 모뎀칩만을 사용해 왔다. 문제는 믿었던 인텔의 모바일용 5G 모뎀칩 개발에 기대만큼 속도가 붙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텔의 5G 모뎀칩은 내년 하반기나 되어야 양산이 가능할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얼마 전 ‘갤럭시S10 5G’를 출시하며 5G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었고, 화웨이도 7월 중으로 5G 기반 폴더블폰 ‘메이트 X’를 선보일 예정이어서 애플 입장에서는 5G 시장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모뎀칩 ‘엑시노스 모뎀 5100’과 퀄컴의 ‘X50’을 5G 기기에 사용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모바일용 5G 모뎀칩을 생산하는 곳은 퀄컴과 삼성전자, 화웨이 외에 대만 미디어텍과 중국 칭화유니그룹 자회사 UNISOC(유니SOC) 정도여서 애플 입장에서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애플은 최근 삼성전자에도 ‘엑시노스5100’ 5G 모뎀칩 구매를 타진했지만, 공급량 부족을 이유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미디어텍 제품도 물망에 올랐지만 성능에서 애플이 요구한 수준을 맞추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애플에 남은 선택지는 퀄컴과 소송을 중단하거나 화웨이와 손잡는 것뿐이었다. 기술력만으로 보면 화웨이와 협력하는 것이 나쁜 선택이 아닐 수도 있었다. 화웨이가 자체 개발한 ‘발롱 5000’ 모뎀칩은 세계 최초로 SA(5G 단독 모드)와 NSA(4G·5G 호환 모드)를 동시에 지원한다. 이론상 4.6Gps의 5G 다운로드 속도를 구현할 수 있다. 삼성전자가 출시한 ‘엑시노스5100’ 5G 모뎀칩은 NSA 모드만 지원하며, 속도는 2Gbps다. 더구나 화웨이의 5G 표준 필수특허는 1529건(2월 기준)으로 세계 1위다.


트럼프 “5G 경쟁은 반드시 미국이 이겨야만 하는 경주”

업계 전문가들은 양사가 협력할 경우 시너지가 상당할 것으로 내다봤다. 애플은 5G 아이폰에 화웨이 5G 모뎀칩을 사용한다면 제품 개발에만 매달릴 수 있어 계획대로 내년에 5G 기반의 아이폰을 출시할 수 있다. 화웨이는 자사 브랜드에만 적용하던 통신칩을 애플에 공급하면서 5G 기술력을 세계에 홍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의 기술굴기를 제지하기 위해 동맹국까지 설득해가며 필사적으로 ‘손을 보려’ 하는 기업이 바로 화웨이라는 점이었다. 미국 정부는 미·중 무역 전쟁의 심화와 보안 우려로 자국 기업의 화웨이 제품 사용을 금지했다. 지난 1월 미 법무부는 미국 이동통신사 T-모바일의 영업 기밀을 빼돌린 혐의로 화웨이를 기소한 바 있다.

퀄컴은 지난해 경쟁사 브로드컴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를 트럼프 행정부 도움으로 간신히 막아냈다. 브로드컴은 싱가포르 회사지만 중국 자본으로 운영되며, 화웨이와도 협력관계라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가 나선 이유였다.

잡스에 대한 런 회장의 헌사가 보도된 바로 다음 날 애플과 퀄컴은 기다렸다는 듯이 각각 성명을 내고 특허 소송과 관련해 양사가 합의를 이뤘으며, 상호 간 제기한 각종 소송을 일괄해 취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12일 백악관 연설에서 “5G 경쟁은 반드시 미국이 이겨야만 하는 경주”라며 “다른 나라가 미국을 앞지르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결의를 다진 것도 두 회사가 전격적으로 합의에 이르도록 하는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의견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이 애플과 퀄컴이 합의하도록 설득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 무선통신 업계가 5G 기술에 2750억달러(약 311조7000억원)를 투자해 3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결과적으로 런 회장의 애플 발언이 미국 ICT 업계가 ‘위기 경보’를 울리도록 만든 꼴이 됐다. 익명을 요구한 반도체 업계 전문가는 ‘이코노미조선’ 인터뷰에서 “애플이 팹리스(설계)와 파운드리(위탁생산)를 겸비한 인텔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5G 모뎀칩 개발이 늦어지면서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며 “미국이 중국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애플과 화웨이의 협력 가능성은 처음부터 희박했다”고 평했다.

이번 합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애플이 퀄컴에 일정 금액의 로열티를 지급하고, 양측이 ‘2년 연장’ 옵션의 6년짜리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애플에 대한 퀄컴의 모뎀칩 공급도 재개될 전망이다. 이번 합의는 4월 1일을 기준으로 소급해 효력이 발생한다.

16일 퀄컴 주가는 23.2%(13.27달러) 뛰어오른 70.45달러에 장을 마감했다. 9년 만에 최대 상승 폭이었다. 퀄컴은 애플과 소송으로 로열티 수입이 급감하면서 지난해 3분기에 4억9300만달러 순손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퀄컴이 최대 수혜자가 된 것 같지만, 5G 경쟁에서 뒤처질 위기를 넘긴 애플도 크게 손해 본 것 같지는 않다. 경쟁자의 위기 상황에서 존재감을 널리 알린 화웨이도 마찬가지다. 최대 피해자는 인텔이라는 분석이다. 이번 합의 여파로 그동안 공들여 온 모바일용 5G 모뎀칩 개발 포기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애플과 퀄컴의 재결합으로 진용을 정비한 미국과 5G 특허 세계 1위 화웨이를 앞세운 중국, ‘세계 최초 5G폰 상용화’라는 쾌거를 이룬 삼성전자를 앞세운 한국이 벌이는 ‘글로벌 5G 삼국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