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영국 여성이 6월 20일 런던의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유럽연합(EU)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영국 여성이 6월 20일 런던의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유럽연합(EU)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 2년이 지난 영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예정대로 내년 3월 브렉시트가 실행될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청사진을 내놓지 못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영국은 2016년 6월 23일 유럽연합(EU) 잔류·탈퇴를 묻는 국민투표 결과 51.9%의 찬성으로 43년간 몸담았던 EU를 떠나기로 했다.

불안감을 느낀 기업들이 투자를 유보하면서 경제 성장이 둔화됐고, 독일과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로 지역 본부 이전을 계획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이와 함께 다른 EU 회원국 국적을 취득한 영국인 수도 급증했다.

지난 1분기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2%에 그쳤다. 우리나라(1.1%)와 미국(0.6%)은 물론 독일과 프랑스(각각 0.3%) 등 유럽의 경쟁국과도 차이가 벌어졌다. 영국상공회의소(BCC)는 영국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1.3%로 전망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독일 투자은행 베렌버그의 칼룸 피커링 영국 담당 이코노미스트는 관련 보고서에서 “선진국 중 상당수는 지난 2년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면서 “하지만 영국의 경우 브렉시트 여파로 성장률이 둔화됐다”고 분석했다.

영국의 2~4월 실업률은 4.2%로 앞선 3개월 동안 1975년 이후 최저로 떨어진 뒤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실업률이 낮은 것은 고무적이지만, 이 또한 ‘착시현상’이란 의견이 많다. 실업률은 금융위기 발발 당시(5.3%)보다 낮아졌지만, 임금 상승률 또한 4.7%에서 2.8%로 낮아진 것이 문제다. 금융위기 당시 경제가 나빠지면서 파트타임 등 비정규직 비중이 늘었고, 아직까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3%를 넘나들고 있어서 소비심리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영국에는 고용주의 필요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시급을 받는 ‘호출형 근로계약(Zero-hours Contract)’이 성행 중이다. 최대 근무시간과 최저임금 등을 보장받는 파트타임 근무보다 근무 조건이 열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언제 고용주가 부를지 모르니 다른 부업을 하기도 어려운 데다, 유급휴가나 병가 등 기본적인 혜택을 누리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영국 통계청의 최근 발표 내용을 보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간 이 같은 고용 형태는 지금까지 4배 증가했다.

브렉시트 협상을 둘러싼 불확실성 증가로 기업들의 영국 기피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영국 경제의 미래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미국의 세계적 로펌인 베이커 앤드 맥킨지가 최근 브렉시트 국민투표 2주년을 맞아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EU 6개국 임원 800여명 중 46%는 “지난 2년간 영국 투자를 줄였다”고 답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프랑스와 독일, 스웨덴, 아일랜드, 스페인, 네덜란드 등 6개국에서 연간 2억5000만파운드(약 37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거두는 기업을 상대로 실시됐다.

이와 관련해 유럽 최대 항공기 제작사인 에어버스는 지난달 22일(현지시각) 영국이 EU와 관세 동맹에 대한 합의 없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이른바 ‘노 딜(No Deal) 브렉시트’가 현실화할 경우 영국을 떠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에어버스는 프랑스에 본사가 있지만, 주요 생산 시설은 영국에 두고 있다. 영국 내 직접 고용 인원은 약 4000명이지만, 협력업체 직원을 합치면 11만명에 달한다.

이에 앞서 독일 자동차업체 BMW의 하랄트 크뤼거 회장은 지난 5월 브렉시트 협상의 불확실성을 지적하면서, BMW는 상황에 따라 생산 설비를 재배치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BMW는 브렉시트 결정 이후 수출 허브로서의 영국 위상이 흔들릴 것을 우려해 네덜란드에 생산설비를 구축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BMW는 웨스트 서식스에 생산공장을, 판버러에 영업 및 마케팅 자회사를, 손 지역에 자동차 유통센터를 두는 등 총 8000명을 고용하고 있다. 브렉시트 결정 이전인 2012∼2015년 영국 옥스퍼드와 햄스 홀, 스윈던 등의 생산 설비 유지 보수에 7억5000만파운드(약 1조1000억원)를 투자한 바 있다.


영국인이 가장 많이 택한 국적은 독일

금융업체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메릴린치와 골드만삭스는 브렉시트 이후 유럽 본부를 각각 파리와 더블린, 파리와 프랑크푸르트로 분산할 계획이다. HSBC도 브렉시트가 현실화할 경우 영국 직원 1000명을 파리에 재배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더 나은 기회를 찾기 위해 다른 EU 회원국 국적을 취득하는 영국인 수도 급증했다.

BBC가 EU 주요 회원국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서 지난해 EU 주요 17개 회원국 국적을 취득한 영국 국민은 모두 1만2994명으로 전년(5025명) 대비 2.58배, 2015년(1800명) 대비 7.21배에 달했다. 이들 국가 중 대부분은 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있지만, 독일 등 일부 국가들은 EU 회원국 국민에게만 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있어 브렉시트 이후 영국 국적을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날 수도 있다.

영국 국민이 가장 많이 택한 새 국적은 독일(7493명)이었고, 프랑스(1518명)와 벨기에(1381명), 스웨덴(1203명), 아일랜드(529명) 등이 뒤를 이었다.

지지부진한 브렉시트 협상에 대한 기업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메이 총리는 지난달 9일 ‘백스톱(Backstop)’안을 EU에 제안했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간 국경 강화(hard border)를 막기 위해 브렉시트 전환기가 끝나는 2020년 12월 31일 이후에도 영국을 EU의 관세동맹 안에 두되 이 시한을 최대 1년, 즉 2021년 말로 정하는 것 등이 골자다.

메이 총리는 얼마 전 자신의 별장으로 장관들을 소집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브렉시트 백서 초안을 공개했다. 백서에는 이와 함께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EU 상품시장에 잔류하되 이동의 자유는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에 대해 EU 주요국 매체들은 “영국이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계속 가지고 있길 원한다”며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비난하고 있어 향후 협상 진행 과정이 순탄하지 않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