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왼쪽) 경제부총리가 8월 6일 경기도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찾아 이재용(왼쪽 두 번째) 삼성전자 부회장과 함께 반도체 생산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DB
김동연(왼쪽) 경제부총리가 8월 6일 경기도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찾아 이재용(왼쪽 두 번째) 삼성전자 부회장과 함께 반도체 생산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DB

한국 경제의 경고음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산업생산은 3개월 만에 다시 감소세로 전환했고, 설비투자는 18년 만에 4개월 연속 내림세를 이어가고 있다. 기업 투자가 하반기 이후 더 늘어나지 않을뿐더러 수출·고용은 물론 반도체 등 주력산업의 불확실성도 더 높아질 전망이어서 한국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가 대기업을 중심으로 대규모 투자 계획을 이끌고 있지만 하락세로 돌아선 경제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 7월 전산업생산지수는 전월 대비 0.7% 감소했다. 반도체가 전월 대비 11.2% 증가했지만 자동차(-7.3%)와 화학제품(-3.6%) 등 다른 주력 제조업종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전산업생산지수는 한국 경제 전체의 모든 산업을 대상으로 재화와 용역에 대한 생산활동 동향을 월별로 집계한 수치로, 3월 0.9% 감소 이후 증가했다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다.

기업 투자는 악화일로다. 지난 6월 설비투자지수는 5월보다 5.9% 떨어졌다. 문제는 지난 3월부터 계속 하락세라는 점이다. 설비투자지수가 4개월 연속 줄어들기는 2000년 9∼12월 이후 17년 6개월 만이다. 당시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설비투자 심리가 나빴다. 특히 경기를 이끌어온 반도체 분야마저 투자 감소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심상치 않다. 반도체 관련 특수산업용 기계 등 기계류 투자가 9.9% 줄어들면서 전체 투자 감소세를 이끌었다.

하반기 투자 전망 역시 어둡다. 정부는 올해 설비투자증가율을 지난해 12월 전망치(3.3%)보다 크게 낮은 1.5%로 보고 있다. 1%대의 설비투자증가율은 투자를 거의 안 한다는 얘기다. 산업 현장에서 ‘투자 쇼크’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간 연구소도 올 하반기 기업 투자가 상반기에 비해 큰 폭으로 하락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수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지금 상황은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안 좋다”며 “정유·석유화학 부문을 제외한 건설·자동차·운송·금융 등 대부분의 부문에서 투자가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기업들이 움츠린 배경에 대해선 정부와 민간 전문가들의 견해가 엇갈린다. 정부는 투자 감소 배경에 대해 “2016년 4분기부터 진행된 주요 반도체 설비 증설이 올 1분기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고, 자동차는 수출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소득주도성장의 후유증이라고 본다. 최근 곳곳에서 정부 정책이 기업의 투자 의지를 꺾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정부의 대기업 지배구조 문제 개입,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 법인세 인상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다. 기업이 미래 먹거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대기업에 ‘SOS 신호’를 보내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대기업 총수와 잇따라 회동했다. 짧은 시간에 경기 부양 효과가 큰 지출을 위한 수단이 대기업의 설비투자 확대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재계 관계자는 “대기업의 투자와 고용 없이 한국 경제가 제대로 유지되기 어렵다는 현실을 청와대와 정부 당국이 감안한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

김 부총리와의 회동 후 각 기업은 대규모 투자, 채용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LG그룹은 19조원 투자 1만명 고용, 현대자동차그룹 5년간 23조원 투자 4만5000명 고용, SK그룹 3년간 80조원 투자 2만8000명 고용, 신세계그룹 3년간 9조원 투자 3만명 이상 고용 등의 보따리를 풀었다. 삼성그룹도 김 부총리가 삼성전자를 방문한 지 사흘 후 ‘3년간 180조원 투자 4만명 고용’ 등 단일 그룹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의 투자·고용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업계는 양보다 질을 따진다. 정부 당국의 무리한 압박, 반기업 정서 기반 법안, 포퓰리즘 정책 등으로 사실상 기업 환경을 나쁘게 몰아간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인해 기업이 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높아져 설비투자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며 “기업들이 경영 환경이 나쁜데도 투자에 억지로 나서게 되면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확한 현실 진단 선행돼야

대기업이 투자를 늘리면 고용이 증가하고, 이것이 경제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대기업들의 투자 계획 발표가 정부의 ‘기업 팔 비틀기’라는 논란이 있고, 투자를 실행하는 기업 입장에서 아직도 걸림돌이 많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기획재정부 등 정부부처가 의견 차이를 보이는 등의 정책 불확실성도 기업이 투자를 꺼리게 하는 요인이다.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위해선 규제 혁파가 관건으로 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 경제전망실장은 “중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정부가 현장의 애로사항을 자주 듣고 소통해야 경제도 활력이 돈다”며 “혁신 성장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규제를 과감히 철폐해야 기업이 투자할 환경이 조성된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장기침체 국면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미 ‘L’자형 장기 침체 초입에 진입했다는 진단도 나온다. 국내 경기가 지난해 하반기를 정점으로 꺾여 하강국면에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정부는 한국 경제가 아직도 ‘성장 중’이라고 판단한다. 이 때문에 우리 경제의 위기가 통계수치에 따른 위기가 아니라 정부의 경제상황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이에 따른 시스템의 위기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성태윤 교수는 “정부가 경기 침체를 인정하고 이를 막을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한국 경제가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장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Plus Point

무역전쟁 리스크에 美 기업도 투자 ‘제동’

중국 등 교역 상대국과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마찰이 점차 격화되면서 미국 기업들이 투자 계획을 철회하고 있다. 수입 관세를 부과해 부족한 세수를 채우는 한편 미국 제조업과 일자리를 보호한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계산과 전혀 상반되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미국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업 가운데 무역전쟁 리스크를 이유로 올해 자본 투자 계획을 재검토·철회·보류를 결정한 곳이 20%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주의 정책의 핵심 타깃인 제조업체 가운데 30%가 기존의 투자 계획에 일단 브레이크를 걸었다. 전면전으로 치달은 무역분쟁이 아직 미국 기업과 실물경기에 미친 충격이 제한적이지만 앞으로 상황이 크게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닉 블룸 스탠퍼드대 교수와 스티븐 데이비스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보고서를 통해 “기업들이 일제히 투자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고, 계획을 연기하거나 철회하는 기업도 상당수”라며 “이번 조사가 중국과 관세 전면전이 시작된 시점에 이뤄진 만큼 앞으로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경제는 지난 2분기 4.1%에 달하는 성장률을 달성했다. 하지만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한 미국 기업의 투자 저하는 고용과 가계 지출 등 경제 전반에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