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월스트리트(월가)는 주식시장뿐 아니라 고용의 본질, 나아가 가치 있는 근로자란 어떤 사람인지까지 재정의하고 있다.”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중에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글로벌 비즈니스 칼럼니스트이자 부주필이고, CNN의 글로벌 경제 애널리스트로 활약하는 라나 포루하(Rana Foroohar)가 기업의 금융화가 어떻게 세계 경제를 망가뜨렸는지에 대해 532쪽(한국어판)에 걸쳐 통렬하게 고발했다.

그의 저서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를 읽다 보면 우리가 경제의 표본으로 삼았던 미국 경제에 대한 환상이 가차 없이 깨진다. 한국어판 책의 부제는 ‘경제를 성장시키는 자, 경제를 망가뜨리는 자’이고, 원서의 부제는 ‘금융의 부상과 미국 비즈니스의 몰락’이다.

폭로는 ‘2013년 봄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팀 쿡은 왜 170억달러를 빌렸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자사주 매입과 배당금 지급으로 투자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식의 흥청망청 돈놀이에 뛰어든 기업이 비단 애플만은 아니다. 포루하는 “지금 미국 기업은 전체가 은행업으로 업종을 바꾸는 분위기이며, 이런 이유로 2009년 이래 진행 중인 경제 ‘회복’은 사실상 엉터리”라고 전한다.

시니컬한 내부자적 식견과 탄탄한 팩트로 무장한 우리 시대 최고의 경제 평론가 라나 포루하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작년 6월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 기술위원회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팀 쿡 애플 CEO. 사진 블룸버그
작년 6월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 기술위원회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팀 쿡 애플 CEO. 사진 블룸버그

책에서 ‘만드는 자(실물경제 생산자)’와 ‘거저 먹는 자’를 대비시켰다. ‘거저 먹는 자’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고장 난 금융시장 시스템을 이용해 자기 배만 불리는 이들 모두다. 다수의 금융업자와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당장의 이익 실현에만 몰두하는 CEO, 정치인, 규제 담당자까지 포함된다.”

금융화란 무엇인가.
“금융업의 사고방식이 기업과 경제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게 된 현상이다. 예전엔 미국 기업의 부(富)가 커지면 평균적인 미국인들의 주머니도 두둑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월가 때문에 그 관계가 깨졌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금융은 경제 성장을 돕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현재 애플을 비롯한 첨단 기술기업들은 회사채 발행에 열을 올리고 있다. 투자은행(IB)과 다를 바 없다. 화이자·마이크로소프트(MS) 등 수많은 대기업들은 금융 거래, 조세 회피, 금융 서비스 판매 등 그저 돈을 이리저리 굴리는 방법만으로도 엄청난 돈을 벌고 있다.”

금융의 부정적인 부분만을 너무 강조하는 것 아닌가.
“금융업은 미국 전체 기업 수익 중 25%를 차지하지만 일자리는 단 4%만 창출한다. 시장에 있는 자금 중 15%만 실물경제에 투입된다. 수많은 기업들이 실제 경제 활동보다 대차대조표 꾸미기, 일자리 창출보다 단기 수익 추구를 더 선호하기에 이르렀다. 근거가 더 필요한가?”

애플에 대한 공격으로 ‘금융화’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애플만 봐도 미국 초대형 기업들이 얼마나 고객의 필요나 욕구와 분리돼 있는지 알 수 있다. 생전의 잡스는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제품을 만드는 데 전념했다. 그렇게 하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반면 팀 쿡은 돈을 정교하게 굴리는 수법에 더 관심이 많다. 팀 쿡이 은행에 1450억달러의 현금을 쌓아두고도 170억달러를 빌린 이유가 뭘까? 신규 제품 개발에 투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사주 매입과 배당금 지급으로 투자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덕에 애플의 주가는 치솟았고 쿡을 포함한 주주들은 수억달러의 자본 수익을 챙겼다.”

금융화는 너무 오래 지속돼 자사주 매입과 배당 강화는 업계의 상식처럼 여겨질 정도다. 이제 와서 이 문제를 강하게 지적하는 이유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수조달러의 경기 부양책을 실시했지만 미국 경제의 회복이 더디기 때문이다. 임금은 일반적인 수준보다 느리게 증가하고 있지만 자사주 매입은 기록적 수준으로 진행되면서 자산 가격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시키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금융이 떠받치는 가상의 성장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진짜 성장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결국에는 정치가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들은 금융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할지를 결정한다. 현행 세법은 ‘거저 먹는 자’들에게 유리하게끔 설계돼 있다. 노동자의 근로소득보다 부유층 투자자의 자본소득에 더 낮은 세율이 적용된다. 금권(金權)정치와 금융회사의 로비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금융 시스템을 고칠 수 없다.”

실물경제와 금융, 만드는 자(maker)와 거저 먹는 자(taker) 간 힘의 차이를 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사진 교보문고
실물경제와 금융, 만드는 자(maker)와 거저 먹는 자(taker) 간 힘의 차이를 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사진 교보문고

포루하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정치권이 약속한 금융개혁안 중 상당수가 아직도 법제화되지 못한 이유를 정치권과 금융권의 뿌리 깊은 유착 관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경제의 금융화는 1980년대에 이르러 자유방임 정책을 시행한 공화당 소속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갖가지 탈(脫)규제에 힘입어 가속화됐다.

세제 개혁으로 자본이득세율이 대폭 낮아졌고, 이전엔 증시 조작으로 간주했던 대규모 자사주 매입이 합법화됐다.

그런가 하면 기업 인수·합병(M&A)에 관한 규제가 완화돼 초거대 기업이 금융 기법으로 큰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민주당 정권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1990년대에 빌 클린턴 행정부는 대기업에 유리한 각종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파생상품 규제를 철폐했다.

트럼프는 철저히 월가의 사람이면서도 노동자의 표를 얻었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사람들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투표한다. 가짜 뉴스가 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미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제 온라인 플랫폼에서 뉴스를 본다. 현재의 미국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다. ‘인식’이다.”

러스트벨트의 쇠락을 촉진하고 파생상품을 허용해 금융위기를 초래한 것은 클린턴 행정부다.
“핵심은 영리한 트럼프가 이 모든 것을 이용해서 자신이 지난 40년간 미국 경제 금융화의 핵심적인 수혜자라는 사실을 얼렁뚱땅 넘겼다는 사실이다. 그는 갖가지 거짓말로 미국인들을 구워삶았다. 다만 그는 한 가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경제 회복이 사상누각이라는 것이다. 당선되기 몇 달 전 트럼프는 ‘저금리’에 힘입어 형성된 시장의 거대 버블이 터질 경우 초대형 침체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미국 기업의 부채 규모와 레버리지는 기록적인 수준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경제를 회복시킬 능력이 없다고 보는가.
“그는 오로지 자기를 위해 돈을 버는 데 능한 브랜딩 전문가다. 철저히 월가 사람이다. 트럼프가 상위 1%와 나머지 99% 사이의 격차를 잘 아는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 그 격차를 넓히는 데 일조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 사모펀드의 부동산 장악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언젠가 워런 버핏이 내게 ‘주택 문제 해결은 미국 경제를 바로잡기 위한 선결 조건’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내 집 마련의 꿈’은 사람들 마음 깊숙이 자리해 있다. 중산층의 첫 번째 자산은 주식이나 예금이 아니라 주택이다. 하지만 사모펀드 투자자들이 주택 시장을 장악하면서 주택 가격이 뛰고 그들이 마을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상황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이미 마련된 규칙이 모든 시장 참가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사모펀드 회사인 블랙스톤이 미국에서 단독주택을 가장 많이 보유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대형 금융회사와 개인이 할 수 없는 거래를 블랙스톤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엔 실리콘밸리조차 금융화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안타깝지만 그렇다. 기술 혁명을 주도한 실리콘밸리의 거물들조차 금융가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배타적으로 변하고 있다. 스탠퍼드대 연구에 따르면 기술 기업들이 증시 상장을 완료하면 그 기업의 혁신성은 40%쯤 사그라든다. 혁신이 사라진 기업에 대중의 열광은 잦아들고 회사는 쪼개진 뒤 매각되는 일이 다반사다.”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사진 블룸버그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사진 블룸버그

금융위기 이후 소비자들의 상황은.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CEO도 2015년 나에게 미국 소비자들이 대단히 취약하다고 말했다. 변덕스러운 게 소비자들의 특징이 됐다는 거였다. 당연한 결과다. 임금이 이제서야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약간 웃도는 정도로 회복됐을 뿐이다. 여전히 젊은층과 취약계층의 실업률이 높다. 금융화에 따른 피해는 벌어들이는 돈 대부분이 자산 수익보다는 근로소득인 사람이 가장 많이 입는다.”

앞으로 세계 경제 전망은.
“금융화 추세가 정점을 찍으면 곧 꺾일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금리는 더욱 변덕스러워질 것이고, 결국에는 시장에서 급격하게 수정될 것이다.”

제품보다 금융 설계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고 평가한 애플의 미래는. 또 금융화에 몰두했다가 위기를 겪은 제너럴일렉트릭(GE)의 미래는.
“애플은 언젠가 자체 신용카드 또는 소비자 금융상품을 출시할 것으로 본다. GE는 미국의 위대한 혁신 기업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금융화 전략을 사용한 어두운 시기의 유산 때문에 회사가 쪼개질 것으로 예상한다.”

금융 버블에서 소외된 젊은층들이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들었다.
“개인적으로 중앙은행이 뒷받침하지 않는 통화엔 투자하지 않는다. 하지만 암호화폐의 등장은 금융화 사이클의 일부를 이루는 기존 금융회사가 신뢰를 잃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금융화에 병들지 않은 모범적인 국가 혹은 기업이 있나.
“캐나다 은행 시스템은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강력한 공공 부문과 감시 체제를 만든 싱가포르 모델도 참고할 만하다.”

금융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변해야 하나.
“먼저 복잡성을 없애고 레버리지를 줄여야 한다. ‘너무 커서 망하게 둘 수 없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론이 있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금융회사가 ‘너무 복잡해서 관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채는 줄이고 자기자본은 늘려야 한다. 기업의 부채뿐 아니라 자기자본 수익에 대해서도 세금 공제를 허용해 부채와 자기자본의 적절한 균형을 유도하는 시스템은 이미 유럽 여러 나라에서 시행 중이다. 기업의 목적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만드는 자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업을 희생해서 금융을 키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여러분이 확실히 깨닫기를 바란다.”


▒ 라나 포루하
파이낸셜타임스 부주필, CNN 글로벌 경제 애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