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는 미국의 비메모리 반도체 기업 인수에 나서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일본의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는 미국의 비메모리 반도체 기업 인수에 나서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9월 3일(현지시각) 일본의 반도체 업체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가 미국의 인티그레이티드 디바이스테크놀로지(IDT)와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인수 금액은 7330억엔(약 7조3300억원). 세계 통신용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업인 IDT 인수로 르네사스는 한국에 내준 메모리 반도체 시장 대신 비(非)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노리게 됐다.

일본 기업의 미국 기업 인수·합병(M&A)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통상 갈등 심화로 중국 기업의 미 현지 투자가 주춤한 사이 일본 기업이 그 틈새를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M&A 컨설팅 회사 레코후(レコフ)에 따르면 올해 1~9월 일본 기업의 미국 기업 M&A 건수는 177건, 규모는 4조7000억엔(약 47조원)을 기록했다. 이는 일본 기업들의 미국 M&A 시장 붐이 일었던 1990년 기록(178건)과 비슷한 수준이다. 남은 하반기에 한 건만 추가돼도 건수 기준 사상 최대치 기록을 뛰어넘을 수 있다.

일본 기업의 미국 기업 사냥은 반도체 산업뿐 아니라 금융, IT, 서비스 등 산업 전반에 걸쳐 이뤄지고 있다. 지난 7월 종합금융회사 오릭스(オリックス)는 미국의 중소 전문 대출회사 NXT캐피털을 1000억엔에 인수했다. 올 초엔 건축·화학 업체 아사히카세이(旭化成)가 11억달러에 차량 내장재 회사 세이지오토모티브를 사들였고, 5월엔 리크루트홀딩스가 미국 구직 사이트 글래스도어를 12억달러에 인수했다.

이렇게 일본 기업이 미국 기업과 짝짓기에 활발하게 나서게 된 배경에는 미·중 무역전쟁 격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양국 분쟁으로 그간 활발하게 미국 기업에 투자하던 중국의 움직임이 주춤해진 탓이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외국인미국투자심의위원회(CFIUS)’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중국 기업을 견제하고 있다. 지난 3월 브로드컴의 미국 퀄컴 인수, 1월 알리바바 자회사 앤트파이낸셜의 미국 머니그램 인수 무산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과 중국 양국 간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오는 9월 24일부터 각각 2000억달러, 600억달러어치 수입품에 10% 추가 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것이다. 외국인 투자제한법(FIRRMA) 강화 기조에 따라 CFIUS 권한이 확대될 가능성도 크다.

이에 따라 중국 기업들의 역외 M&A 활동은 눈에 띄게 활기를 잃었다. 관영 영문 매체 ‘차이나데일리’에 따르면 상반기(1~6월) 중국 기업의 해외 M&A 규모는 412억달러로 전년 같은 기간(663억달러)보다 38% 감소했다. 직전 최대치(2016년 상반기 1412억달러)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기업은 전문가들의 조언을 등에 업고 중국의 빈자리에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은행과 로펌 등 M&A 주간사들도 지금 공략하라고 일본 기업에 조언한다”며 “미국 정부도 일본 기업을 안전한 인수자로 인식하고 있다”고 전했다. 케네스 르브론 셔먼앤드스털링 M&A 전문 변호사는 “산업 인수전 대부분에서 일본이 중국을 앞서는 유리한 상황”이라며 “5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 기업이 경쟁사 대비 30% 이상 가격을 높여 써냈던 때와는 비교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기업 실적 개선으로 ‘실탄’확보

‘주식회사 일본’의 부활도 일본 기업이 미국을 비롯한 외국 기업 인수전에 집중하게 된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고령화와 이에 따른 인구 감소로 내수 시장 확대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기업의 실적 개선이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된 것이다.

실제로 르네사스는 2017 회계연도 매출 7803억엔, 영업이익 784억엔을 기록하며 전년보다 크게 개선된 실적을 내놨다. 또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2017 회계연도 산업계(금융·보험 제외) 전체의 이익 잉여금이 전년보다 9.9% 증가한 446조엔(약 4460조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해외 기업 사냥에 나설 수 있는 ‘실탄’을 확보한 것이다. 기타가와 데쓰오(北川 哲雄) 아오야마학원대 교수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인구 감소와 시장 성숙으로 내수 시장에서 활로를 찾지 못한 일본 기업이 M&A로 해외 시장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M&A 시장에서 일본 기업의 활약은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레코후의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는 672건을 기록했다. 2010년 371건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올 들어서도 6월 기준 누적 인수 건수가 340건, 인수 금액 1122억달러(약 127조원)를 기록했다. 사상 처음 1000억달러를 넘어선 것이다.

지난 5월 일본 제약사 다케다(武田)약품공업은 아일랜드의 다국적 제약사 샤이어를 615억달러에 인수하면서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일본 기업의 해외 M&A 역사상 최대 규모 거래였기 때문이다. 전기자동차나 로봇에 쓰이는 모터를 생산하는 일본전산(日本電産)은 내년 초까지 독일 로봇 관련 기업 5개를 연쇄 인수하기로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글로벌 M&A 시장에서 일본 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2000년대 초반 3~5%에서 2011년 이후 10% 이상으로 높아진 데 이어 올해는 30%에 육박했다”고 전했다.


Plus Point

르네사스, 자율주행차 타깃

이번에 IDT를 인수한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가 지난 2016년에는 미국의 시스템 반도체 기업 ‘인터실’을 32억달러에 사들였다. IDT에 이은 르네사스의 다음 타깃으로는 미국의 또 다른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맥심인티그리티드’가 거론되고 있다.

르네사스가 인수하는 회사들의 공통점은 자율주행용 반도체나 사물인터넷용,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등 잠재력이 큰 기술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IDT도 차량용 반도체 설계 분야로 기술력을 넓히고 있다.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쥘 핵심 기술인 자율주행차 분야에서 르네사스가 한발 앞서나가고 있는 것이다. IHS마킷은 2022년 자동차용 반도체 시장이 자율주행차 시대를 맞아 576억달러까지 51%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인수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 쇠퇴하던 일본 반도체 업계가 부활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한다. 앞서 손정의 사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 그룹도 미국 엔디비아(자율주행)와 영국 ARM홀딩스(반도체 설계)를 인수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