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7일 미국 워싱턴DC 상원 소비자보호 소위원회 청문회에 제너럴모터스(GM) 메리 바라 회장 (가운데) 당시 최고경영자(CEO)가 참석했다. GM은 이듬해 늑장 리콜로 9억달러의 벌금을 받았다. 사진 블룸버그
2014년 7월 17일 미국 워싱턴DC 상원 소비자보호 소위원회 청문회에 제너럴모터스(GM) 메리 바라 회장 (가운데) 당시 최고경영자(CEO)가 참석했다. GM은 이듬해 늑장 리콜로 9억달러의 벌금을 받았다. 사진 블룸버그

주행 중 불이 나는 BMW 차량 소유자에 대한 운행정지 명령이 내려졌다. 리콜(결함시정) 조치를 발표한 지 열아흐레 만이다.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운행을 못 하게 된 차는 리콜 대상 42개 차종, 10만6000대 가운데 안전진단을 받지 않은 1만 대가량이다. 정부가 사상 초유의 결정을 내린 것은 리콜 결정 이후에도 사고 원인에 대한 논란이 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의혹을 해소해야 할 국토부는 적극적인 원인 조사는 미룬 채 제작사의 답변만 기다리는 무기력한 모습만 보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자동차 업체들이 국내 소비자를 얕잡아 본다는 말이 나왔다.

자동차 업체들이 한국을 무시하는 이유는 한국의 차량 결함 조사 체계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자동차 결함을 주도적으로 조사·감독하는 컨트롤타워가 없다. 국토부에 감시·감독 의무가 있지만 이번 사태에서 보듯이 국토부는 제작사로부터 통보받고 발표하는 수동적 역할에 그친다. 배기가스 문제는 환경부가, 자동차 산업 관련 문제는 산업자원부가 관여돼 있다 보니 부처 간 눈치 보기와 밥그릇 싸움이 적지 않다.

미국에서는 교통부 직속 도로교통안전청(NHTSA)이 모든 권한을 갖고 자동차의 결함 가능성을 조사하고 감독한다. NHTSA는 자동차 관련 엔지니어를 포함,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이다. 민간 부문에서는 보험사들이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 출자해 만든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 자동차기술협회인 미국 자동차 안전센터(CAS), 소비자 감시단체 컨슈머 워치독(consumer watchdog) 등이 이중삼중으로 감시한다.

한국은 국토부가 조사·감독 권한을 갖고 있고, 한국교통안전공단 산하 자동차안전연구원이 결함 조사 실무를 담당한다. 미국으로 치면 자동차안전연구원이 NHTSA와 같은 역할을 하지만 연구원에 단독 조사 권한이 없는 것이 다르다. 권한이 있는 국토부 쪽에는 전문지식을 가진 이들이 거의 없고 또 조사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갖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이유로든 승인을 거절하면 조사는 진행되지 못한다. 더욱이 결함 조사를 하더라도 리콜에 대한 최종 결정은 국토부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자동차 제작결함심사평가위원회가 내린다.

자동차 사고율을 낮춰 보험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는 보험개발원도 사고 조사에 소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보험개발원 관계자는 “보험사가 제작사와 차량 결함 관련 법정 공방을 벌일 때 원인 규명 보고서를 첨부하긴 하지만, (보험사가) 승소한 일은 거의 없다”며 얼버무렸다. 소비자 피해 접수와 구제를 담당하는 한국소비자원의 업무 가운데 자동차 결함 조사가 포함돼 있지만, 순환보직제에 따른 기술 전문가 부족과 정부 부처의 견제로 현재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NHTSA의 권위는 방대한 데이터, 전문가 협업, 강한 처벌 규정이 뒷받침한다. NHTSA는 주정부 경찰과 연계해 교통사고 현장 자료를 받아 수집·관리·분석하는 통계분석센터(NCSA)를 두고 있다. NCSA는 고속도로 안전 영역 데이터를 축적하고 충돌 사고 현장에서 견인한 자동차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내외부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이 분석한다.


미국은 데이터 법률 자문도 완비

기술 전문 변호사를 10명 가량 갖춘 법률자문기구(NCC)는 차량결함조사국(ODI)이 업체와 법적 다툼을 벌일 때 변호는 물론, 조사관과 함께 조사에도 직접 참여한다. 차량 결함을 야기한 제작사의 처벌 근거를 제시하고, 제작사가 결함 여부를 적시에 통지했는지도 평가한다. 제작사가 영업비밀을 이유로 정보 공개를 거부할 때 이를 반박하는 법리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미국은 나아가 소비자 권익을 우선으로 한 강한 민형사상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2015년 미국 GM은 늑장 리콜을 이유로 법무부로부터 9억달러(약 1조100억원)의 벌금을 맞고 관계자는 무더기 입건됐다. 지난해 에어백 리콜 파문을 일으킨 일본 업체 다카타는 올해 2월 집단소송에서 6억5000만달러(약 7340억원)를 지불키로 합의했다. 이 밖에 NHTSA는 안전기준을 위반한 업체에 대해 최대 1500만달러(약 170억원)의 벌금을 별도로 부과할 수 있다.

한국의 상황은 초라하다. 법에서 업체가 결함을 의도적으로 은폐·축소하거나 리콜을 미루면 10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을 물린다. 2016년 과징금 규정이 신설됐지만 이는 2016년 이후 인증 차량 및 부품만 해당된다. 이번 BMW 화재 사고 차량은 해당되지 않는다. 김종훈 한국자동차품질연합 대표는 “한국에서 리콜은 잘못을 저지른 제작사를 처벌하는 제도가 아니라 제작사 손해를 줄이기 위한 제도로 변질됐다”고 했다.

정부 부처 내 친(親)기업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폐쇄적인 구조도 문제다. 리콜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국토부의 자동차제작결함심사평가위원회는 회의 안건을 비롯해 위원 명단까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공익을 위해 현대자동차 결함을 제보하려다 해고당한 김광호 전 현대차 부장은 “자동차 업계를 대변하는 전문가들이 대학 교수 등의 직함으로 위원회에 포진해 있다”며 “공무원이라도 이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부처는 물론 부서 간 협업도 잘되지 않는다. 한국은 교통사고가 나면 소방청·경찰청이 1차 현장 조사를 한다. 자동차안전연구원 조사팀은 경찰청으로부터 자료를 받지 못한다. 연구원 차량 결함 조사관 13명 가운데 현장 담당자는 없다. 자동차안전연구원 출신인 박진혁 서정대 자동차과 교수는 “경찰 자료는 고사하고 연구원 내에 있는 자동차리콜센터 자료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디젤 분야 권위자인 전광민 연세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한국은 자동차 결함과 관련한 독립적 의사 결정 기관이 없기 때문에 지금 같은 급박한 사건에 빠르게 대응하기 힘들다”면서 “단계별로 이어지는 옥상옥 시스템을 해체하고 창구를 단일화해 검사와 판단 시간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감시·감독 체계에) 구조적 개선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자동차 기술은 물론 법적인 구조를 잘 아는 전문가를 영입하고, 처벌 조항도 신설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