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생활 체육 종목인 배드민턴. 사진 연합뉴스
인기 생활 체육 종목인 배드민턴. 사진 연합뉴스

8월 초 직장 동료들과 배드민턴 동아리를 결성한 회사원 이성민(31·서울 마포구)씨는 운동할 장소를 알아보다 좌절했다. 이씨는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실내 체육 시설을 찾던 중 주변 학교의 체육관을 사용할 수 있을지 수소문했다. 그러나 이내 ‘그냥 운동을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는 서울시교육청의 ‘학교시설 유·무선 예약시스템’을 활용해 가까운 학교 체육관의 예약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학교는 연말까지 ‘예약 불가’였다. 홈페이지를 더 뒤져보니 그 지역구 학교들의 체육관은 전부 연말까지 ‘예약 불가’로 표시돼 있었다. 이씨는 “쓸 수도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어쩌라는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2016년 서울시의회가 학교운동장과 체육관 등을 지역주민에게 의무개방하도록 조례를 통과시켰지만 여전히 교문은 굳게 닫혀있다. 지역 주민이 일상 생활에서 손쉽게 접근 가능한 가까운 자유 체육 시설을 찾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재정부는 지난 8월 27일 ‘지역밀착형 사회간접자본(SOC)’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생활 체육 등 여가 활동에 대해 내년에 1조1000억원 규모의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현재 20개 수준인 국민체육센터를 160개로 늘리고, 근린형 소규모 체육관 100개를 새로 짓겠다는 방침까지 포함돼 있다. 하지만 학교 개방 등 기존 공공시설 활용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런 새로운 정책에 국민의 혈세를 마구 투입하는 것보다 기존에 있는 시설부터 시민들이 좀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먼저라는 지적이 나온다.

8월 29일 서울시교육청의 온라인 학교시설 예약시스템에서 마포구, 서대문구, 영등포구, 강남구, 서초구 등지 소재의 학교들 50여곳의 시설물 예약 상태를 확인해봤다. 예약시스템의 홈페이지 구성은 달력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마치 ‘예약 가능’한 날짜를 고를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날 확인한 학교들은 대부분 체육관 시설에 대해 ‘평일, 토요일, 일요일 모두 개방시간 없음’이라고 못 박아 두고 있었다. 이용 가능 시간을 표시해놓은 마포구의 ‘ㄱ초등학교’도 온라인으로 예약 가능 여부를 확인해본 결과, 올해 말까지 ‘사용 불가’ 상태였다. 이 학교 행정실 관계자는 전화 통화에서 “연간 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이미 예약이 끝났다. 올해 안에는 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시스템 외에 전화·방문 접수로 신청받는 학교들도 있어 예약시스템에 ‘예약 불가’로 뜨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온라인에 반영해 달라고 각 학교에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면서 “일부 학교들의 경우 체육관 건물이 학교 교육동과 통합돼 있는 곳도 많아 교장이 심의를 거쳐 주민에게 개방하지 않겠다고 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해당 지역 체육협회 소속 비영리 주민 체육 단체, 동호회들이 학교 측과 장기 계약을 맺어 일괄 선점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김혁출 국민생활체육회 전략기획실장은 “학교 측에서 관리하기 편하니 1개 동호회에 독점권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어, 다른 동호회에서 사용하기 어렵고 특히 일반인의 이용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처럼 장기 계약을 맺은 특정인(브로커) 가운데 학교시설을 독점하고 다시 대관 수요자들을 대상으로 ‘재대관’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같은 회사 동료들과 농구를 하는 것이 취미인 직장인 박재동(30)씨는 항상 온라인 농구 동호인 커뮤니티를 통해 학교 체육관을 대관해 운동을 한다. 그는 “동일한 아이디의 회원이 한 학교의 체육관 대관을 양도하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면서 “주말과 같이 수요가 많은 시간에 항상 같은 사람이 그 학교를 빌리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학교 체육관(강당)의 대관료는 1시간에 1만5000~2만5000원 선이어야 한다. 하지만 온라인 생활체육 커뮤니티에서는 개인 회원이 시간당 2만~5만원에 학교 체육관 대관 모집글을 올려 놓고 있었다. 차액에 대한 부당 이득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올해만 90억원의 정부 예산이 투입된 학교 시설 개방이 실효성이 있느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 국민 가운데 생활 체육을 주 1회 이상 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59%에 불과하다. 전년도(60%)에 비해 오히려 줄었다. 지난 2010년 기준으로 보면 일본(75%), 호주(82%), 핀란드(93%) 등에 비해 현저히 낮다.


국내 체육시설의 3분의1은 학교에

전문가들에 따르면 국민들이 일상에서 손쉽게 체육 시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갖추기만 해도 의료비 등 각종 비용 절감 효과를 낼 수 있다. 임번장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명예교수에 따르면 국내 전체 체육 시설 가운데 학교체육시설의 비율은 28%로 3분의 1 수준이다.

학교는 대부분 아파트 등 주택가에 위치해 인근 주민들이 활용하기에도 편리하다. 배두열 대구과학대학 경찰경호행정학과 교수는 “학교 체육관이 개방되면 날씨 영향을 받지 않고 실내 체육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면서 “그간 체육공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종목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남기연 단국대 법학과 교수는 “학교시설을 공공체육시설로 보는 상황에서 주민들이 학교시설을 이용하는 것은 학교 측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 사안이 아닌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국민의 권리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러나 학부모들의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지역 주민들이 체육관을 빌렸다가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하면 학교의 본래 목적인 ‘교육’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학부모들은 체육관 이용자들이 혹시나 학생들과 교사들이 있는 교사동까지 넘어가게 되면 안전사고 등이 발생해 위험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기도 한다”면서 “시설개방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학교에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체육관을 개방했더니 담배꽁초나 소주병을 그대로 버리고 갔다는 사례도 종종 언급된다. 배드민턴 동호회에서 2년째 활동 중인 이정훈(30)씨는 “학교 체육 시설을 개방할 때 관리하는 사람 한명씩만 학교에 있어도 이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라면서 “각 학교 행정실에서는 체육관 대관이 주요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 전문 체육 행정 관련 담당자가 있다면 대관을 원하는 생활 체육인들과 학생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초 대한체육회는 이 같은 취지로 학교체육시설 개방 관리매니저 교육을 실시했으나, 그 규모는 200명으로 아직 작다.

남 교수는 “학교체육시설은 최근 급격히 증가하는 체육시설의 수요에 대해 가장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이라면서 “이를 개방하게 되면 공공체육시설을 새로 건립하기 위해 요구되는 부지확보와 재정적 부담을 덜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생활체육 참여율이 93%에 달하는 핀란드는 지역 주민들이 스포츠 활동을 위해 학교 시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나라다. 도시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편인데, 특히 아동 스포츠클럽은 학교 시설을 무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학교시설 이용을 희망하는 사람은 신청서를 작성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