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왼쪽부터 1970년 1월 LG그룹 회장 취임식 당시, 1995년 2월 그룹 총수로서 마지막 행사인 ‘경영이념선포 5주년 행사’를 주관하던 모습, 1990년대 후반 은퇴 후 버섯 연구에 몰두하던 모습. 사진 LG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왼쪽부터 1970년 1월 LG그룹 회장 취임식 당시, 1995년 2월 그룹 총수로서 마지막 행사인 ‘경영이념선포 5주년 행사’를 주관하던 모습, 1990년대 후반 은퇴 후 버섯 연구에 몰두하던 모습. 사진 LG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2월 14일 향년 94세로 타계했다. 그는 1970년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 2대 회장에 취임해 LG를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 도약’을 강조하며 산업 불모지였던 한국이 화학과 전자 분야에서 기술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공헌을 했다. 1995년에는 장남인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자연인으로 돌아가 24년간 분재와 버섯 연구 등에 정성을 기울였다.


동동구리무부터 시작된 ‘기술대국’ 일념

1925년 4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구 명예회장은 구인회 LG 창업회장의 장남으로, 창업 초기부터 LG를 일궈온 1.5세대 경영인이다.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리며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0년 부친의 부름을 받아 25세의 나이로 락희화학(현 LG화학) 화장품연구소에 입사했다.

직함은 ‘이사’였지만 허름한 야전점퍼를 입고 공장 직원들과 동고동락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현장 근로자였다.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국내 최초 화장품인 ‘동동구리무’를 만들었고, 제품 포장과 판매까지 도맡았다. “장남인데 너무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만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은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무수한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LG는 부산 부전동공장·연지공장·동래공장 등 생산시설을 확장하며 화장품, 플라스틱 가공, 전자 산업에 이르기까지 사업 영역을 넓혀나갔다. 어떤 공장이든 당시 현장을 누비던 구 명예회장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느 상자에 어느 공구가 들었는지도 훤히 꿰고 있을 정도였다.

구 명예회장은 1970년 1월 9일 LG그룹의 2대 회장에 취임해 오랜 기간 현장에서 쌓은 역량과 자신감을 십분 발휘했다. 그가 회장으로 재임한 기간 LG의 매출은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성장했고, 직원 수도 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늘었다.

그는 “우리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며 연구·개발에 승부를 걸고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럭키 울산공장과 여천공장의 경우 공장이 채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이 먼저 문을 열었다. 1976년에는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렇게 축적한 기술력으로 LG는 끊임없이 신제품을 개발하고 시장을 선도했다. 전자 분야에서는 1970년 ‘투 도어 냉장고’, 1974년 가스레인지, 1977년 19인치 컬러 TV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내 최초 제품이 쏟아졌고, 화학 분야에서는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ABS(아크릴로니트릴 부타디엔) 수지 등 다양한 신제품 개발로 기술 고도화를 이끌었다.


LG화학 부산 연지동 공장 앞에서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구인회 창업회장,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사진 LG / 구자경(오른쪽 세 번째) 명예회장이 미국 현지생산법인(GSAI)에서 생산된 제1호 컬러TV 제품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사진 LG / 1993년 9월 구자경(가운데) 명예회장이 공장자동화 현장을 시찰하는 모습. 사진 LG / 1999년 구자경(왼쪽) LG 명예회장과 구본무 전 LG 회장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 LG
1 LG화학 부산 연지동 공장 앞에서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구인회 창업회장,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사진 LG 
2 구자경(오른쪽 세 번째) 명예회장이 미국 현지생산법인(GSAI)에서 생산된 제1호 컬러TV 제품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사진 LG 
3 1993년 9월 구자경(가운데) 명예회장이 공장자동화 현장을 시찰하는 모습. 사진 LG 
4 1999년 구자경(왼쪽) LG 명예회장과 구본무 전 LG 회장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 LG

고객과 인재에 미친 영감

구 명예회장이 특히 강조한 것은 ‘고객’과 ‘인재’였다. 그는 “고객의 입장에서 듣고 생각하라. 이것이 혁신이다”라며 매년 4월을 ‘고객의 달’로 선포하고, 자신도 금성사 서비스센터를 찾아 고객의 불편사항을 몸소 청취했다. 서류의 회장결재 칸 위에 ‘고객결재’ 칸을 만들고 회의실마다 ‘고객의 자리’를 마련해, 내부에서는 ‘고객에게 미친 영감’으로 낙인찍힐 정도였다.

그는 교사 시절에 지녔던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기술을 지닌 인재가 필요하다’는 소신을 경영에서 그대로 실천했다. 그룹에 ‘인재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1988년에는 LG의 종합 연수원인 인화원을 개원했다. 인재와 교육에 대한 구자경 회장의 관심은 LG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69년 진주시에 진주시립연암도서관을 기증하는 등 다양한 공익사업을 지속해서 펼쳤고, 1970년부터 30여 년 동안 대학생 2500여 명에게 등록금 전액과 교재비를 지원하는 장학사업도 진행했다.


무고 승계 후 영원한 자유인으로

구 명예회장은 70세가 되던 1995년 2월 장남 구본무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 선례를 남긴 것. 새로 취임한 구본무 회장과 젊은 경영진이 독자적으로 소신 있게 경영 활동을 펴도록 원로 회장단도 동반 은퇴했다.

은퇴 후 구 명예회장은 평소 갖고 있던 소박한 꿈이었던 분재와 난 가꾸기, 버섯 연구에 정성을 기울이며 회사 생활 50년 만에 맞은 자유인의 삶을 자연 속에서 충실히 누렸다.


plus point

구자경 명예회장의 어록

구자경 명예회장은 항상 혁신을 강조한 ‘혁신 전도사’였다. 다음은 구 명예회장의 어록.

“기술 우위를 통해서 앞서가는 제품을 만들어 내고, 품질에 대한 신뢰를 심어 나감으로써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기업 성장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기업 활동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하고 끝낼 일이 아니라면 역시 연구·개발을 바탕으로 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기업화하고, 그 제품들이 품질 면에서나 가격 면에서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노력을 집중해야 기업이 영속적으로 살아남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다.”
-1983년 전경련 최고경영자 특강

“생산 경제의 주체인 기업이 사회 속에서 그 역할을 다하는 길은 우선 기업 본래의 활동에 있어서 끊임없이 혁신함으로써 산업고도화를 이룩하는 것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 많은 사람의 복된 생활과 사회복지에 기여하는 것이다.”
-1984년 7월 그룹사보 ‘럭키금성’ 창간사

“기업은 인재의 힘으로 경쟁하고 인재와 함께 성장한다. 기업의 궁극적 목표인 인류의 번영과 복지도 인재의 빛나는 창의와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인재 육성은 기업의 기본 사명이자 전략이요, 사회적 책임이다.”
-1988년 인화원 개원식

“경영 혁신을 하면서 ‘여기까지가 끝이다’라고 하게 되면 그것이 곧 발전의 한계가 된다. 경영 혁신은 끊임없이 더 높은 목표를 지향해 추구해야 하는 ‘종착역 없는 여정’인 것이다.”
-1992년, 저서 ‘오직 이 길밖에 없다’

“교육과 연구로 지식과 기술의 수준을 높여가지 않으면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국토가 좁고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기댈 것은 오직 사람의 경쟁력뿐이다.”
-2010년 연암해외연구교수 증서 수여식

최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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