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터키중앙은행이 기습 금리인상을 단행했음에도 터키 리라화 환율이 상승, 심리적 지지선 달러당 5리라를 위협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23일 터키중앙은행이 기습 금리인상을 단행했음에도 터키 리라화 환율이 상승, 심리적 지지선 달러당 5리라를 위협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신흥국 위기설이 다시 힘을 받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2013년 테이퍼탠트럼(긴축발작)에 이어 세 번째 신흥국 위기가 올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반면, 이번 위기가 정치·재정적 문제가 있는 일부 국가에 한정될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머징마켓포트폴리오리서치(EPRF)에 따르면 5월 10~16일 신흥국 채권 시장에서는 총 13억달러, 우리돈 1조4000억원이 유출됐다. 4주 연속 순유출로 이 기간 신흥시장에서 빠져나간 돈만 53억달러에 이른다. 미국 금리 인상은 미 자산 가치 상승 기대감으로 이어진다. 이에 투자자들이 신흥시장에 묻어 뒀던 자금을 빼내면 경제가 타격을 입는다. 달러화 가치가 오르면서 자국 통화와 금융 자산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카르멘 라인하트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신흥국발(發) 세 번째 위기’를 경고했다. 라인하트 교수는 “신흥시장이 처한 전반적인 상황이 과거 금융위기 때보다 나쁘다”면서 “내외부에 균열이 많다”고 지적했다. 라인하트 교수는 미국의 금리 인상이 신흥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한다.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는 일부 신흥국은 달러화 가치 상승으로 부담이 커진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신흥국 외채 중 달러화가 전체의 3분의 2에 달하는 8조3000억달러(약 8947조원)다.

실제로 신흥국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아르헨티나의 페소화 가치는 이달 들어 17% 하락했고, 물가는 20% 넘게 상승했다. 통화 가치 하락을 방어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40%대까지 끌어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300억달러짜리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브라질 경제도 다시 침체기에 접어들 가능성이 점쳐진다. 브라질 중앙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97%에서 2.5%로 낮춰 잡았다.

터키와 인도네시아 외환시장도 불안하다. 22일 터키의 리라화 환율은 달러당 4.66리라를 기록,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 달 사이 환율이 15% 넘게 올랐다(리라화 가치 하락). 21일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환율도 달러당 1만4203루피아를 기록, 루피아화 가치가 31개월 이내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새로운 신흥시장으로 주목받았던 아프리카에서는 디폴트(채무불이행) 위험이 고개 들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채는 올 들어 처음 순 매도세로 돌아섰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18일 기준 남아공 국채는 4930억랜드(약 380억달러) 순 매도를 기록했다. 연초 4850억랜드 순 매수를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상황이 반전됐다. 남아공 국채는 다른 나라 국채보다 비교적 거래가 쉬워 신흥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지표로 활용된다. 과거 금융위기 때 아프리카 국가들이 중국으로부터 받았던 대규모 차관을 고려하면 실제 부채는 공식 통계치보다 20% 정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라인하트 교수는 “재정이 불투명한 아프리카의 저소득 신흥국은 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흥국 위기 파급력 크지 않다” 지적도

이 모든 위기설의 배경은 미국의 금리 인상이다. 금리 인상기를 맞아 달러화 가치가 오르면서 신흥국 통화가 약세를 보이는 것이다. 세계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21일 94.028을 기록, 올 들어 가장 높은 수준까지 상승했다. 강달러 현상이 계속되면 달러화로 표시된 빚 부담이 커진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모건스탠리캐피털이 발표하는 세계적인 주가지수인 MSCI 신흥국 지수에 포함된 845개 기업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12월 기준 100.6%를 기록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80.1%)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

또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는 부채 규모 상위 20개국의 부채 총합이 10년 전 5조달러에서 현재 19조달러로 약 4배 가까이 급증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세 번째 위기로까지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란 반론도 맞서고 있다. 터키 상황이 나빠진 것은 재정이 취약한 데다 정치적 신뢰 문제까지 불거진 탓이라는 것이다. 터키의 3월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전월(41억2500만달러)보다 증가한 48억1200만달러를 기록했고, 다음 달 대선을 앞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하겠다고 말하면서 투자자들의 신뢰를 깨뜨렸다. 아르헨티나도 자체 문제가 있다. 무디스는 “경제 상황이 취약한 상황에서 외환시장이 과민하게 반응했고, 가뭄에 따른 대두 수확량이 감소한 것도 사태를 키웠다”면서 “아르헨티나발 금융시장 혼란이 중남미 다른 국가로 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거론되는 나라들의 기초 체력(펀더멘털)이 개선됐다는 점도 지난 두 번의 위기 때와는 다른 점으로 꼽힌다. IMF에 따르면 브라질과 인도네시아의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2013년(748억달러·291억달러)보다 감소해 각각 97억달러, 172억달러를 기록했다. 브라질중앙은행에 따르면 브라질의 외환 보유액은 2008년 1957억달러에서 2008년 3653억달러(약 396조원)까지 증가했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이번 위기설은 미국 주택 시장 문제와 버냉키 쇼크에서 시작됐던 글로벌 금융위기, 테이퍼탠트럼 당시와는 다르다”면서 터키, 아르헨티나의 파급력이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Plus Point

신흥국 위기가 한국으로 전염될 가능성은?

신흥국 위기설이 나오면서 위기가 한국으로까지 전이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결론적으로는 ‘한국은 아직 안전지대’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한국이 위기론에서 한발 비껴 설 수 있는 것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외환 보유액이 한몫한다. 외환 보유액은 한 국가의 대외 지급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4월 말 기준 우리나라 외환 보유액은 약 3984억달러로 세계 9위 수준이다.

한국은 재정 건전성도 양호한 편이다. 경상수지가 흑자 기조를 지속하고 있고 재정수지도 GDP 대비 1% 이상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기업들의 부채 구조도 나쁘지 않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의 부채비율은 태국, 인도네시아와 함께 20년 전보다 떨어졌다. 같은 기간 브라질, 터키, 아르헨티나 등 위기설이 나오는 나라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오른 것과 비교된다. 한국은 현재 ‘외환 마이너스통장’으로 불리는 통화 스와프 계약도 6개국과 맺고 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만은 없다. IMF에 손을 벌린 아르헨티나도 최근까지 외환 보유고가 충분했지만 위기를 막지 못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IMF가 제시한 적정 외환 보유액(약 652억달러)과 맞먹는 수준의 자금 617억달러를 갖고 있었지만 고물가와 강달러 현상에 따른 페소화 가치 하락 탓에 자금 이탈 속도가 빨라졌다.

전문가들은 확실한 안전판으로 한·일, 한·미 통화 스와프 재연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유사시 국제적 협조를 통해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통화 스와프는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