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구호 연세대 행정학박사, 모스크바국립대 국가관리학 전공(법학 박사),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소장, 중소연구 편집인,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사업 유라시아 연구사업단장 / 사진 오종찬 기자
엄구호
연세대 행정학박사, 모스크바국립대 국가관리학 전공(법학 박사),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소장, 중소연구 편집인,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사업 유라시아 연구사업단장 / 사진 오종찬 기자

“북·러 정상회담 직후 열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보니, 러시아의 기본 입장이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유지’라는 미국의 입장과 다르지 않더군요.”

엄구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러시아학과 교수는 4월 30일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김정은이 푸틴과 회담을 통해 북·중·러 반미(反美) 전선 구축 가능성을 보여주려 했지만, 푸틴이 비핵화를 강조하며 선을 그었다”고 분석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미·북 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나자, 곧바로 푸틴과 만남을 추진했다.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8년 만에 북·러 정상회담이 열렸다.

엄 교수는 또 “푸틴이 러시아가 참가하는 6자 회담을 거론하기는 했지만, 6자 회담을 서두르는 모양새는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는 중국에 맡기는 일종의 분업 외교를 하고 있다”면서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25일 북·러 정상회담을 어떻게 봤나.
“푸틴의 기자회견을 보니, 러시아는 NPT 체제 유지를 강조했으며 미·북 정상회담의 유용성도 인정했다. 푸틴은 미국과 한국이 북한의 비핵화 협상을 충분하게 협의한 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될 때(북한의 체제 보장을 논의할 때) 나서겠다는 입장이더라. 언론 보도와 달리 푸틴이 6자 회담을 당장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정상회담은 북·러 정상 간 소통 채널을 마련하고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보여주는 선에서 끝났다. 스티브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러시아를 방문,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외무 차관을 만나는 등 미·러 양국이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충분히 조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미·북 대화 교착 상태를 이용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어떤 실익을 챙겼나.
“김정은의 의도는 두 가지였다. 첫째, 미·북 정상회담 재개가 쉽지 않고 미·중 무역전쟁으로 중국도 북한 지원에 소극적인 상황에서 북·중·러 전선 구축 가능성을 보여줘 대미 협상 자산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푸틴이 미국의 입장도 염두에 두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김정은의 기대만큼 성과가 크지 않았다. 북·러 정상회담이 8년 만에 이뤄졌다는 점, 양국 정상이 다시 만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김정은의 방러 두 번째 목적은 러시아에 체류 중인 북한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유엔 제재 때문에 러시아에 체류 중인 북한 노동자는 지난해 3만 명에서 올 초 1만1490명으로 줄었다. 남아 있는 북한 노동자들도 연말까지 북한으로 돌아와야 한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북한 노동자들은 연간 2억~3억달러에 달하는 외화를 벌어왔다. 푸틴은 김정은에게 ‘조용하고 충돌하지 않는 해법’이 있다고 했다. 러시아가 단기 체류 비자 발급 등으로 제재를 피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결국 김정은의 방러는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가 한반도 문제의 중재자 역할을 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한반도 문제는 러시아 외교의 우선순위가 아니다. 러시아와 중국은 일종의 분업 외교를 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에 관해 러시아는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다. 중동, 동부 유럽에 관해서는 중국이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한다.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 개입, 크림반도 병합, 동부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이미 충분히 골치 아픈 상황이다. 미국과 서유럽의 제재로 경제 상황도 좋지 않다. 유엔 제재로 양국 간 금융 거래도 쉽지 않기 때문에 러시아가 북한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이번 정상회담에서 푸틴이 남·북·러 삼각협력을 강조한 것을 보아 푸틴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을 동방경제포럼에 동시에 초청할 가능성이 있다. 이게 성사되면, 남·북·러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 예카테린부르크 이노프롬과 함께 푸틴이 참가하는 3대 포럼으로 꼽힌다. 동방경제포럼이 출범할 때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참석해 크게 탄력받았다. 물론 김정은이 응할 가능성은 적다. 최고 존엄은 단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어려운, 여러 정상이 모이는 정상회담에 가지 않는다는 분석이 있다.”

외교가에서 지각하기로 악명 높은 푸틴을 김정은이 30분 기다리게 만들어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 일각에서는 김정은의 실수라는 표현이 나왔다. 김정은이 외교 관행을 모르고 ‘최고 존엄’을 부각하려다 훗날 푸틴의 대북 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나는 김정은이 국제 사회를 경험하고 학습하는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한다고 본다. 국제 사회도 김정은을 외교 무대로 계속 끌어내야 한다.”

푸틴은 북한의 체제 보장을 강조했다.
“다수의 러시아 외교·안보 전문가가 지적한 것처럼, 북한 비핵화와 북한 정권 보장을 한 번에 달성하는 현실적인 방법은 없다. 러시아 외교·안보 전문가 수십 명에게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에 관해 물어 봤지만, 북한의 핵 포기 의사를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러시아는 단계적으로,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본다. 북·러 정상회담이 열리는 날, 푸틴의 측근인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연방안보회의(SCR) 서기가 방한해 문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중·러 공동 행동계획’을 설명했다. 2017년 중·러는 단계적 해법을 강조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단계적 해결 구상(중·러 비핵화 로드맵)’을 발표했는데, 이번에 다시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로드맵은 ‘쌍중단·쌍궤병행’이라는 중국식 비핵화 해법과 3단계에 따라 비핵화를 이뤄야 한다는 러시아식 해법의 공통점을 모은 것이다.”

미·러 관계가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한·러 관계는 미·러 관계를 따라간다. 미·러 관계가 나쁘면 한·러 사이에도 별로 할 게 없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버락 오바마의 대러 강경책을 비판했다. 푸틴을 악마화해 대러 제재를 강화하는 바람에 러시아가 중국의 ‘주니어 파트너’가 됐다는 것이다.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이용해 소련을 견제한 것처럼 러시아를 이용해 중국을 견제하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했다. 트럼프가 러시아와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은 ‘반(反)오바마 정책(ABO·Anything But Obama)’의 산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 의회에서 대러 제재를 고수하고 있어 트럼프 시대에도 미·러 관계는 좋지 않다. 미국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탈퇴한 후폭풍이 거센 데다 러시아에 비판적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등 미·러 관계를 개선할 분위기는 아니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에서 푸틴이 보여준 (미국을 지지하는 듯한) 온건한 발언이 3차 미·러 정상회담을 여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겠지만, 가능성은 크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