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울산5공장 투싼 생산라인이 코로나19 사태로 해외 현지 판매사들이 대부분 영업을 중단하는 등 수출 물량이 크게 줄어 4월 13~17일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4월 2일 현대차와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을 신용등급 ‘부정적 관찰 대상’으로 지정했다. 사진 연합뉴스
현대자동차 울산5공장 투싼 생산라인이 코로나19 사태로 해외 현지 판매사들이 대부분 영업을 중단하는 등 수출 물량이 크게 줄어 4월 13~17일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4월 2일 현대차와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을 신용등급 ‘부정적 관찰 대상’으로 지정했다. 사진 연합뉴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기업 자금 조달 시장의 경색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당장 기업들이 4월에 몰려 있는 대규모 만기 도래 회사채를 상환하지 못할 경우 기업의 줄도산과 대량 실업을 촉발해 한국 경제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위기설’까지 나오고 있다. 금융 당국은 그동안 도입된 금융시장 안정화 장치를 모두 망라한 정책 지원을 내놓으며 불씨 진화에 나섰지만, 시장에는 회사채 대란이 경제 위기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여전히 팽배해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020년 4월부터 연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규모는 42조4000억원, 은행채 및 여신금융채권과 같은 금융채 규모는 114조9000억원에 이른다. 특히 4월에만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가 6조5000억원이다. 4월은 일반적으로 1년 중 회사채 발행이 가장 많은 달이라 그만큼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규모도 크다. 특히 올해 4월은 1991년 이후 4월 기준으로는 만기 물량이 최대다. 

3월 들어 우량 기업들에서 회사채 발행 목표액 미달 사태가 잇따라 발생하자 위기감이 커졌다. 하나은행(신용등급 AA)은 3000억원을 모집하기로 하고 3월 13일 수요 예측(투자자 모집)을 했지만, 참가 금액은 목표에 못 미치는 2700억원에 불과했다. 포스코그룹 계열사인 포스파워(AA-) 역시 3월 17일 5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려고 했지만, 기관 투자자들의 매수 신청은 400억원에 그쳤다. 투자 적격 등급인 BBB+ 등급의 키움캐피탈은 5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 수요 예측에서 170억원만 확보했다.

탈원전 정책으로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두산중공업은 수출입은행에 만기 회사채를 대출로 전환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두산중공업이 발행한 회사채 1조5000억원 중 1조원가량이 올해 4~5월에 몰려 있고 당장 4월 27일에 갚아야 하는 회사채는 6000억원 수준이다. 국내 5위 해운사인 흥아해운 역시 회사채 만기 위기 속에 3월 12일 산업은행에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회사채 267억원가량을 발행한 흥아해운은 지난해 12월 주력인 컨테이너선을 장금상선에 매각하고 비핵심 자산 매각, 주식 감자 등의 조치를 했지만 업황 회복이 더딘데다 코로나19 사태로 수출입 물량이 줄면서 악화 일로를 걸었다.


정책 효과 제한적…장기화 대비해야

기업 자금 조달 시장 경색으로 경제 위기설이 부상하자 금융 당국은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했다. 금융위원회는 3월 24일 1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 안정펀드(채안펀드)를 가동하고, 추후 10조원을 더 조성하기로 했다. 원활하게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6조7000억원 규모의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을 도입하고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를 시행키로 했다. 또 산업은행이 1조9000억원 규모의 회사채 차환 발행 매입을 실행하도록 했다.

당장은 유례없는 정책 지원 덕에 3월 들어 급속히 얼어붙었던 회사채 발행 시장에 온기가 도는 분위기다. 채안펀드는 롯데푸드가 발행하는 700억원 규모 3년 만기 회사채 중 300억원 규모를 매입하기로 하면서 본격 가동을 시작했다. 신용등급 AA등급 이상의 기업들이 자금 조달 채비를 하고 있다.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4월 중 공모채 발행을 확정했거나 검토하는 기업은 총 13곳으로, 이 가운데 10개 기업의 신용도가 AA등급 이상이다. 이 기업들은 대부분 3년물과 5년물 위주로 발행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비우량 기업들은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다. 회사채 시장 안정화 대책이 대기업과 우량 신용등급 기업의 차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채안펀드의 지원 대 상은 신용등급 AA- 이상인 공모 회사채와 금융채, 신용등급 A1 이상인 기업어음(CP) 등으로 3년물 이하 채권으로 한정됐다. 4월 1일 1차 조성분에 해당하는 3조원이 납입됐으며 펀드의 인수 규모는 기업 차환 금액의 50% 이하다.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중 BBB등급 이하 회사채는 1조5000억원, 메자닌 채권은 1조9000억원, 사모사채를 포함한 기타 회사채는 10조3000억원이다. 사모사채는 일반적으로 신용도 낮은 기업이 발행하며 주요 투자처는 사모펀드·증권사·여신전문기관·은행 등이다. 시장의 신용 위험이 증가하면서 투자자들은 신용도가 낮은 채권에 대한 투자를 우선적으로 줄일 가능성이 크다. 사모사채의 차환 부담이 어려워지고 발행 기업의 상환 부담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일부 금융채의 차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여신전문금융채권의 규모는 32조4000억원인데 경기 침체가 지속할 경우 소비자 금융 연체가 증가하고 차환 규모가 큰 여신전문금융기관의 채권 발행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량 등급 회사채도 안심할 수는 없다. 단기적으로는 여행·레저·도소매업 및 항공업 등이 영업 중단으로 실적이 악화하면서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이들 기업에 대해 부정적 검토(하향 검토) 의견을 내놨고 일부 기업은 등급 전망을 변경했다. 장기적으로는 반도체·석유화학·정유·자동차·유통 산업 등 대부분의 산업 실적에도 타격을 줄 수 있어 하반기 이후 대대적인 신용등급 강등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한국은행이 더욱 적극적으로 회사채 매입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는 특수목적기구(SPV)를 세워 회사채를 사고 있다. 회사채매입기구(PMCCF·SMCCF)와 기업어음 매입기구(CPFF) 등 긴급 유동성 공급 기구 5개를 만들었다. 김필규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은행이 외국의 중앙은행처럼 우량 회사채를 매입해 시장을 안정시키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며 “채안펀드의 경우 투자 대상을 보다 확대하고 코로나19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기업의 경우 긴급 유동성 지원 등을 통해 신용 위험을 낮추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채안펀드에 편입이 어려운 A등급 이하 회사채의 원활한 차환을 위해 과세 혜택을 부여한 회사채 전용 펀드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