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건준 대표는 “대기업이 벤처기업의 아이디어와 기술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야 벤처업계 M&A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안건준 대표는 “대기업이 벤처기업의 아이디어와 기술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야 벤처업계 M&A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생체인식 기술 전문업체인 크루셜텍의 안건준 대표는 2007년 10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행선지는 미국 남부 플로리다주의 멜번. 지문인식 반도체 1위 기업인 어센텍을 방문하는 길이었다. 나스닥 상장기업인 어센텍은 세계 최초로 지문인식 반도체 기술을 데스크톱에 적용시킨 업체다. 지문 인식 분야 반도체 1위 업체인 어센텍과 지문인식을 모바일에 탑재할 수 있는 모듈 기술 면에서 세계 1위인 크루셜텍이 스마트폰용 모바일 지문인식 모듈을 공동개발하자고 제안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안 대표는 어센텍의 의사 결정권자를 만나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안 대표는 일년 동안 서너차례나 어센텍 본사를 방문해, 공동개발의 필요성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 결과, 두 회사는 모바일용 지문인식 모듈 공동개발에 합의했고, 2012년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했다. 일본 후지쓰에 휴대전화용 지문인식 모듈을 처음 납품하면서 지문인식 기능이 적용된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크루셜텍은 2007년 미국의 조그만 벤처회사인 어센텍에 문전박대를 당할 정도로 당시 경영상 위기에 봉착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2007년 당시 크루셜텍은 2001년 법인 설립 이래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크루셜텍은 모바일 광마우스인 OTP(Optical TrackPad)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해 ‘세계 시장 점유율 97%’를 점하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써나가고 있었다. 회사 매출도 3000억원까지 치솟았다. 안 대표는 “우리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OTP도 언젠가 기술적 수명을 다할 것으로 예상하고 한 걸음 앞선 기술인 모바일 지문인식 솔루션인 BTP(Biometric TrackPad) 개발을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말했다.

10년 앞을 내다본 안 대표의 선견지명 덕분에 2012년 전후 OTP 시장의 몰락에도 크루셜텍은 동반침몰하지 않고 BTP 시장을 열어 위기를 극복했다. 안 대표는 최근 한국벤처기업협회 회장을 맡아 3만 벤처기업의 도약과 지속적인 성장을 이끌게 됐다.


지난 2월 스페인에서 열린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 행사에서 크루셜텍은 다양한 생활기기에 사용되는 지문인식 신기술을 선보였다. <사진 : 크루셜텍>
지난 2월 스페인에서 열린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 행사에서 크루셜텍은 다양한 생활기기에 사용되는 지문인식 신기술을 선보였다. <사진 : 크루셜텍>

OTP를 블랙베리에 공급해 매출이 급성장하는 와중에 BTP 개발을 서두른 이유는.
“모바일 광마우스인 OTP를 상용화한 것이 우리 회사가 고속성장하는 계기가 됐던 것은 사실이다. OTP를 캐나다 림(RIM)의 스마트폰 블랙베리에 독점 공급하면서 세계 시장을 사실상 석권했다. 순식간에 연 매출 2000억원대 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대화면과 터치입력을 중심으로 진화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애플의 아이폰 등장 이후 블랙베리가 무너지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우리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훨씬 더 심하게 무너졌다. 차세대 기술 개발을 2007년부터 준비했던 것이 위기극복의 계기가 됐다.”

어센텍이 초기에 공동개발을 주저한 이유는.
“우리가 잠재적 경쟁사이기 때문에 안 만나려고 했다. 그래서 3번 찾아갔다. 1년여 동안 만나 OTP를 모바일에 넣고 싶다고 설득했다. ‘우리는 지문인식 모듈 분야에서 세계 1위, 너희는 지문인식 반도체의 세계 1위가 아니냐. 앞으로 미래 사업은 1등 회사끼리 손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패스트팔로어(빠른 추격자)를 밀어낼 수 있다’고 설득했다. 2008년에 공동개발에 합의했고, 2012년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듬해 애플이 지문인식이 탑재된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갑자기 BTP 시장이 커졌다.”

사내유보금 등 1000억원을 모두 기술개발에 투자했는데, 실패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
“OTP 시장 몰락으로 회사가 2012~2014년 3년 연속 적자였다. 100억원 넘던 영업이익이 2012년 적자로 돌아섰고, 손실 규모는 점점 커져 200억원대로 불어났다. 당시 회사에는 사내유보금, 가용자금을 포함해 1000억원 정도가 있었다. 구조조정 자금으로 쓸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을 연구개발에 쏟아부었다. 이미 200여명이던 연구인력을 300명 이상으로 늘리고 지금 본사가 있는 판교에 R&D센터를 차렸다. 벤처에 기술 말고 뭐가 있겠는가? 우리는 BTP 개발에 더욱 집중했고, 우리의 기술 공동개발 파트너인 어센텍을 인수한 애플이 지문인식 스마트폰을 내놓으면서 BTP 기술이 스마트폰 시장의 대세가 됐다. 덕분에 회사도 흑자로 돌아섰다. 과감한 기술 투자가 회사를 살린 셈이다.”

크루셜텍이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BTP를 공급받는 업체는 대규모 글로벌 기업들이다. 현재 중국에서 시장 점유율 1~3위를 차지하고 있는 화웨이와 오포, 비포 등 중국 스마트폰 업체를 비롯해 국내외 주요 스마트폰 업체 16곳이 크루셜텍의 BTP를 사용한다. BTP가 스마트폰 핵심기술로 각광받자 2014년 734억원이던 회사 매출액은 2015년 2625억원, 2016년엔 3200억원까지 치솟았다.

크루셜텍의 차세대 먹거리는 디스플레이 일체형 지문인식 기술인 DFS(Display Fingerprint Solution)다. 스마트폰 전체 화면 위에서 지문을 인식할 수 있어, 보안 기능이 크게 향상된 지문인식 기술이다. DFS가 상용화될 경우 지문인식을 위한 별도의 버튼이 필요 없어 풀스크린 지문인식 디스플레이를 구현할 수 있다.

크루셜텍의 베트남 하노이 공장 내부 전경. <사진 : 크루셜텍>
크루셜텍의 베트남 하노이 공장 내부 전경. <사진 : 크루셜텍>

DFS 시장은 언제쯤 열릴 것으로 예상하나.
“풀스크린 지문인식 기술은 기존 BTP와는 또 다른 기술이다. 가령, 스마트폰 화면에 손가락 하나를 올리는 지문인식 방법과 손가락 네개를 올리는 지문인식 기술이 있다 하자. 어느 기술이 앞선 기술인가? 손가락 하나는 복제할 수 있지만 손가락 전체를 복제하긴 쉽지 않다. 화면 일체형 지문인식 기술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게임이다. 애플, 삼성도 하고 싶어하지만 그런 기술이 아직 없다. 기술은 되는데, 시장이 원하는 가격과 안정적 물량 공급이 전제돼야 한다. 지금은 상용화 직전 단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년 전부터 디스플레이 일체형 지문인식 모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쪽 관련해서 특허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다. 상용화 과정도 제일 빠르다. 특허도 제일 먼저했다. 지난 2월 스페인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에서 바이어들에게 공개했다. 올 연말까지는 스마트폰 전체 화면의 일부, 스마트 워치는 전체 화면 상용화단계에 있다. 세계 3위 스마트폰 회사인 화웨이가 조만간 우리 DFS 기술을 채택한 스마트폰을 출시할 것이다.”

세계 최초 기술개발 못지않게 관련 시장을 열어야 하지 않나.
“맞는 말이다. 제품을 세계 최초로 만들면 그 기술로 돈을 못 버는 경우가 많다. 나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 돈을 벌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세계 최초로 만들어도 돈이 안 된다. 그때까지 세상은 새 기술 없이도 잘 돌아갔다. 그래서 새 기술을 만들어내면 마케팅 전략도 짜야 한다. OTP 하면서 그걸 깨달았다. BTP도 똑같이 했다. 애플, 삼성, LG 등 다 찾아갔다. 프로모션을 2년 이상 했다. 그런데 검토만 하고 아무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게 2012년도에 소량이지만 양산이 돼 후지쓰에 BTP 기술을 처음 공급한 것이다. 애플이 2013년 지문인식 스마트폰을 처음 내놓은 것도 우리가 군불을 세게 땐 게 계기가 됐다.”

한국벤처기업협회장으로서 차기 정부에 바라는 것은.
“대기업에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아야 한다. 새 정부 역시 경제활성화를 우선과제로 삼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핵심은 벤처육성이 돼야 한다. 그렇다고 벤처기업 자금지원을 무조건 늘려달라는 게 아니다. 벤처기업도 회사 사이즈가 각각 다르다. 스타트업 벤처가 있고, 이미 수백억원 매출에 도달한 성장하는 벤처, 조 단위 매출에 오른 벤처기업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회사 규모가 각각 다른 만큼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 스타트업 벤처에는 당연히 자금지원 중심이 되는 게 맞다. 다만 이미 성장하고 있는 기업의 경우, 필요한 건 공정한 생태계다. 정부는 벤처기업들이 대기업을 포함해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을 도와야 한다.”

벤처업계 인수·합병(M&A)을 활성화할 방법은.
“대기업이 벤처기업의 기술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아쉽다. 대기업이 중소 벤처기업의 기술을 사는가? M&A를 하나? 잘 안 한다. 그걸 제대로 된 값을 주고 사라는 것이다. 아이디어와 기술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한국은 아무리 기술력이 있어도 그 벤처가 돈을 벌고 있지 않으면 대기업들이 쳐다보지도 않는다. 돈을 벌고 있을 때만 산다. 시장에서 검증되지 않으면, 반응이 없으면 아예 안 산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삼성, LG 같은 대기업들은 벤처기업의 가능성을 보고 사야 한다. 그러면 M&A 시장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가? 벤처기업 입장에서 거의 유일한 자금 회수 방법은 IPO(주식 공개 매도)뿐이다. M&A는 자금회수의 1%도 안 된다.”

M&A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걸림돌 아닌가.
“애플, 페이스북, 구글, 중국의 텐센트 등 글로벌 벤처기업이 거액을 투자해 스타트업을 인수하는 것을 긍정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한국 대기업이 벤처기업을 인수하면, ‘기업의 외형 불리기가 아니냐’는 부정적 시각이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다. 대기업이 스타트업 벤처의 아이디어, 기술의 가치를 인정해 자연스러운 M&A 시장이 형성돼야 한다.”

벤처기업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규제 철폐가 필요한 부분은.
“벤처 창업 규제는 네거티브 방식(구체적으로 명시한 규제 외에는 모두 허용하는 방식)으로 과감히 전환하고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에 한해 사후 보완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창업 후 일정 기간 동안 국민 안전 등 최소한의 규제만을 적용하는 ‘창업 벤처 규제 모라토리엄(규제 동결조치)’ 제도 도입이 검토돼야 한다고 본다.”

우수 인력의 벤처 유입책은.
“2000년대 초만 해도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의 우수 인력들이 벤처기업으로 활발하게 진출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유입이 없다. 왜 그렇겠나? 지금은 스톡옵션에 대한 소득세 등 세금 비율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우수 인재 유입을 위한 스톡옵션 활성화를 위해 현행 과세 제도는 개선돼야 한다.”


▒ 안건준
1965년생, 부산대 기계공학과, 경북대 정밀기계학 석사, 삼성전자 연구소 선임연구원(1990~97년), 크루셜텍 설립(2001년), 한국벤처기업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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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셜텍(Crucial Tec) 2001년 설립된 생체인식 기술 전문기업. 주력 제품은 스마트폰의 지문인식장치(BTP). 미국 구글·마이크로소프트, 중국 화웨이 등이 주요 고객사다. 2016년 매출은 3200억원. 임직원 수는 1300명이며 중국, 베트남에 생산공장을 두고 있다.
OTP 옵티컬 트랙패드(Optical TrackPad)의 준말로, 손가락의 움직임을 읽는 모바일 입력장치인 ‘모바일 광마우스’를 뜻한다. 크루셜텍은 OTP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해 블랙베리에 납품했다.

BTP 바이오메트릭 트랙패드(Biometric TrackPad)의 준말로 OTP에 지문인식 기능을 추가한 ‘지문인식 솔루션’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홈버튼에 BTP를 탑재하면 해당 모듈이 사용자의 지문을 인식한다.

Plus Point

1300명 직원을 하나로 만드는 크루셜 프라이드(Crucial Pride)

크루셜텍 직원들의 신분증에는 ‘크루셜 프라이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진 : 크루셜텍>
크루셜텍 직원들의 신분증에는 ‘크루셜 프라이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진 : 크루셜텍>

2001년 설립, 1300명의 직원을 둔 크루셜텍은 기술, 동료, 회사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크루셜 프라이드(Crucial Pride)’라는 독특한 기업문화를 만들었다. 크루셜 프라이드는 “세계 최고를 추구하고, 구성원 간에 하나된 팀워크를 자랑하며, 신뢰받는 기업으로서의 자부심을 의미한다”고 크루셜텍 측은 밝혔다. 크루셜 프라이드는 세분화해 T.O.P(Top·One·Promise)라고 표현한다.

첫번째는 ‘최고’라는 자부심(pride in top)이다. OTP(모바일 광마우스), BTP(모바일 지문인식 솔루션)를 포함한 크루셜텍의 제품들은 대부분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들이다. 크루셜텍 직원들은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퍼스트무버(선도자)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트렌드를 미리 파악하는 감각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크루셜텍은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세계 최고라는 높은 목표를 향해 도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두번째, 하나된 자부심(pride in one)이다. 크루셜텍은 일반적인 IT제조업체와 차이가 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모두 정통한 통합 솔루션 기업이다. 사내에는 반도체 설계자, 양산기술자,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일한다. 이들이 생각을 공유하고 협업하다 보면 놀라울 정도로 창의적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번째는 신뢰의 자부심(pride in promise)이다. 안건준 대표는 “우리가 지향하는 회사는 굿(good) 컴퍼니”라며 “단순히 규모만 큰 빅(big) 컴퍼니가 아니라 체계적인 시스템을 바탕으로 조직 간에 유기적으로 교류해 외부 환경변화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기업”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