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균 명예회장은 “명동을 찾는 유커들에게 한국 문화를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신영균 명예회장은 “명동을 찾는 유커들에게 한국 문화를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서울 명동은 명실상부한 쇼핑의 중심지다. 먹거리·살거리 등을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다. 특히 중국 관광객(유객)에겐 쇼핑 천국이다. 명동을 오가는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유커일 정도다. 하지만 아쉬운 게 있다. 명동은 쇼핑에만 최적화돼 있을 뿐 한국 문화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명동을 ‘한류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나선 이가 있다. 바로 원로배우인 신영균(88)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이다. 신 명예회장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일명 증권빌딩을 리모델링해 부티크호텔로 바꿨다. 호텔명은 ‘호텔28(Twenty Eight)명동’이다. 호텔 이름에 있는 ‘28’은 신 명예회장이 태어난 해(1928년)다. 호텔의 객실수는 83개고 가격대는 중고가 호텔 수준이다.

호텔 곳곳에선 한국 영화를 만날 수 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면 신 명예회장이 주연으로 출연한 흑백영화가 흘러나온다. 객실과 복도 곳곳에는 옛 한국 영화의 스틸컷 사진이 걸려 있다. 1960~70년대 사용된 영사기와 카메라도 전시돼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배우는 부드럽고 인자했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목소리에선 여전히 힘이 넘쳤다. 남색 정장차림의 그에게선 영화배우의 멋이 느껴졌다.


명동 한복판에 호텔을 연 이유는 무엇인가요.
“명동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특히 중국 관광객들이 엄청나죠. 이들은 화장품을 사고 국적불명의 음식을 먹어요. 그런데 명동엔 우리 문화가 없어요. 예전엔 명동이 문인들의 중심지였어요. 음악을 좋아하고 시를 사랑한 사람들이 모두 명동으로 몰렸죠. 예술극장과 음악다방이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쇼핑 공간밖에 없어요. 그게 너무 아쉬웠어요. 명동을 찾는 중국인들에게 한국 문화를 조금이라도 알려주고 싶었어요.”

옆에 있던 신언식 한주홀딩스코리아 회장이 거들었다. 신 회장은 신 명예회장의 아들로 호텔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신 회장은 “명동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코드가 없다”며 “영화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일본 도쿄 긴자, 미국 뉴욕 맨해튼 같은 독특한 문화 콘셉트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류 문화의 중심지를 만들기 위해 계획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류 문화 확산을 위해 국내 대표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YG엔터테인먼트와 손잡았습니다. 호텔에 YG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인 YG푸드의 외식 브랜드가 입점했습니다. YG와는 향후 K-팝 관련 프로모션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신 명예회장은 차문화 보급에도 적극 나섰다. 이를 위해 차 전문가인 서영수 영화감독과 의기투합했다. 신 명예회장의 후배이기도 한 서 감독은 중국 관영 CCTV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천사보이(天賜普洱)’에 한국의 대표적인 보이차 전문가로 출연했다. 서 감독은 중국 윈난성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최고급 보이차를 호텔 손님들에게 제공할 예정이다.

서울 관훈동에도 호텔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호텔은 오래전부터 꿈꿔 온 사업입니다. 늙어서 배우를 못하면 호텔 짓고 여생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초엔 제주도에 호텔을 지을 생각이었지만, 영화박물관을 먼저 짓게 됐죠. 관훈동에 있는 센터마크호텔은 바로 건너편의 하나투어와 공동으로 추진한 겁니다. 테마도 없고 콘셉트도 없는 전형적인 비즈니스호텔입니다. 이번에 ‘호텔28명동’을 열게 된 이유입니다.”

신 명예회장은 1970년대 초반 이후에는 사실상 연기자의 길에서 은퇴해 극장을 경영하는 등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당시엔 영화배우로 죽는다면 영광이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남아 있는 가족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나 싶어서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사업은 그가 출연했던 영화만큼이나 큰 성공을 거뒀다.

가장 먼저 한 사업은 무엇인가요.
“어느 날 대만에 촬영을 가서 볼링장을 보게 됐어요. 이거 되겠다 싶더군요. 지금 이 자리에 볼링장을 오픈했어요. 굉장히 잘됐죠. 볼링장을 몇년 운영해 번 돈으로 이 빌딩을 매입할 수 있었어요. 대출도 받았는데,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때라 어렵지 않았죠. 그 다음으로 한 게 극장사업이었어요. 당시 국내에서 한 해 제작된 영화가 200편이 넘었어요. 서울엔 개봉관이 10개에 불과했죠. 모두 개봉관을 잡기 위해 난리였어요. 그땐 극장주가 ‘갑 중의 갑’이었죠. 에라, 내가 극장사업을 하자. 소규모 극장부터 시작해 결국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도 인수하게 됐어요.”

그는 2010년 명보극장과 제주도에 있는 신영영화박물관을 기부했다. 모두 500억원이 넘는 규모다. 기부는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됐다. 신언식 회장도 흔쾌히 동의했다. 신 회장은 “명보극장은 한국 영화의 뿌리 중 하나고 기부가 아버지께서 영원히 사시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배우로,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더 이루고 싶은 게 있습니까.
“예전의 명동엔 문화가 넘실거렸는데, 이젠 상업에 흔들리는 공간이 돼버렸어요. 명동엔 낭만이 사라졌어요. 호텔로 돈 벌 생각은 없습니다. 돈은 벌 만큼 벌었어요. 호텔이 사랑받으면서 문화1번지였던 명동의 위상을 되찾는 데 작은 힘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Plus Point

한류 원조 신영균

신영균 명예회장은 1928년 11월 6일 황해도 평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해 동대문 흥인초등학교를 다녔다. 한성중·고교를 졸업하고 ‘청춘극장’에 입단해 2년간 단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극단생활은 열악했다. 그가 서울대 치과대에 진학한 건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기의 꿈을 접은 건 아니었다. 그는 대학에서 연극부를 창립해 연기를 계속했다. 6·25전쟁 이후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1958년 치과 병원을 개업했다. 병원을 개업하고서도 연극무대에 계속 섰다.

1960년 비교적 늦은 나이인 서른둘에 조긍하 감독의 제안으로 영화 ‘과부’로 데뷔했다. 이후 1970년대 말까지 20년간 톱스타로 군림하며 ‘연산군’ ‘빨간 마후라’ ‘5인의 해병’ ‘저 하늘에도 슬픔이’ ‘미워도 다시 한번’등 31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한류의 원조이기도 하다. 그가 주연을 맡은 ‘빨간 마후라(1964년)<사진>는 아시아에서 인기가 높아 아시아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1968년 멜로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당시 홍콩, 대만 등지로 수출되며 동남아시아에서 인기 몰이를 했다. 홍콩과 합작한 영화인 ‘달기’에서 당대 홍콩 국민 여배우 린다이(林黛)와 연기하기도 했다.

1968년부터 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예술단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예총회관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 15~16대 국회의원(한나라당)이었을 때에는 6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국회문화예술위원회를 창립, 국내외 문화 예술을 활성화하는 데 힘썼다. 그는 명예회장, 협회장, 국회의원보다는 영화배우로 불리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