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규 원장은 “한국 경제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선 기업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유병규 원장은 “한국 경제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선 기업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그동안 우리나라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던 주력 산업이 위기다. 조선·해운업은 경쟁력을 상실했고, 철강·석유화학도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산업구조 전환이 시급한데 한치 앞을 내다보기 쉽지 않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조차 힘들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올해 한국 경제는 내수 부진 심화 등으로 저성장 기조가 더욱 깊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정치 불안, 컨트롤타워 기능 약화에 따른 경제 정책 혼선, 미국 트럼프 정부와의 통상 마찰 우려 등 한국 경제를 둘러싼 대내외 악재에 타격받을 공산이 크다.

유병규 산업연구원 원장을 만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로부터 우리 산업의 현주소와 해법에 대해 듣기 위해서다. 유 원장은 1988년 현대경제연구원에 들어가 25년간 경제·산업 연구에 매진한 이코노미스트다. 거시경제 흐름과 미시경제 전반에 정통하다. 한국 뿐 아니라 글로벌 산업동향에도 아주 밝다. 2013년 대통령 직속 기구인 국민경제자문회의 지원단장을 맡아 규제 혁신, 서비스 산업 육성 등 정부의 주요 국정 과제를 구체화하고 실현 방안을 마련하는 데 힘써 왔다. 민간연구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지난해 5월부터 국책연구기관인 산업연구원을 이끌고 있다.

세계적인 산업 경쟁 체제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세계 경제의 저성장으로 주요 산업 대부분이 과잉 공급되는 가운데 신기술을 바탕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우리의 준비는 미흡하다.

유 원장은 “우리 내부의 경쟁력이 약화됐고, 중국·인도 등이 급성장하면서 한국 주력 산업의 매출·수출·수익성 등 모든 게 악화됐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주력 산업인 제조업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지속 성장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한국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조선 등 주력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다. 사진은 선박을 건조하는 도크가 텅 비어 있는 모습. <사진 : 조선일보 DB>
그동안 한국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조선 등 주력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다. 사진은 선박을 건조하는 도크가 텅 비어 있는 모습. <사진 : 조선일보 DB>

과거 성공 반복하려다 위기 자초

유 원장은 주력 산업의 위기 요인으로 ‘성공의 함정’을 꼽았다. 우리 기업들이 과거의 성공에 매몰돼 자만한 결과라는 얘기다. 한국 기업이 과거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접근 방식에 빠져 과거의 성공을 반복하려고 할 뿐, 더 좋은 방법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된 찬사가 자기 만족에 빠지게 하고 ‘우리는 잘하고 있다’는 망상을 만드는 것이다.

유 원장은 “성공의 함정에 세대교체 시기가 겹치며 위기가 더 커졌다”고 말했다. 앞 세대는 과감하게 사업을 확장한 반면 현 세대는 안정적인 현상 유지에 신경 쓰면서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위기에 빠진 한국 산업을 살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유 원장이 제시한 해답은 단순했다. 그는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산업이고,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기업”이라며 “그런데 경제와 산업을 살려야 한다면서 누구도 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우수한 인재들이 안정적인 대기업 취업을 선호하면서 창업에 나서는 젊은층이 많지 않다.
우수한 인재들이 안정적인 대기업 취업을 선호하면서 창업에 나서는 젊은층이 많지 않다.

한국 주력 산업 위기의 구조적 요인은 무엇인가.
“우리 주력 산업은 성숙화 단계에 진입했고, 성숙화 단계에선 신산업 발전을 위해 규제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우린 그걸 못했다. 기득권 세력의 반대 때문이었다. 기득권 계층은 혁신을 제로섬 게임으로 본다. 규제가 풀리면 자신들은 망한다고 생각한다. 서비스업도 마찬가지다. 금융이나 의료 산업에서 규제가 풀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업 구조조정이 미흡한 측면도 있지 않은가.
“우리 산업 구조조정은 과거 패러다임에 너무 얽매여 있다. 지금 상황은 과거와는 너무 다르다. 1970~80년대에는 정부가 우격다짐으로 할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 당시엔 기업들이 한 번에 망했기 때문에 공적자금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의 역할에 한계가 있다. 지금 구조조정은 기업이 선제적으로 할 수 있도록 유인책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인수·합병(M&A) 시장을 조성하고, 공무원에게도 면책특권을 줘야 한다. 나중에 왜 그렇게 했나 하고 따지면 구조조정을 할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조정은 지역 산업 구조조정이기도 하다. 우리 주력 산업이 지역 거점을 중심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지역 성장 전략도 마련해야 한다.”

주력 산업뿐만 아니라 신성장 산업도 위기라는 분석이 많다. 어떻게 보는가.
“신성장 산업도 위기다. 선진국뿐만 아니라 중국 등이 이미 우리를 앞서고 있다. 신성장 산업을 가로막는 것도 결국 규제다. 신산업 육성에 필요한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로는 부르짖지만 절박감이 부족하다. 기업들이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거나 사업을 전환할 수 있도록 기업 현장에 맞는 정책이 필요하다. 현재 기업들의 원활한 사업 구조조정과 신사업 전환을 위해 기업활성화법이 운영되고 있는데, 정부나 기업이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국내 신성장 산업 육성 정책은 외환위기 이후 20년째 추진되고 있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게 유 원장의 진단이다. 지식경제·혁신경제·녹색경제·창조경제 등 거의 같은 개념인데 매번 다른 부문에 새로운 투자가 추진되는 등 정책의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국내 연구·개발 투자가 일종의 ‘나눠먹기식’으로 진행돼 투자 대비 생산성이 극히 낮은 것도 원인이다.

유 원장은 “지금까지 투자된 신성장 동력 분야에 대한 점검을 통해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하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가 진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엇보다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젊은층의 창업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창업 생태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왜 그런가.
“국내 창업 생태계는 최근 활성화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이나 중국 등에 비해서는 미흡하다. 우리 사회에 반(反)기업 정서가 많고, 창업에 대한 비관적 정서도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동부와 서부의 명문대 지역이 창업 중심지고, 중국 역시 칭화대 등이 창업을 선도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우수한 인재는 안정된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의사나 공무원이 되는 것을 선호한다. 창업이 취업보다 어려운데, 취업 못하면 창업하라고 권유한다. 정부가 국내 우수 대학의 우수 학생들이 창업에 나설 수 있도록 유인책을 만들어야 한다. 또 창업의 걸림돌이 되는 각종 규제와 행정절차를 철폐해 손쉽게 창업하고 퇴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신성장 산업도 중국에 따라잡힐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중국은 우리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중국 기업은 산업화 시대를 거치지 않고, 디지털 시대에 바로 진입하면서 급성장했다. 우리 기업이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경험한 것을 중국은 디지털 시대에 신산업을 일으켜 더욱 역동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절망할 단계는 아니다. 아직은 중국에 비해 기술력과 품질 면에서 우위를 지키고 있다. 각 산업별로 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특화 부문에 집중하고 효율성과 전문성을 보다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차세대 성장 동력에 대한 중장기 투자를 추진하고 연구·개발 혁신 능력을 높여야 한다.”

올해 우리 기업들이 처한 상황은 만만치 않다. 주력 산업의 경쟁력 저하에다 세계적인 추세인 보호무역주의 등의 영향 때문이다.

유 원장은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는 우리 산업계에 세 가지 경로를 통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동차·전기전자·석유화학 업종은 당장 영향을 받게 된다. 중국이나 멕시코 등 대미 주요 무역 국가들의 통상 여건이 악화되면 디스플레이·가전 등이 피해를 보게 된다. 미국의 자국중심주의 강화와 통화전쟁으로 인한 세계 경제 침체는 산업 전체에 영향을 준다.

그는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선 한국의 대미 투자 확대와 이로 인한 미국 고용 증가와 같은 미국의 경제 이익 증대 효과를 분석해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글로벌 무역 구조는 서비스와 소비재 제품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최근 글로벌 무역 구조는 서비스와 소비재 제품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보호무역주의 확산으로 인한 수출 부진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글로벌 무역의 패러다임은 ‘뉴 노멀 시대’로 진입했다. 보호무역주의와 세계 경제 저성장으로 인해 글로벌 무역 규모는 축소되고 있다. 무역구조는 서비스 제품, 소비재, 전자상거래  증가 등으로 변하고 있다. 그 결과 제조업과 중간재 중심의 한국 수출이 부진을 겪게 된 것이다. 지금의 수출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선 새로운 무역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제조업과 신기술 융합을 통한 기존 상품의 고부가가치화가 필요하다. 또 서비스 수출과 아세안·중동·아프리카 등 수출 지역 다변화도 필수적이다. 아세안 지역에는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 인기를 끌었던 저렴한 가격의 중소·중견기업 제품을 수출하는 것도 방법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은 무역의 디지털화를 촉진해 중소기업의 무역 확대에 기여할 수 있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이 이슈다. 우리 기업의 준비는 어떤가.
“4차 산업혁명의 기반 기술에 대한 우리의 대응 수준은 중국보다는 한발 앞선 상황이다. 하지만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선 크게 뒤떨어져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인 인공지능 분야 등에서 경쟁력이 취약하다.”

4차 산업혁명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4차 산업혁명은 기술 문제가 아니다. 삶의 시스템이 바뀌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3차 산업혁명 즉 디지털 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기존의 디지털 혁명과는 다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것이다. 기업 측면에서 보면 4차 산업혁명을 경영에 접목하기 위한 인식이 부족하다. 우리 기업들은 생존하기에 급급하고, 미래를 위한 기획이나 투자를 못하고 있다. 작업 방식, 노사관계, 교육 등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낙후돼 있다. 우리 산업 현실에 적합한 ‘한국형 4차 산업혁명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이 영향을 받는 생산·유통·물류 등 각 부문의 단계별 영향을 파악하고 산업별 차별화된 대응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얘기다. 또 기반 기술 분야에서 한국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틈새시장을 발굴하고 이에 대한 투자도 추진해야 한다.

유 원장은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한 산업 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체계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존의 대학 입시 위주의 암기식 교육체제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데는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일하는 방식을 과감히 바꾸는 노동시장 구조 개혁도 시급하다. 유 원장은 “각 산업혁명은 그때마다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왔다”며 “더 유연한 형태의 노동시장 개혁이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


▒ 유병규
1960년생, 성균관대 경제학 박사,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산업연구본부장, 국민경제자문회의 지원단장,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지속발전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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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4차 산업혁명은 기업들이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ICT)을 융합해 제조 경쟁력을 높이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더스트리(Industry) 4.0’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며 한국에서 추진하는 ‘제조업혁신 3.0 전략’과 같은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