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한국 경제는 저 멀리서 곧 들이닥칠 거대한 폭풍우, 그에 앞서 닥친 태풍과도 같은 바람에 삐걱거리며 흔들리는 누각(樓閣) 같은 상태”라고 말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한국 경제는 저 멀리서 곧 들이닥칠 거대한 폭풍우, 그에 앞서 닥친 태풍과도 같은 바람에 삐걱거리며 흔들리는 누각(樓閣) 같은 상태”라고 말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한국과 중국·일본 3개국은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최대 제조업 생산기지이다. 철강·선박·반도체·디스플레이 등의 경우, 이 3개국에서 생산하는 양이 전 세계 총생산량의 85~90%를 차지한다. 이 3개국의 주력 산업 역시 철강·조선·전자 등으로 상당 부분 중첩돼 있다.

최근까지 한·중·일 3개국의 분업 구조는 나름 완결된 형태였다. 일본은 하이엔드(high-end)기술·부품소재 장비 분야를, 한국은 미드엔드(mid-end)기술·제품, 중국은 로엔드(low-end)기술·제품에 각각 특화했다. 그러나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런 3국 분업 구조는 금이 가고 급격한 경쟁 구도로 재편되고 있다.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이런 동북아 경제·산업구조 역학 변동에 10여년 전부터 주목했다. 누가 시키거나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닌데도 자비(自費)를 들여 국내 산업생산 기지는 물론 중국·일본 현장을 찾아다녔고, 각국 전문가와 기업인들을 만나 열띤 토론을 했다. “‘관료적 문제의식과 소명감’을 바탕으로 해법을 마련하느라 밤잠을 설친 적도 부지기수”라고 그는 말했다.

2013년 안 전 차관이 내놓은 ‘한·중·일 경제삼국지’는 이런 문제의식의 첫번째 산물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향후 3~5년 내 한국 제조업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동북아 제조업 신(新)삼국지 구도에서 유일한 패자(敗者)로 몰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때로부터 4년이 경과한 지금, 그는 ‘한·중·일 경제삼국지2’를 펴냈다. 1권과 달리 2권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암울한 묵시록’을 연상케 한다.

이달 11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자리에서 안 전 차관은 “예상보다 빠르게 중국이 확실히 이기고 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주력 산업 가운데 절대적인 비교 우위를 가진 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중국에 뒤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권을 내기 전 6개월간 중국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선전(深圳)·칭다오(靑島)·옌타이(煙臺) 등에 있는 중국 제조 기업체를 둘러봤다고 한다. 한국에선 시화·반월 공단, 창원과 구미공단, 울산광역시, 거제 등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10월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 뜨고 있는 광둥(廣東)성 선전을 둘러본 후 귀국 비행기 안에서 그는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 경제가 중국에 정말 완패할 것이라는 심각한 비애감에 사로잡혔다”고 토로했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를 어떻게 보나.
“한국 경제의 일부분을 손을 대 수정하는 조정 단계는 지났다고 본다. 한국 경제는 저 멀리서 곧 들이닥칠 거대한 폭풍우, 그에 앞서 닥친 태풍과도 같은 바람에 삐걱거리며 흔들리는 누각(樓閣) 같은 상태다.”

왜 그렇게 비관적인가.
“한국은 대기업 중심 ‘패스트 팔로어(fast-follower)’ 성장 모델이 수명을 다하고 주력 산업이 경쟁력을 잃은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즉 대기업 체제의 종언(終焉)이다. 반대로 중국은 매년 신생 벤처·스타트업이 360만개 생겨날 정도로 폭발적으로 역동성이 넘친다. 일본의 ‘아베노믹스’도 여러 한계점이 많지만 탄탄한 중소·중견기업의 세계 초일류 제조 실력과 노하우, 수많은 글로벌 대기업들로 최소한 10년 이상 버틸 것이다. 반대로 한국은 대안(代案)이 없는 외통수에 몰려있다.”

한·중·일 제조 경쟁에서 중국이 확실히 이겼다고 단언하는 근거가 있나.
“중국의 추월 속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이미 제조업의 상당 부분에서 중국이 한국의 주력산업을 추월하거나 추월 중인 현상이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는 4년 전 저서에서 중국이 경쟁력을 확보하기 쉬운 산업의 기준을 5개로 제시했다. △조립부품 수가 적으며 표준화한 부품이 많은 분야 △기술이 장비에 체화된 분야 △블랙박스식의 독자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 △현장의 암묵지(暗默知·학습과 경험을 통해 개인에게 체화돼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식)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분야 △대만의 산업협력을 받을 수 있는 분야다.

특히 경쟁력확보가 쉬운 산업의 5가지 요소를 가장 많이 보유한 분야가 IT산업이라고 꼽았다. 안 전 차관은 “지금까지 예의주시한 결과, 4년 전 전망했던 방향과 흐름이 일치했다. LCD(액정표시장치), TV, 시스템반도체 등이 대표적이다. 요즘엔 스마트폰도 중국이 급속도로 따라오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주력 산업이 중국에 비해 확고한 비교우위를 가진 분야는 메모리반도체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추월당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는 한국 기업이 배워야 하는 중국 기업이 매년 거꾸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징조라고 말했다.

“통신장비·스마트폰 업체인 화웨이(華爲), 민간 드론 시장 세계 1위 DJI, 중국판 우버인 디디추싱(滴滴出行), 온라인거래 기업인 알리바바, 전기차업체 BYD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 IT기업 중 삼성을 위협하는 최대의 경쟁자는 화웨이일 가능성이 높다. 화웨이는 무엇보다 매출의 15% 안팎을 연구·개발(R&D)에 쏟아붓는 등 글로벌 수준의 연구개발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유 화웨이 대표는 작년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5년 내 세계 시장점유율 20~25%를 차지해 애플과 삼성을 추월하겠다’고 말했다. 나도 이 기간 중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스마트폰 조립업체들이 세계 최고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한국은 어디에 집중해야 하나.
“한·중·일 분업구조에서 우리는 중국에 부품·소재·장비를 팔아야 한다. 우리가 조립완성품 분야를 중심으로 발전할 때 일본이 우리에게 부품·소재·장비를 팔아 우리보다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그처럼 똑같이 우리는 중국을 상대로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중국에 부품·소재·장비를 팔 수 없다면 조립완성품은 중국에 밀리면서 대중(對中) 무역수지가 지금과는 반대로 대규모 적자를 기록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 경제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품·소재·장비 분야에서 경쟁우위를 차지한 일본·독일 등 선진국과의 격차를 극복해야 한다.”

일본 경제는 어떻게 보나. ‘아베노믹스’로 회생하지 않을까.
“회생하려는 노력의 발버둥이지만 대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아베노믹스는 일본의 몰락을 더 앞당기는 결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동북아시아의 힘의 구도는 중국으로 급격히 기울 것이다. 일본은 경제규모 2위 지위를 중국에 넘겨주고 3위로 물러났다. 그러나 현재 GDP(국내총생산) 규모는 중국의 40%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그 격차는 앞으로 더 벌어질 것이다.”

중국·일본과 숙명적으로 부딪히면서 생존해야 하는 한국 경제의 활로는 무엇인가.
“먼저 문제의 근원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세 가지라고 본다. 대기업 집단 중심 성장시대의 종언, 늙고 활기없는 경제,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다. 이 중 가장 큰 문제는 대기업 집단 중심의 성장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전에는 대기업 집단 시스템과 국가의 이익은 상당 부분 일치했다. 대기업 집단이 성장하고 발전할 때 나라경제 성장과 고용, 가계소득 증가라는 선순환이 일어났다. 반도체·디스플레이·철강·기계·조선·통신장비·석유화학 등 9개 주력산업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현재는 대기업 집단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폐해가 긍정적인 영향과 국민적 기여를 초과하는 변곡점을 지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대기업집단이 상품시장과 생산요소(특히 인력과 자금) 시장에서 독과점 지위를 활용해 우리나라가 경제와 산업을 거의 지배하고 있어 여타 부문(특히 중소·중견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 대기업집단과 대기업집단에 가까운 기업에 그 혜택이 많이 돌아간 반면, 이와 관계가 없는 중소기업·자영업자 등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경제성장의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기업 수출이 늘어도 중소·중견기업들에 전달되는 ‘낙수(落水)효과’는 사라진 지 오래다. 많은 기업인은 “우리나라에서 중소·중견기업이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조립 대기업의 협력업체가 되는 길”이라고 지적한다. 안 전 차관은 “1980년대 이후 국내에서 새롭게 대기업으로 진입한 기업이 거의 없다. 이게 말이 되는가.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집단이 진출하지 못한 인터넷과 게임산업의 네이버, 카카오, 엔씨소프트 등만이 대기업으로 성장한 극소수의 업체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차기 정부는 한국 경제를 어떻게 혁신해야 할까.
“먼저 대기업 집단 중심의 ‘모방형 혁신’을 벗어나 ‘창의적 혁신’이 왕성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기업이 인재와 자금을 독식(獨食)하는 체제를 고쳐야 한다. 산업정책과 경제 정책의 무게중심을 ‘글로벌 지향 중견·중소기업 육성’으로 옮겨 스타트업을 포함한 창의적인 기업들이 활발하게 성장해 한국 경제의 새 성장동력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한 연구개발·교육·금융·노동시스템을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 관련 법령, 정책, 예산 등의 개편도 신속하게 추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들은 낮은 생산성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생산공정의 스마트화를 대대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

인위적인 대기업 해체론과 비슷해 보이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멀쩡한 대기업을 의도적으로 흠집을 내거나 공격해 해체해야 한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글로벌 중소·중견 기업이 많이 나오려면 대기업을 기반으로 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다. 즉 삼성전자의 ‘C랩’과 같은 대기업 사내 벤처가 글로벌 중소·중견 기업을 키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통로라고 본다. 기존 대기업은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하고 산업정책의 초점을 스타트업, 벤처, 중소·중견 기업 육성으로 옮기자는 것이다. 다만 이들은 내수 지향형 기업이 아니라 차별화된 독자 기술과 상품을 갖고 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하는 글로벌 기업이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경제의 새 활력소이자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코스닥 상장 기업 오너들을 보면 대학을 갓 졸업해 창업한 사람이 아니라 대기업을 다니다 창업에 성공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안 전 차관은 “중국의 한 개 성(省) 규모에도 못 미치는 우리나라가 중국을 극복할 수 있는 비교우위 요소를 확보하지 못하면 중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주변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며 “지금부터 10년이 우리의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 안현호
서울 중앙고,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행정고시(25회), 산업통상자원부(옛 지식경제부) 철강·석유화학과장·산업기술정책국장·산업정책국장·제1차관, 한국무역협회 상근부회장, 단국대 석좌교수, 삼정KPMG 고문


Plus Point

中 TV·LCD·스마트폰, 韓 턱밑까지 추격

2006년 삼성전자는 세계 TV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삼성이 같은 해 내놓은 보르도 LCD TV는 돌풍을 일으켰다. 이때 세계 1위를 내준 일본 소니는 지리멸렬하다가 최근 가전(家電) 부문에서 철수했다.

10년 후인 2016년 1분기, 시장조사기관 HIS가 조사한 글로벌 TV시장에서 중국기업의 시장점유율(대수 기준)은 31.4%였다. 삼성·LG 등 한국기업 점유율(34.2%)을 2.8%포인트 차로 턱밑까지 뒤쫓아왔다. 올해는 중국 기업이 TV판매 수량면에서 한국기업을 앞설 가능성이 높다. 한국 제조업이 일본을 추월했던 현실이 이제 중국과 한국 기업 간에 재연된 셈이다.

LCD의 경우 중국 측 생산량이 1~2년 내 한국을 넘어설 게 확실시된다. 스마트폰도 위험하다. 세계 시장점유율 1위인 삼성전자는 중국 시장에서 2014년 샤오미에 1위 자리를 내줬다. 2016년엔 중국 토종기업 오포(Oppo)가 중국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중국에는 샤오미, 오포, 비보 같은 무명의 기업이 계속 탄생하는 생태계가 형성된 덕분이다.

우리나라 수출 1위 품목인 메모리반도체 분야가 적어도 향후 5년 내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게 위안거리다. 조철 산업연구원 박사는 “중국의 메모리반도체 진출이 매우 체계적이며 일사불란하다”며 “세계 시장에서 일정 수준 비중을 차지할 만큼은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목되는 것은 세계 최대 규모의 중국 내수 시장 규모와 공산당 1당 독재체제인 중국 중앙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의 힘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존재감이 없던 중국 디스플레이 회사 BOE가 세계 최고 수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정부의 무모할 정도의 집중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BOE가 10년 넘게 적자를 내는데도 중국 정부는 경제성을 무시한 엄청난 자금을 지원하고, 중국 TV 생산업체들이 BOE패널을 일부 구입하도록 의무화하는 정책도 벌였다. 중국 정부가 이런 성공사례를 다른 분야에도 적용하면 한·중 제조업 역전 충격이 현실화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