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취임식에 김기식(사진 오른쪽)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4월 2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취임식에 김기식(사진 오른쪽)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3월 30일 김기식 전 국회의원이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권을 가진 금융감독원장으로 내정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금융 당국과 업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특혜 채용 의혹으로 물러난 최흥식 전 금감원장이 하나금융지주 사장(민간) 출신으로 원장에 취임했을 때도 마뜩지 않아 했던 금융 당국은 시민단체·정치인 출신 원장이 지명되자 불만을 넘어 당혹스러운 모습이다. 1999년 금감원이 출범한 이후 금감원장은 주로 경제부처 출신 전문가들이 맡아 왔다.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한 김 원장은 1994년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참여연대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사무처장과 정책위원장을 지냈다. 2012년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에 입성해 금융위원회와 금감원을 소관하는 정무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금감원장 취임 직전에는 더미래연구소장으로 문재인 정부 금융정책의 밑그림을 그렸다.

이런 이력 때문에 김 원장이 참여연대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의 경제·금융정책을 이끌고 있는 장하성(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공정거래위원장)와 함께 ‘재벌 개혁’ 선두에 서게 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금융정책을 총괄하며 금감원과 손발을 맞추는 금융위원회의 공무원 A씨는 김 신임 원장을 두고 “저승사자가 온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김 원장이 정무위에서 활동하던 2014년, 공무원들의 외부 강연 관행에 직격탄을 날렸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당시 김 원장은 “금융위 한 과장이 많게는 한 달에 세 번, 한 번에 40만원씩 받으며 한 해에만 총 11번의 강연료 수입을 올렸다”면서 외부 강연 횟수가 많은 부서를 일일이 비판했다. A씨는 “업무 시간에 외부 강연에 나가면서 월급도 받고 강연료도 챙겼다고 지적하는 통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19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기식 원장은 당시 금융위·금감원을 소관하는 정무위에서 활동하며 ‘저격수’로 불렸다. 사진 조선일보 DB
19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기식 원장은 당시 금융위·금감원을 소관하는 정무위에서 활동하며 ‘저격수’로 불렸다. 사진 조선일보 DB

금융사, 규제 문턱 다시 높아질까 불안

김 원장은 4월 2일 서울 여의도 금감원에서 취임식을 열고 공식 임기를 시작했다. 취임식 직후 기자실을 찾아 “그동안은 참여연대나 야당 의원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했고, 이제는 금감원장이라는 위치에 맞는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금융 당국과 금융사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 왔던 김 원장의 전력에 따른 우려를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사들은 그간 규제 문턱을 낮춰 왔던 금융 당국이 자칫 규제를 강화하는 게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김 원장이 취임 이후 기자들과 만나 “제가 일방적인 ‘규제 강화론자’로 잘못 알려져 있다”며 “국회 정무위 시절 자본시장과 관련된 규제를 상당히 많이 풀었다”고 해명할 정도다.

자본시장 업계에서는 김 원장 발언으로 더 혼란스럽다는 반응도 나온다. 한 증권사 임원 B씨는 “김 원장은 국회의원 시절 자본시장을 서민 피를 빨아먹는 ‘적폐 세력’이라고 규정했었는데, 더미래연구소장으로 가서는 한국 금융산업의 발전은 자본시장을 육성하는 길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취지의 칼럼을 썼다”며 “김 원장의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 당국 수장들의 만남. 김기식(사진 왼쪽) 금감원장이 최종구 금융위원장과 만나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사진 금융위
금융 당국 수장들의 만남. 김기식(사진 왼쪽) 금감원장이 최종구 금융위원장과 만나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사진 금융위

금융 소비자 보호를 강조한 것을 두고는 기대와 우려가 나온다. 김 원장은 취임사에서 “그동안 금감원이 ‘금융회사’와 ‘금융회사의 건전성 유지’를 우위에 둔 채 ‘금융 소비자 보호’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며 “금감원 본연의 역할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감원 관계자 C씨는 “취임사에서 밝힌 것처럼 그간 경제관료가 이끌었던 금감원에서는 소비자 보호가 등한시돼 왔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를 개선할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실제 김 원장이 2016년 5월 19대 국회의원 생활을 마감하며 발간한 ‘정무위원회 소관 부처 19대 국회 주요 성과 및 20대 국회 제언’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금융감독기구가 금융회사의 건전성 감독에 치중하면서 금융회사의 영업행위에 대한 규제, 즉 금융 소비자 보호를 소홀히 하는 것이 특히 큰 문제”라면서 “금융소비자보호법 제정을 통해 금융 소비자에게 손해 발생 시 최소한 설명의무 이행 사실은 금융회사가 입증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보고서에는 카드사가 연간 수천억원대 이익을 내면서 카드론을 통해 20% 후반의 고금리를 챙기고 있는 것을 지적하며, 카드론 최고 이자율을 10%대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금융사 이익보다는 금융 소비자 이익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금융사들은 ‘힘들어질 것’이란 반응이 우세하다. 은행 임원 D씨는 “아무래도 김 원장이 정치인 출신이고, 언젠가 다시 돌아갈 사람인 만큼 (성과를 내기 위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혁신을 추진할 것이다. 금융사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보험사 임원 E씨는 “금감원이 (불만) 민원 처리를 두고 금융사가 모든 것을 책임지라는 입장을 견지할 가능성이 클 것 같다”면서 “금융사의 준법경영, 소비자 보호 관련 부서 담당 직원들의 고충이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재밌는 것은 금감원 노동조합 반응이다. 금감원장 부임 때마다 반대 의사를 밝혀 왔던 금감원 노조는 이례적으로 ‘이제, 정치인 김기식은 잊어라!’는 사실상 환영 성명을 냈다. 노조는 “최근 10년간 금감원은 금융위의 손발로 전락했다”면서 “금감원 기능 회복을 위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치인 출신으로 미국 CFPB를 이끌고 있는 믹 멀베이니(왼쪽) 백악관 예산관리국장과 정통 뱅커인 앤드루 베일리 영국 FCA 청장. 사진 블룸버그
정치인 출신으로 미국 CFPB를 이끌고 있는 믹 멀베이니(왼쪽) 백악관 예산관리국장과 정통 뱅커인 앤드루 베일리 영국 FCA 청장. 사진 블룸버그

김 원장은 취임사에서 첫 번째 과제로 금감원의 정체성을 바로하겠다고 밝혔다. 김 원장은 “정책기관(금융위)과 감독기관(금감원)의 역할은 분명히 다르다”며 “기본 방향에서는 같이 가면서도 금융감독의 원칙이 정치적, 정책적 고려에 의해 왜곡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위가 정치·정책적 고려를 할 때 금감원이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혼연일체(渾然一體)’ ‘한 몸’이라는 단어를 쓰며 금융위와 금감원의 일체감을 강조해 왔던 기존 금융 당국 수장들과는 다른 행보다. 금감원 관계자 C씨는 “관료 출신이던 진웅섭 금감원장 시절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표현”이라며 “금감원이 더 이상 금융위에 끌려다니지 않고 제자리를 찾아가게 될 것이란 기대감이 크다”고 전했다.

경제 관료 출신 전임 금감원장들에 비해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내부적으로는 너그러운 분위기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 F씨는 “취임을 앞두고 부서 업무 보고를 했는데, 김 원장이 정무위 출신이고 금융 현안을 이미 상당 부분 파악하고 있어 주로 주요 내용에 대한 질의응답을 했다”고 설명했다. 

금감원은 올해 금융투자업계 업무 전반을 들여다보는 종합검사를 예고하고 있다. 금감원은 종합검사 폐지 이후 불완전판매 등 리스크 우려가 있을 때만 테마 검사를 진행했었으나 이에 따른 대형 피검기관들의 부담감이 커진다는 이유에서 부분적으로 종합검사를 부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태성 금감원 자산운용검사국 국장은 “연간 5~6개 증권사와 자산운용사에 대한 종합검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 증권사 관계자 G씨는 “김기식 금감원장하의 종합검사는 아무래도 탈탈 터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 싶다”며 “부담감이 더 커졌다는 게 금투 업계 반응”이라고 전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은 시스템 리스크 예방과 금융 소비자 보호 강화를 위해 금융감독 체계를 대폭 개편했다. 미국, 영국, 독일, 호주 등에서는 금융정책과 금융감독 기능을 세밀하게 분리해 각 업무를 별도 기관이 수행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일본은 금융정책과 금융감독 기능을 단일 기구인 금융성이 수행하고 있다.


영국 런던 ‘제2의 금융가’로 불리는 카나리 워프에 있는 FCA. 사진 블룸버그
영국 런던 ‘제2의 금융가’로 불리는 카나리 워프에 있는 FCA. 사진 블룸버그

美도 정치인이 수장…전문가가 이끄는 英

2011년 미국에서는 소비자금융보호청(CFPB)이라는 막강한 금융감독기관이 신설됐다.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거대 금융사들의 부실과 도덕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를 시정할 감독기관 설치가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당선 이후 CFPB 설립에 기여한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를 초대 청장으로 지명했다.

워런 교수는 은행·보험사 등이 소비자에게 복잡한 계약서를 내밀고 책임을 덮어씌우는 식으로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한 ‘월가의 저격수’다. 워런은 CFPB 출범을 앞두고 JP모건과 골드만삭스 등에 감독 직원을 파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개혁안을 마련했는데, 월가에서는 ‘워런이 초법적 괴물 조직을 만들고 있다’고 맞섰다. 공화당 의원들도 오바마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CFPB에 청장 대신 5인의 이사를 둬 권력을 분산시키는 식으로 견제장치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하며 워런 지명을 철회할 것을 압박했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은 정치색이 거의 없는 오하이오주 검찰총장 출신 리처드 코드래이(Richard Cordray)를 초대 청장으로 임명했다. 코드래이 후임은 믹 멀베이니(Mick Mulvaney) 백악관 예산관리국장(겸임)이 맡고 있다. 그는 2015년 1월 출범한 공화당 내 초강경파 하원 모임인 ‘프리덤 코커스(Freedom Caucus)’를 주도적으로 만들다.

영국은 경제관료들이 금융감독 수장을 이끌고 있다. 영국은 통합 금융감독 기능을 수행하는 금융감독청(FSA)이 2013년 4월부터 소비자 보호 및 금융사 영업 행위를 감독하는 ‘금융행위감독청(FCA)’과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감독하는 ‘건전성감독청(PRA)’으로 분리·강화됐다. 앤드루 베일리(Andrew Bailey) FCA 청장은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 부총재 겸 PRA 청장을 거친 ‘뱅커’다. 베일리의 뒤를 이어 현재 PRA를 이끌고 있는 샘 우즈(Sam Woods) 청장은 영국 부실채권 정리기구인 금융투자공사(UKFI), 은행독립위원회 등에서 근무해 왔다.


▒ 김기식
서울대 인류학과, 참여연대 사무처장·정책위원장, 제19대 국회의원, 국회 정무위 위원, 더미래연구소장


Plus Point

文 정부 경제·금융 핵심 포진한 ‘참여연대’ 3인조
재벌 개혁 삼각편대…고강도 개혁 가속화

왼쪽부터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김기식 금감원장. 사진 조선일보 DB
왼쪽부터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김기식 금감원장. 사진 조선일보 DB

김기식 금감원장이 임명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발탁한 참여연대 출신 고위 공직자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 참여연대 출신인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포진하고 있어 문 정부의 재벌 개혁 ‘트로이카(삼두마차)’가 완성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5월 김상조 당시 한성대 교수를 ‘경제 검찰’이라 불리는 공정위원장에 내정했을 때 재계에서는 ‘날벼락이 떨어졌다’고들 했다. 김기식 원장 내정 때와 맞먹는 충격이었다.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과 경제개혁센터 소장을 지낸 김상조 원장이 비주류 ‘재벌 저격수’로 통했기 때문이었다.

참여연대는 1994년 10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감시하고, 사회 개혁을 위해 구체적인 정책과 대안을 제시하는 이른바 ‘참여민주사회’를 구현할 목적으로 창립된 시민단체다. 출범 당시에는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약칭 시민연대)’였다가 1999년 2월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됐다.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1998년부터 정부로부터 일절 지원받지 않고, 회원의 회비와 시민들의 소액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2004년부터는 유엔(UN)의 공식적인 시민사회파트너 자격으로 활동 중이다. 부패 정치인 낙천·낙선운동부터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반대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대표적인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재벌 개혁을 위한 소액주주운동 등을 하고 있다. 특히 장하성 실장은 참여연대 시절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소액주주운동을 주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대기업 계열사 주식을 가진 소액주주와 연대해 주주총회에서 경영진을 질타했다.

소액주주운동은 스튜어드십 코드(기관 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로 확대될 전망이다. 문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재벌 개혁 수단으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주주 의결권을 확대하고,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겠다”고 강조했다. 소액주주만 목소리를 낼 것이 아니라 그동안 거수기에 불과했던 기관 투자자들도 적극적으로 기업들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고 정보를 요구하라는 주문이다. 장하성-김기식 라인이 구축된 상황에서 금융투자업계도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