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랩의 공동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인 안소니 탄은 현대차,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과 계속해서 협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블룸버그

올해 1월 현대자동차그룹이 그랩(Grab)에 수백억원대의 투자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랩은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차량공유 업체로 ‘동남아의 우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버조차 자리잡지 못하고 쫓겨난 한국에서 그랩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이번에는 삼성전자가 그랩과 전략적 제휴(MOU)를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랩이 운용하는 택시와 운전자들에게 삼성전자의 최신 디바이스와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나서 3월에는 SK그룹이 이사회를 열고 그랩에 지분을 투자하기로 했다. 그랩이 진행하고 있는 20억달러 규모의 투자 유치에 중국 디디추싱, 일본 소프트뱅크와 함께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하기로 했다는 발표였다. 석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전자, 현대차그룹, SK그룹이 모두 그랩과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그사이 그랩은 동남아 차량공유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우버의 동남아 사업을 아예 인수해버렸다. 우버는 동남아 시장에서 철수하는 대신 그랩 주식 27.5%를 받기로 했다. 동남아 차량공유 시장을 평정한 그랩은 이제 모빌리티(이동수단)를 넘어 일상의 모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모바일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있다. 동남아 시장에 진출하려는 글로벌 기업들에 그랩과의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셈이다.

그랩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동기인 안소니 탄(Anthony Tan)과 탄 후이 링(Tan Hooi Ling)이 2012년 공동 창업했다. 그중에서도 안소니 탄은 할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했기 때문에 택시를 비롯한 모빌리티 산업의 변화와 혁신에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코노미조선’은 우버의 동남아 사업 인수로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안소니 탄 그랩 공동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랩은 우버를 인수하면서 동남아 최대 차량공유 업체가 됐다. / 블룸버그

최근 한국 대기업과의 투자와 협력이 이어지고 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우리의 투자자인 동시에 비즈니스 파트너인 현대차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그랩의 목표는 동남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기차 운용 업체가 되는 것이다. 현재 동남아에서 전기차 도입은 미미한 편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남아 전기차 시장의 잠재력이 크다고 본다. 전기차는 환경 오염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 유지·관리 비용을 대폭 낮출 수 있기 때문에 운전자의 소득을 높여주고, 승객 입장에서는 더 저렴하게 차량공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 현대차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완벽한 파트너다. 현대차는 전기차나 자율주행차 같은 친환경차 산업에서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현대차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서비스 경쟁력은 그랩을 이용하는 운전자나 승객에게 큰 이점이 될 것이다.”

이번 협력으로 현대차는 동남아 전기차 시장에 진출할 수 있지만, 그랩은 어떤 이득을 얻는 건지 궁금하다.
“단순히 차량공유 시장의 점유율을 높이는 게 우리의 목표는 아니다. 우리는 모든 소득 계층의 사람들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모빌리티 옵션을 갖춰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여러 파트너와 협력해야 한다. 전기차 분야에서 현대차와 협력하고, 자율주행차 분야에서 미국의 누토노미(nuTonomy), 중국의 바이두와 협력하는 것이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여러 파트너와 협력을 해나가면 그랩이 전체 모빌리티 산업의 가치 사슬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을 높일 수 있다. 전기차를 예로 들면 단순히 전기차를 많이 운용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전기차 운용 규모가 커지면 전기차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충전소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랩이 동남아의 전기차 충전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자율주행차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은 동남아 주요 도시의 도로 인프라가 좋지 않고, 관련 제도도 미비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자율주행차가 현실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율주행 기술이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자율주행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랩이 동남아 여러 도시의 모빌리티 데이터를 많이 축적할 수 있게 되고, 그랩이 제공하는 각종 교통 정보의 정확도가 높아질 것이다.”

삼성전자와의 협력은 어떻게 진행되나.
“삼성전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전자회사 중 하나다. 그랩은 더 많은 동남아 사람들을 디지털 경제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삼성전자의 기술 노하우가 여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일단 우리는 270만 명이 넘는 그랩 운전자들이 삼성전자의 고품질 모바일 기기에 접근하기 쉽게 만들려고 한다. 그랩의 운전자 한 명 한 명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마이크로 사업자로 만드는 게 목표다. 미얀마에서는 이미 1400명의 운전자들이 삼성전자와의 협력으로 혜택을 누리고 있다. 또 그랩의 공유 차량에 삼성전자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차량을 이용하는 고객이 다양한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현재 싱가포르에서 시범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하는데, 올해 안에 동남아 전체로 확대할 생각이다.”

지난 3월 우버의 동남아 사업을 인수했다. 차량공유의 원조를 물리친 격이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나.
“세 가지 비결이 있다. 우선 그랩은 동남아에서 가장 다양한 모빌리티 옵션을 제공하는 차량공유 서비스다. 택시와 개인용 차량뿐만 아니라 오토바이, 릭샤(인력거)까지 그랩에서 이용할 수 있다. 지난 3월에는 싱가포르에서 공유 자전거 서비스인 그랩사이클을 론칭했다. 그랩 앱 하나로 다양한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다양한 가격대의 서비스를 제공한 게 첫 번째 성공 비결이다. 두 번째 성공 비결은 정부나 대중교통 업체들과 협력적인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랩은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거나 새로운 지역에 진출할 때 호전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 우리는 각 도시의 교통 인프라와 도로 안전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협력적인 관계를 맺은 덕분에 동남아 지역에서는 그랩이 단기적인 이익이 아닌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걸 알아준다.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협력 덕분에 가능했다. 마지막 비결은 이용자의 편의성을 높인 점이다. 우리가 서비스를 시작했던 말레이시아에서는 택시를 이용하는 게 매우 불편했다. 택시 운전자들은 충분한 돈을 벌지 못했고, 택시 승객들은 불편한 데다 여성들의 경우는 안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택시 이용을 꺼렸다. 우리가 택시 호출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이런 불편함이 사라질 수 있었다. 동남아는 다양한 언어를 쓰는 지역인데, 우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앱에 번역 기능을 넣었다. 이런 부분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동남아 최대 차량공유 업체가 됐다.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일단 우버의 차량공유 서비스와 음식 배달 서비스를 그랩에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그랩이 동남아 최대 규모의 O2O(온·오프라인 연계 사업) 모바일 플랫폼이 된다. 이제 그랩은 단순한 택시 호출 서비스라고 볼 수 없다. 동남아 소비자들에게 일상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요한 플랫폼이 된 것이다. 출퇴근하고, 먹고, 쇼핑하고, 쇼핑한 것을 배달하고, 요금을 지불하는 것까지 모든 서비스를 그랩을 통해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랩을 이용하는 운전자와 파트너들은 우리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들과 연결되고, 거기에서 수익을 낼 수 있게 된다. 현재 그랩은 동남아 모빌리티 인프라의 중심에 서 있지만, 우리가 성장할수록 동남아 소비자 인프라의 중심으로 자리를 옮겨갈 것이다.”


싱가포르에 있는 그랩 본사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고객들과 상담하고 있다. / 블룸버그

금융 서비스를 늘리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
“맞다. 우리는 강력한 결제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랩은 동남아 8개국, 196개 도시에서 9000만 명이 이용하는 서비스다. 하루에 그랩 앱을 이용하는 횟수만 400만 번에 달한다. 싱가포르의 경우 그랩 이용자의 75%가 교통비를 지불하기 위해 매일 그랩의 결제 시스템인 ‘그랩페이(GrabPay)’를 이용하고 있다. 그랩이 성장하면서 그랩페이는 교통 분야 외에 식음료(F&B)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최근에는 ‘그랩파이낸셜’이라는 금융 서비스도 론칭했다. 그랩파이낸셜은 그랩 운전자들에게 소액 융자와 보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목적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운전자 데이터를 활용해 어떤 금융 상품을 제공할지, 이자율과 프리미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등을 분석할 수 있다.”

동남아는 신용카드 보급률이 낮고,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이 많다. 그랩의 금융 서비스가 대안이 될 수 있나.
“그랩이 제공하는 결제 시스템과 금융 서비스는 은행 계좌가 없는 동남아 사람들까지도 디지털 경제에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다. 그랩을 활용하면 은행 시스템의 신용거래 기록이 없는 사람들도 융자와 보험 같은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랩을 이용하는 운전자나 소상공인들은 그들의 사업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고, 소비자들은 더 안전하고 쉽게 결제할 수 있게 된다.”

기업공개 계획은 없나.
“지난 5년간 우리는 40억달러 이상을 투자받았다. 물론 그랩과 파트너 모두에게 전략적 이득이 생기는 파트너십이라면 언제든지 열려 있다. 기업공개(IPO)는 지금 당장 우리가 고민하는 부분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연결해주는 일상적인 소비자 플랫폼을 만들려고 한다.”

동남아 외에 다른 지역으로의 진출 계획은.
“우리는 동남아에 집중하고 있다. 모빌리티 분야에서 선두 자리를 지키고, 금융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남아 시장은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차량공유 서비스의 관점에서만 봐도 그렇다. 동남아는 세계에서 자동차 보급률이 가장 낮은 지역 중 하나다. 인구 1000명당 미국은 574대, 중국은 103대의 자동차가 있는 데 비해 동남아에는 70대의 자동차밖에 없다. 시장이 커질수록 그랩이 해야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우리는 동남아 시장에서도 이제 막 출발선에 섰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동남아 외에 한국을 포함해 다른 지역으로 진출할 계획이 전혀 없다.”


▒ 안소니 탄(Anthony Tan)
시카고대 경제학·공공정책학과,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말레이시아 탄총그룹 서플라이체인&마케팅 총괄


Plus Point

‘제2의 중국’ 동남아 IT 시장


인도네시아 전자상거래 업체인 토코피디아 본사에서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 블룸버그

우버가 철수하면서 동남아 차량공유 시장은 그랩과 고젝의 2파전으로 좁혀졌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 뿌리를 둔 그랩과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성장한 고젝은 동남아 O2O(온·오프라인 연계 사업) 플랫폼의 맹주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당장은 그랩이 앞서 있지만 고젝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다.

소프트뱅크와 디디추싱(滴滴出行), 현대차그룹 등이 그랩의 주요 투자자로 나섰고, 고젝은 구글과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으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그랩과 고젝의 기업가치는 각각 60억달러, 50억달러로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동남아가 정보기술(IT) 스타트업의 새로운 둥지가 되고 있다. 그랩, 고젝 같은 차량공유 업체 외에도 전자상거래 업체인 토코피디아, 라자다 등이 동남아의 대표적인 유니콘이다. 동남아는 지역 전체 인구가 6억 명을 넘는 데다, 경제도 중국이나 인도 못지않게 빨리 성장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지역의 2018~2022년 연평균 성장률이 5.2%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성장 속도만 빠른 게 아니다. 동남아 지역의 각국 정부는 IT 산업 육성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싱가포르는 혁신을 통한 산업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45억싱가포르달러(약 3조6000억원) 규모의 ‘산업변환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태국은 스타트업 육성을 중점으로 하는 ‘태국 4.0’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인도네시아는 지난해 전자상거래 3개년 개발 계획을 세우고 온라인 시장에 대한 세금 감면, 규제 완화 등의 정책을 쏟아내는 중이다.

여기에 더해 동남아 특유의 높은 휴대전화 보급률도 IT 서비스 확산에 도움을 줬다. 선진국에 비해 롱텀에볼루션(LTE) 보급률은 낮지만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가 휴대전화 보급률 100%를 넘을 정도로 모바일 문화에 익숙하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은 “동남아의 경우 스마트폰이 사회적 교류에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며 “동남아 사람들이 하루에 소셜미디어나 메시징 앱을 사용하는 시간이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평균적으로 40분 정도 길다”고 설명했다.

IT 스타트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육성하는 정부의 의지에 모바일 친화적인 6억 인구의 거대 시장이 더해지면서 동남아 IT 스타트업이 급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 차례 벤처붐이 휩쓸고 지나간 중국의 IT 대기업이나 소프트뱅크 같은 글로벌 투자사들이 동남아를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장정보 업체인 CB인사이츠에 따르면 동남아 지역에서 이뤄진 IT 분야 M&A 규모는 2012년 2억8100만달러에서 지난해 90억2600만달러로 5년 만에 30배 이상 급증했다.

이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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