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곤 전 회장의 구금 기간이 매우 길어지고 있고 여건도 상당히 가혹합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월 27일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연합체) 회장의 구속을 언급하며 일본 정부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마크롱 대통령은 “우리가 기대하는 최소한의 품위를 (프랑스 국민인 곤이 구속상태에서) 지킬 수 있을지도 우려된다”고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연 기자회견에서였다. 20명이 넘는 사절단을 대동하고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였지만 그의 관심은 이집트가 아니라 일본 정부였다. 짙푸른 양복을 입은 마크롱 대통령은 기자회견 내내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국빈방문 자리에서 제3국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외교적 결례다.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이 이를 개의치 않은 것 자체가 일본 아베 정부에 대한 그의 분노를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국내의 한 국제경제 전문가는 “마크롱 대통령이 이집트까지 가서 일본 정부의 카를로스 곤 전 회장의 장기간 구속을 비판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라면서 “프랑스에서는 자국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행정부는 물론 언론, 사법 당국까지 똘똘 뭉쳐 있는 일본 특유의 패거리 의식이 이번 사태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프랑스 정부가 곤의 구속에 격분하는 이유를 살펴봤다.
1│프랑스 요인들 초청해 기념행사 열어놓고 몰래 체포
프랑스 정부가 격분하는 데는 이번 사태의 진행 과정에서 일본 측이 보여준 태도가 한몫했다. 비신사적인 행위가 도를 넘어, 프랑스 정부와 재계를 심하게 모욕했다는 것이다.
곤이 체포된 지난해 11월 19일은 도쿄에 있는 주(駐)일본 프랑스 상공회의소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날이었다. 일본 경제의 중심지인 도쿄 오테마치에 있는 닛케이홀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파니엘 나셰 프랑스 경제산업부 부장관과 루이 슈웨체르 르노 명예회장 등 프랑스와 일본 정‧재계 인사 800여 명이 집결했다. 일본과 프랑스 기업들의 100년간의 협력관계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프랑스 사절단 중 누구도 곤의 체포를 사전에 안 사람은 없었다.
기념행사가 한창 진행되던 이날 오후 4시 35분, 도쿄 하네다공항 활주로에 비행기 한 대가 착륙했다. 곤을 태운 닛산 전용기였다. 그런데 비행기가 멈추고 곤이 내리기도 전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도쿄지검 특수부 직원 4~5명이 기내로 진입해 곤을 체포했다. 그들은 곤을 잡기 위해 몇 시간 전부터 잠복하고 있었다.
곤이 체포되던 시간에 다른 특수부 요원들은 곤의 도쿄 미나토구 자택과 요코하마 닛산자동차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자택에는 곤을 기다리던 딸이 있었다.
곤의 체포를 미리 알았던 프랑스인은 없었다. 프랑스 정보 당국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뒤늦게 곤의 체포 사실을 알게 된 슈웨체르 명예회장은 망연자실했다. 행사를 주관했던 주일 프랑스 대사도 그제서야 본국에 곤의 체포 사실을 급히 알리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곤이 전용기를 타고 하네다공항에 내린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은 곤이 능력을 인정해 발탁한 사이카와 히로토 닛산 사장이었다. 그는 곤의 심복으로 불렸지만 이번 체포에 적극 협조했고 곤이 체포된 날 밤 10시에 기자회견을 열고 “한 사람에게 권한이 너무 집중됐다. (이 사건은) 긴 세월에 이르는 곤의 통치가 낳은 어두운 측면”이라며 곤을 맹비난했다.
곤의 구속 과정에서 일본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법원은 즉각 발부했다. 일본의 거의 모든 언론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곤을 ‘불법으로 사익을 편취한 경영인’으로 몰았다. 닛산자동차와 미쓰비시자동차는 곤이 체포된 직후 이사회를 열어 곤을 해임했다.
2│혐의 입증 안 됐는데도 곤 장기 구속…닛산을 ‘일본 품’으로 되돌리겠다는 의도
일본 정부가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음에도 곤을 오랫동안 구속한 이유는 프랑스에 일본 자동차 회사를 빼앗길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라는 게 업계 분석이다.
현재 르노와 닛산은 서로 지분을 교환해 갖고 있지만 르노는 닛산의 경영진을 임명할 수 있고 지분 의결권도 보유한 상태다. 반면 닛산은 르노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의결권과 지배권이 없다. 또 르노와 닛산은 공동으로 미쓰비시 주식 34%를 인수해 최대 주주다.
곤은 체포 직전까지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르노와 닛산을 합병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닛산은 물론 미쓰비시까지 프랑스 정부가 최대 주주인 르노그룹 차지가 되는 셈이다.
혐의가 정확하게 입증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 그것도 다른 국적의 인물을 체포해 인신구속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기업 법률문제(컴플라이언스) 전문가조차 곤이 구속될 만한 혐의인지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인인 도쿄지검 출신의 고하라 노부오(郷原 信郎) 변호사는 “(일본 검찰이 주장하는 혐의는) 곤이 퇴임 후 받기로 한 보수를 기재하지 않은 것”이라며 “이것이 범죄가 되는지 의문”이라고 곤의 구속을 비판했다.
3│佛·日, 외교 갈등 계속될 듯
곤의 구속은 프랑스와 일본 사이에 계속 악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의 한 축인 르노는 프랑스 정부가 최대 주주(지분 15%)이고 마크롱 대통령은 경제부 장관이던 2015년부터 르노가 닛산을 자회사화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합병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문해 왔다. 현재는 서로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얼라이언스 관계이지만 르노가 아예 닛산을 지배해야 한다는 게 마크롱 대통령의 입장이다.
프랑스 언론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계속해서 비판적인 보도를 하고 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이번 사태에 대해 “곤 회장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프랑스의 경제지 레제코는 더 나아가 곤이 체포되는 것을 방조한 사이카와 히로토 닛산 사장을 카이사르를 배반한 브루투스에 비유했다. 프랑스 언론들은 일본 민관이 조직적으로 닛산 내의 프랑스 영향력을 없애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닛산 같은 글로벌 기업에 대해 일본 정부가 저렇게까지 나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양국 간의 자동차 산업 구조 재편 과정에서 힘겨루기의 일환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신상협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곤 회장의 구속을 둘러싼 양국 간의 갈등에 대해 “자동차 산업을 놓고 벌이는 양국 간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구속이 적합한지에 대한) 명분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