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미 워싱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국제문제연구소장, 미국학연구소장, 서울대 명예교수 / 사진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미 워싱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국제문제연구소장, 미국학연구소장, 서울대 명예교수 / 사진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2차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더라도 미·북의 진정성은 여전히 상대방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완전 비핵화를 위한 3차 회담의 발판을 마련하기 어렵다(2019년 1월 3일 자 동아시아연구원 논평).

하영선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의 우려 섞인 지난 1월 예상은 적중했다. 북한이 영변이라는 과거 핵 시설만 부분적으로 신고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받으려 한다는 점, 북한의 ‘조선 반도 비핵화’와 미국의 ‘북한 비핵화’의 인식 차이가 해소되지 않는 한 미국은 북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등은 결렬로 끝난 하노이 회담을 예상하는 글이 아니라 복기하는 글처럼 읽힌다.

“미국과 북한의 서로 다른 계산법이 수렴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하노이 회담의 ‘최대 성과’입니다. 한국은 중재자보다 내비게이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미국과 북한이 믿고 따라가는 길잡이가 되면, 역설적으로 ‘뇌 기능’을 하는 것이고요.”

3월 25일 서울 을지로 동아시아연구원에서 만난 하 이사장은 한반도 비핵화 해법을 찾으려면, 우선 정부가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도 ‘읽고 싶은 대로 읽는’ 탓에 하노이 회담 결렬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설명이었다.

한·미 정상회담 직후인 4월 12일 전화 인터뷰에서도 하 이사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 정부의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충분히 훌륭한 거래)’과 미국의 ‘빅딜(big deal)’ 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자리가 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랫동안 외교 분야를 연구한 학자는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했고 우회적인 표현을 쓰는 언어 습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위기 인식까지 감추지는 않았다. 그는 한국 상황을 ‘고도(孤島·외딴섬)’에 비유하기도 했다.

하 이사장은 “1895년 청·일 전쟁이 끝나자 조선의 지식인은 청으로부터 독립할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조선은 15년 후 망했다”면서 “지금 구한말과 같은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 재편의 대응 전략 마련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스스로 고립 됐지만, 우리는 의도치 않게 고립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동아시아연구원은 한·미·중·일 등 4개국에서 나오는 북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수집하는 글로벌노스코리아(https://www.globalnk.org)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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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북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로 막을 내렸다.
“하노이 회담은 ‘북한식 계산법’과 ‘미국식 계산법’이 수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이건 하노이 회담이 거둔 최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 영변 핵 시설의 영구적 해체를 완전한 비핵화 조치라고 보지 않았다. 영변 해체가 대북 제재를 해제해주는 대가가 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다만,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를 선택한다면, 경제 대국의 길을 모색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미국식 계산법에 시종일관 불만을 제기했다. 최근엔 미국의 이상한 계산법은 강도 같다고 말했다. ‘북한식 계산법’은 뭔가.
“김정은은 3단계의 북핵 협상 방안을 추진했다고 판단된다. 1단계는 미국과 신뢰 구축 단계로서 풍계리 핵실험장과 동창리 엔진 실험실 및 미사일 발사대를 선제적으로 자진 폐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은 한·미 연합훈련의 중단을 유도했다. 2단계는 영변 핵 시설을 영구 폐기하는 대신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체제 보장을 위한 대북 적대 정책 종식과 경제 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김정은이 하노이에 간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3단계에서는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관점에서 한반도와 주변 지역을 포함한 핵군축 회담을 제안하는 것이다.”

북한이 다시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에 나설까. 4월 10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자력갱생’이라는 말을 25번이나 썼다.
“위험 부담을 갖고 예측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의 ‘빅딜(완전한 비핵화)’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김정일 시대처럼 핵과 미사일 실험으로 고립되는 것도 원치 않을 것이다. 포스트 하노이 국면에서 북한은 최소 수준의 핵을 보유하면서 제재 완화와 경제 지원, 더 나아가 체제 보장까지 얻을 묘안을 짜느라 밤잠을 못 자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왜 조선반도 비핵화를 주장하나.
“북한은 ‘최소 억지’로서의 핵까지 포기하려면, 조선반도 전체가 비핵화돼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조선반도 비핵화는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전략 자산과 핵우산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는 자산의 철수까지 포함한다. 이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체 전략을 흔드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북한은 사실상 미국이 들어줄 수 없는 개념을 내세워 자신들도 ‘최소 억지’로서의 핵은 포기할 뜻이 없다고 밝힌 것이다. ‘최소 억지’로서의 핵을 포기하는 것은 북한 내에서 논의조차 안 된 듯하다. 최고 존엄인 김정은이 나서지 않는 이상 목숨을 내놓고 이를 언급할 분위기는 아닐 것이다.”

하 이사장은 2018년 12월 20일 자 조선중앙통신의 ‘낡은 길에서 장벽에 부딪히기보다 새 길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는 논평에 주목한다. 북한이 말하는 완전한 비핵화 개념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 이 논평은 “조선반도 비핵화는 북과 남의 영역 안에서뿐만 아니라 조선반도를 겨냥하고 있는 주변으로부터의 모든 핵 위협 요인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미국은 중국이라는 후견인이 있는 북한을 거칠게 다룰 수 없다며 북핵 협상은 엄청난 시간 낭비라고 했다. 심지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남한)는 어떻게 되라는 의미인가. 또 북한도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제재는 풀리지 않고 ‘제2의 고난의 행군’을 맞게 된다. 일종의 식물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북한과 미국이 새로운 안을 갖고 3차 정상회담을 하는 게 맞다. 북한도 미국도 새 안을 만들어야 하고 우리도 양쪽이 받아들일 새 안을 짜야 한다.”

11일 미국 워싱턴 D.C. 한·미 정상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제안한 ‘굿 이너프 딜’과 미국이 말하는 ‘빅딜’은 어떻게 다른가.
“희망적 사고로 읽으면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굿 이너프 딜’은 미·북이 포괄적 비핵화 방안에 합의하고 북한의 핵 폐기와 미국의 상응 조치를 단계적으로 이행하는 거래를 뜻한다. 하지만, 미국은 막연한 ‘합의’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겠다는 진정성 있는 첫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핵 폐기는 나중에 하더라도 포괄적인 핵 신고는 해야 빅딜로 받아들일 것이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려는 한국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그건 나중에 할 일이다. 카드를 아예 버리자는 게 아니라 상황을 잘 판단해 적절한 때에 써야 한다. 트럼프도 현재는 ‘빅딜’을 해야 할 시점이며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올바른 시점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 정부가 지금 금강산과 개성 카드를 던지면, 북도 전술적으로 처리하기 어렵고 미국도 우리를 불신하게 된다. 우리는 미·북 양쪽의 계산법을 제대로 읽어 바늘구멍만한 아주 작은 기회라도 찾아야 한다. ‘굿 이너프 딜’을 포함해 우리 정부가 낙관론에 기반해 준비한 계획을 모두 조정해야 한다.”

3차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려면.
“3차 미·북 정상회담의 성격은 1·2차와는 완전히 다르다. 합의할 수 없는데, 다시 만날 수는 없다. 이제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북한이 새롭게 완전한 비핵화 계산법을 만들도록 최대한 유도해야 한다. 동시에 북한이 매력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비핵화 방안(체제 보장과 번영 등을 포함)을 미국이 만들도록 협력해야 한다. 한·미의 지속적이고 긴밀한 공조 아래 북한을 설득하는 게 관건이다.”

미·북이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지점은.
“북한은 체제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억지(minimum deterrence)’를 포함해 모든 핵을 신고해야 한다. 물론 북한은 누구를 믿고 핵을 포기하냐며 수용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나는 북한을 안심시킬 만한 매우 복잡하고 다중적인 보험 시스템을 개발하자고 주장한다. 보험회사들도 위험도가 높은 보험의 경우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재보험을 들지 않나. 북한 체제 보장과 관련해 여러 보험을 만드는 것이다. 미국이 계약하고 이어 중국이 한 번 더 보장하고, 6자(남·북·미·중·일·러)와 유엔까지 참여하는 계약을 만드는 것이다. 북이 놀랄 정도의 성의를 보여주는 보험이 있어야 북한도 핵을 내려놓지 않겠나. 한국이 ‘보험장이’ 역할을 하면 북한이 믿어주지 않으니, 미국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미국이 중국을 끌어들이고 러시아·일본·유럽연합(EU)을 데리고 와야 한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 아버지 김정일과 달리 북한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억지’를 제외한 나머지 핵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김정은은 신뢰 조성과 상응 조치에 따라 현재와 미래에는 핵을 만들지 않겠다는 데 합의할 수 있으나, 북한 체제를 확실하게 담보하는 최소한의 억지 체제, 즉 과거 핵무기는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게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 선언에 나온 ‘비핵화’ 의미가 아니었나 한다(4·27 판문점 선언에는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북한이 완전하게 모든 핵을 폐기하기로 했다고 읽었다. 청와대는 ‘낙관론’ ‘비관론’ ‘신중론’을 모두 들을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성격의 태스크포스(TF) 3개를 운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국이 조정자,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나.
“우리의 ‘힘’을 고려할 때, 조정자 역할을 하기 쉽지 않다. 나는 한국이 내비게이터, 즉 길잡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이쪽으로 가면 ‘낭떠러지’, 저쪽으로 가면 ‘지름길’이라는 걸 정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갈 길을 모르는데 운전대를 잡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우리가 미국과 북한을 제대로 읽고 내비게이터 역할을 하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뇌 기능’을 하는 것이다. 제대로 길을 읽을 정도로 똑똑해지려면, 일종의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내가 길을 거꾸로 읽는 것은 아닌지 계속 의문을 제기해 봐야 한다.”

미·중이 무역전쟁을 벌이는 등 국제 질서도 급변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는 구한말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예상을 깨고 청나라를 물리쳤을 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과 일의 세력 균형으로 조선이 진정으로 독립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조선이 망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5년이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지역을 부르는 명칭도 변하고 있다. 냉전 질서 속에서는 ‘동북아’, 탈냉전 이후에는 ‘동아시아’, 근래에는 ‘아시아·태평양’을 쓰다가 최근에는 ‘인도·태평양(인·태)’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미국과 일본은 중국의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에 대항해 미국·일본·호주·인도를 묶는 ‘인·태’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미 국방부의 태평양 사령관의 명칭이 인도·태평양 사령관으로 바뀌었다.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들어갈 것인가, 중국이 짜는 질서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길을 마련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세 변화에는 둔감하다. ‘신북방’ ‘신남방’을 말하는데, 국제 질서 재편의 관점에서 보면 흘러간 옛 노래를 듣는 기분이다. 독자 생존은 북한식 모델이다. 그런데 우리도 양쪽 모두로부터 소외돼 북한의 길을 갈 수도 있다. 21세기 후반, 22세기 전반까지를 내다보고 미래 세대에 물려줄 외교 무대를 위해 지금 당장 전체의 판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많이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