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미국 컬럼비아대 정치학 박사,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 조교수, 외교안보연구원 조교수, 컬럼비아대, 일본 게이오대, 일본 고베대 객원교수 / 사진 이진한 기자
박철희
미국 컬럼비아대 정치학 박사,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 조교수, 외교안보연구원 조교수, 컬럼비아대, 일본 게이오대, 일본 고베대 객원교수 / 사진 이진한 기자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 국내 정치를 위해 한국을 활용한다는 시각도 있지요. 하지만 그렇게 활용당할 빌미를 준 것은 우리 정부입니다.”

4월 23일 만난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대일 외교 정책이 실패에 가깝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피해자 중심주의’로 과거사에 매달리다 보니, 한국은 일본을, 일본은 한국을 외교적으로 방치하는 상태까지 왔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국제적 기준과 보편적 접근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면서 “제주 관함식(국가 원수 등이 자기 나라 군함을 검열하는 것)에서 일본 군함의 욱일기 게양을 문제 삼거나 한국 정부가 만든 화해·치유재단을 스스로 해산시키는 것은 국제적 기준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가 ‘2019 외교청서’에서 한·일 관계가 한국 탓에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썼다. 지난해에는 외교청서에 명시했던 ‘미래지향적인 관계’라는 말을 올해는 뺐다.
“대(對)일본 외교는 ‘투트랙 전략’이 현명하다. ‘역사 인식’ 문제로 다투더라도 경제·방위 협력은 지속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사’ 문제를 대일 외교의 최전선에 놓으면 안 된다. 과거사라는 마차를 앞세우면, 뒤에 어떤 마차도 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정부의 화해·치유재단 해산 발표가 이어지자, 산케이신문은 한국을 전략적으로 방치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서슴없이 내보낸다. 요즘 일본의 외교·안보 전문가를 만나면, 한국 스스로 한 약속을 뒤집는 상항에서 누구와 약속해야 약속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악화한 한·일 관계의 영향이 있나.
“그동안 한·일이 공동 참여한, 10억달러 이상 규모의 해외 프로젝트가 40개가 넘는다. 양국 외교 갈등이 비즈니스에 영향을 줄까 우려스럽다. 한·일 관계 악화 탓에 일본 기업과 중국 기업이 손을 잡고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전력과 일본 마루베니(도쿄에 본사가 있는 대형 종합상사)가 참여하기로 한 요르단 발전소 사업에 한전이 빠지고 중국 기업이 참여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4월 23일 중국 국제 관함식에 해상자위대 호위함이 욱일기를 게양하고 참가했다.
“중·일 전쟁으로 1200만 명 이상의 중국인이 죽었다. 그런데도 중국이 욱일기 게양을 문제 삼지 않은 이유는 뭘까. 미·중 무역 전쟁 중인 중국은 ‘헤징(hedging·위험 분산)’ 차원에서 일본과의 친밀함을 극대화하고 있다. 지난해 제주 관함식에 욱일기 게양을 문제 삼았던 한국 정부는 민망하게 됐다. 중·일이 밀착함으로써 한국이 노골적으로 ‘패싱’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5000t급 호위함 스즈쓰키호가 지난달 21일 중국 산둥성 칭다오 앞바다에서 부두 정박을 준비하고 있다. 스즈쓰키호는 지난달 23일 중국 국제 관함식에서 욱일기를 내걸었다. 사진 AP 연합뉴스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5000t급 호위함 스즈쓰키호가 지난달 21일 중국 산둥성 칭다오 앞바다에서 부두 정박을 준비하고 있다. 스즈쓰키호는 지난달 23일 중국 국제 관함식에서 욱일기를 내걸었다. 사진 AP 연합뉴스

일본이 중국에 밀착하는 이유가 있나.
“일본과 중국은 전략적 경쟁 관계이기 때문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 틀린 말이 됐다. 지난해 10월 중·일이 7년 만에 정상회담을 했다. 두 나라가 느슨하게 손을 잡아 두는 것이다. 여기에는 트럼프 요인이 있다고 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일본에도 요구할 건 요구하는 스타일이다. 연간 676억달러(약 78조원)의 대일 상품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일본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도 밀어붙이고 있다. 트럼프는 부동산 사업자 특유의 협상전략으로 금기 사항까지 협상의 지렛대로 만들어 원하는 것을 얻지 않느냐.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한 아베도 어리둥절해할 정도다.”

2017년 미국은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통해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새 국제 전략을 공식화했다.
“인도양 및 태평양 지역과의 연대를 통해 중국의 급부상을 견제한다는 전략이다.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동아시아와 유럽을 장악하는 그림을 그렸고 미국은 일본·인도와 호주 등을 진주 목걸이 형태로 연결하는 인·태 그림으로 맞서고 있다. 일본 아베가 처음 인·태 전략을 발의했고 트럼프가 국제 전략으로 채택했다. 최근 만난 일본 외교·안보 전문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 미국은 동맹인 일본에 (돈을 대는) ‘회계사’ 역할을 주로 요구했는데, 최근에는 불(전쟁) 나면, 불도 같이 끄는 ‘소방수’ 역할까지 주문하고 있다고 하더라. 미·일 동맹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은 일대일로, 인·태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하나.
“미·중 경쟁 시대에 미국과 기축적인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중국·일본과 조화로운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전략이 있어야 한다. 한국은 ‘투명성’과 ‘공정함’을 내세우는 국제 질서에 동참하겠다는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 이 원칙에 따르는 게 인·태다. 한국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태 이후 중국 시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 의식이 생겨났다. 또, 중국의 지원을 받았다가 큰 이권을 빼앗긴 스리랑카·말레이시아·아프리카의 사례가 잇따르면서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한 경계심도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는 북한의 완전한 핵 포기를 뜻하는 ‘빅딜’을 고수한다.
“하노이 회담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북한은 비핵화 로드맵도 제시하지 않고, 영변 핵시설과 대북 제재 5개(석유 수입제한, 석탄·철광석 금수조치 등 경제제재들)를 완화하는 것을 맞바꾸려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사고는 치지 않을 테니, 사실상 핵 보유 국가로 남겠다는 뜻이다. 트럼프는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이 제시한 나쁜 거래(bad deal)를 받지 않았다. 제재 5개를 완화할 경우, 북한은 비핵화를 가속할 인센티브가 사라진다.”

북한과의 협상에서 지켜야 할 것은.
“경제적으로는 한국이 우위지만, 군사적으로는 핵을 개발한 북한이 명백하게 우위에 있다. 북한이 핵을 가진 이상, 북에 하나를 줄 경우 다른 하나를 반드시 북으로부터 얻어내는 ‘대칭적(symmetric) 상호주의’를 고수해야 한다. 비핵화 과정에서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 동맹’ 등은 협상의제에 올려서는 안 된다. 한·미 동맹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안보를 지켜야 한다. 북한이 미사일을 개발하면 우리도 미사일을 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