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6월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6월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한국 정부의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일본이 한국에 대한 무역 규제를 대폭 강화했다. 일본이 자체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27개 ‘화이트(백색) 국가’ 명단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한편, 세 가지 반도체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을 어렵게 하는 것이 골자다. 한국 통상 당국은 즉각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경제산업성 홈페이지 고시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우선 7월 1일부터 한국으로의 수출 관리 명단을 재검토하기 위해, ‘외국환관리법 수출무역 관리령 별표 제3국(화이트 국가)’ 명단에서 한국을 삭제하기 위한 개정에 대한 의견 모집 수속을 한다. 또 7월 4일부터 ①불화기판(스마트폰이나 디스플레이 등의 주요 재료) ②포토레지스트(부품 보호막을 생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보호제) ③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의 한국 수출 및 이와 관련된 제조 기술의 이전에 대해 포괄 수출 허가 제도 대상에서 제외하고, 개별 수출 심사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로 스마트폰과 반도체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반도체를 생산하는 SK하이닉스 등 국내 대기업이 당장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화이트 국가 제외 시 훨씬 큰 타격이 우려된다. 이번 사태의 핵심 포인트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포인트 1│화이트 국가 제외 검토

7월 4일 현재 일본이 지정한 화이트 국가는 27개국이다. 일본 주니치(中日)신문에 따르면 화이트 국가란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는 등 일본이 정한 조건을 충족시켜 ‘대량살상무기 등을 확산할 우려가 없다’고 일본이 인정한 나라를 뜻한다. 미국·독일·호주 등 27개국이 지정됐고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2004년 지정됐다. 화이트 국가로 지정되면 국가 안전 보장과 관련된 영향이 비교적 적은 품목에 대해서는 수출 시 절차나 심사가 완전히 생략된다. 화이트 국가는 일본의 독자적 명칭으로 다른 국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은 8월 중 화이트 국가 명단에서 한국 제외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이 명단에서 한국이 제외되면 일본 기업이 1000종이 넘는 전략 물자를 한국으로 수출할 때마다 일일이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 주요 물자를 수입하는 한국에서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뿐 아니라 자동차, 정밀기계, 화학 등 국내 주요 산업의 공장 가동이 어려워질 전망이다.

한국 정부는 즉각 WTO 제소 카드를 꺼냈다. 향후 승소 여부를 가르는 건 일본이 주는 화이트 국가 ‘특혜’를 제거하는 행위를 과연 불공정 무역으로 볼 수 있는가 여부다. 한국 통상 당국인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가트·GATT)’ 11조에 따라 수출 제한 조치는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예외적인 경우가 몇 가지 있는데, 일본은 현재까지 관련 법에 합치하는 예외 사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다만 신중한 일본 정부가 당당히 규제 강화안을 고시한 것은 이미 치밀한 준비가 바탕이 된 것으로 보여 8월 화이트 국가 제외 때는 합당한 이유를 제시할 것이 확실시된다. 일반적인 예외 사유는 국내 수급 부족, 환경 보전, 보건상의 문제 등이다.

더 큰 문제는 WTO 제소 후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통상 WTO 제소부터 1심 판결까지는 15개월이 소요된다. 1심 판결 후 한쪽이 결과에 불복해 2심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더 오래 걸린다. 일례로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 관련 WTO 제소 건은 2015년 5월부터 2019년 4월 최종 결론이 나오기까지 5년이 걸렸다. 한국 정부는 아직 명확한 제소 일정을 확정하지 못했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사진 블룸버그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사진 블룸버그

포인트 2│EUV 공정 차질

더 급한 건 당장 국내 기업의 EUV(극자외선) 공정에 차질을 빚게 된 상황이다. 일본은 7월 4일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수적인 핵심 소재 3종의 수출 규제를 강화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끄는 한국 반도체 산업을 정조준한 것이다. 이번 규제에 포함된 소재 3종은 일본이 세계 시장 점유율 70~90%로, 독점하고 있다. 문제는 점유율 그 자체보다 일본의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민감한 제품을 제대로 생산하기 위한 대체재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일본이 한국의 급소를 공격했다”고 했다.

관련 업계에선 특히 일본 정부가 규제 대상에 포함한 포토레지스트(감광액)에 주목하고 있다. 포토레지스트 중에서도 차세대 노광 장비인 EUV용 소재를 규제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EUV 공정은 반도체 미세 공정을 가능케 하는 차세대 핵심 기술이다. D램이나 낸드플래시 공정에 사용하는 포토레지스트는 국내 기업도 생산할 수 있지만, EUV용 포토레지스트는 첨단기술 제품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D램과 낸드플래시는 버리고 차세대 공정에 필수적인 핵심 소재를 묶어버린 셈이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EUV용 포토레지스트는 한국 기업이 아예 생산하지 못하는 제품”이라며 “규제가 장기화하면 삼성전자가 EUV 공정을 활용한 물량을 확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내 기업이 지난해 일본에서 수입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물량은 △포토레지스트 2억9889만달러(약 3494억원)△에칭가스 6685만달러(약 781억원) 등 총 3억8546만달러(약 4500억원) 규모다.


포인트 3│계속된 ‘시그널’ 무시한 한국 정부…감정적 대응은 삼가야

앞서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경고 시그널을 보냈다. 위안부 보상 문제 합의, 강제징용 배상 논란 등에 대한 양국 간 합의를 한국이 정권 교체 후 뒤집었다는 주장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한국이 일본의 불만을 계속 무시했다고 봤을 가능성도 있다. 김상조 실장은 7월 3일 “일본의 보복 조치에 대해 ‘롱리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산업계에서는 “일본의 무역 규제 강화는 문재인 정부 적폐 청산의 ‘나비효과’”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의 추가 보복 조치가 예상된다는 점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7월 3일 NHK방송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국가에는 우대 조치를 취할 수 없다”라며 “(일본의 무역 규제 강화는) WTO 협정 위반이 아니다. 또 이는 역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두 개의 나라가 국제법상 국가 간 약속을 지키느냐의 문제”라고 질타했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이른바 ‘사무라이 정신(무사도)’을 언급하기도 한다. 일본인은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문제가 심각해지면 한 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양국의 감정적 대응은 누구에게도 이득이 될 게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 통상 전문가는 “감정적인 대응은 양국 모두에 큰 피해를 초래할 것”이라며 “어렵더라도 청와대가 발 벗고 나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라고 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교수는 “미·중 무역전쟁이 여전한 가운데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일종의 ‘중요 방어선’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이는 원활한 한·일 관계가 더욱 중요한 시점이라는 뜻”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