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7일 전북 전주 국민연금공단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국민연금공단 현장 제도 간담회’에서 김성주(왼쪽) 전 국민연금 이사장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27일 전북 전주 국민연금공단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국민연금공단 현장 제도 간담회’에서 김성주(왼쪽) 전 국민연금 이사장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연금을 내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많고 내는 돈보다 받는 금액이 많다면, 연금 제도는 지속 가능할 수 없습니다. 불균형이 지속된다면 아무리 뛰어난 투자 귀재가 나타나 수익률을 최대치로 올려도 기금 소진을 피할 수 없습니다.”

19대 국회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수석 부의장 등을 역임한 김성주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2017년 11월 7일 제16대 국민연금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낸 돈보다 훨씬 많이 받아 가는’ 국민연금 제도의 구조를 서둘러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해 당사자와의 사회적 합의를 거쳐 국회와 함께 해법을 찾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라고도 했다.

2020년 1월 현재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2017년 11월과 비교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대화는 시작했으나 제도 손질의 핵심인 보험료율(소득에서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는 비율)과 소득대체율(생애 평균 소득 대비 연금 수령액 비율) 조정을 두고 경영계, 노동계, 노인, 청년 등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복지 전문가들은 “저출산·고령화 속도가 너무 빨라 연금 제도 개선의 골든타임도 금세 지나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제도 개혁 성공의 가교를 자처하던 김 전 이사장이 최근 갑자기 국민연금을 떠났다. 임기를 1년이나 남겨둔 상태였다. 김 전 이사장이 임기 중간에 사임한 건 4·15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서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사표를 수리하자마자 서울(1월 8일)과 전북 전주(1월 11일)에서 잇달아 출판기념회를 열고 본격적인 총선 레이스에 돌입했다.

사실 김 전 이사장의 중도 하차는 진작부터 예고됐다. 그는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거취를 묻는 의원들의 질문에 대답을 피하면서도 총선 출마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사장으로 일한 2년 동안에는 전주 지역 내 각종 행사에 얼굴을 비춰 “지역구를 미리 관리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김 전 이사장은 2016년 총선 당시 정동영 국민의당 후보(현 민주평화당 대표)와 전주에서 맞붙어 989표 차이로 졌다. 청와대는 그를 전주에 있는 국민연금 이사장으로 임명해 2020년 총선에서의 재대결 준비를 간접적으로 도왔다.

김 전 이사장의 정치 복귀로 국민연금은 또다시 선장을 잃게 됐다. 국민연금 이사장 자리는 전임자인 문형표 전 이사장이 2017년 2월 물러난 뒤 김 전 이사장이 임명될 때까지 10개월이나 공석으로 방치된 바 있다. 이전 이사장들 교체 시기에도 수개월씩 리더 공백이 발생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는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난 이사장이 드문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1대 장원찬 이사장부터 16대 김성주 이사장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민연금 수장 가운데 임기 3년을 온전히 채우고 떠난 사람은 4대 조기욱 이사장, 9대 인경석 이사장, 13대 전광우 이사장 등 단 3명에 불과하다. 중도 하차 비율이 81%를 웃돈다. 사유는 조금씩 달랐다. 김 전 이사장은 자진 사퇴했지만, 누군가는 정권 교체로 등 떠밀려 나가야 했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라는 조직의 막중한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경영의 안정화를 반드시 추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13대 국민연금 이사장)은 “고령사회에 접어든 한국에서 국민 노후 자금을 책임지는 국민연금의 중요성은 날로 커질 수밖에 없다”며 “가입자 수, 기금 수탁고 등이 어마어마한 만큼 그에 어울리는 리더십과 책임감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2019년 9월 말 기준 국민연금 가입자 수는 2214만 명이다. 처음 도입된 1988년 443만 명에서 약 5배 증가한 것이다. 1988년부터 현재까지 누적 수급자 수는 1592만 명이다. 기금 적립금 규모는 지난해 10월 말 기준 712조원이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한국은행의 외화보유액인 4088억달러(약 477조원)보다 더 많은 돈을 국민연금이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712조원 운용을 총괄하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도 이사장 못지않게 임기 만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1999년 기금운용본부 출범 이후 CIO는 총 8명(현직 포함) 탄생했는데, 이 중 임기 3년(기본 2년+연임 1년)을 다 마치고 물러난 CIO는 2대 조국준씨와 5대 이찬우씨 단 두 명뿐이다. 3대 오성근씨는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옷을 벗었고, 7대 강면욱씨는 기본 2년도 채우지 못하고 현 정권 출범과 함께 자리에서 쫓겨났다.


인재들도 줄줄이 퇴사

이사장과 CIO라는 두 축이 불안한 것도 모자라 국민연금은 유능한 기금운용 인력이 대거 조직을 이탈하는 상황까지 수년째 마주하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퇴사자 수는 2014년 9명, 2015년 10명에서 전주 이전이 결정된 2016년 30명으로 급증했다. 2017년부터 2019년 사이에도 74명이 사표를 던졌다. 퇴사자 대부분은 서울의 민간 금융회사를 향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승희(자유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운용전략실·주식운용실·부동산투자실 등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투자 최전선을 책임지는 파트 인력은 총 156명(2019년 5월 기준)으로 정원인 189명보다 33명 부족하다. 기금정보실·대외협력단 등 후방 지원 인력이 90명으로 정원(92명)에 근접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핵심 인력의 공백 규모가 제법 크지만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역 채용 인원은 매년 줄고 있다. 2015년 60명이던 기금운용본부 채용자 수는 2017년 43명으로 감소했다. 2018년에는 36명으로 더 줄었다. 지원자가 적었던 건 아니다. 국민연금 측은 “역량이 충분한 인재만 선발한다”고 말했다. 넘치는 지원자 중 유능한 매니저가 적었다는 의미다.

국민연금을 외면하는 투자 전문가들이 늘면서 기금운용역들의 평균 경력도 날로 짧아지고 있다. 2014년 9.7년이던 운용직 평균 경력은 지난해 6.1년으로 3년 이상 단축됐다. 국민연금에서 민간 자산운용사로 이직한 한 펀드매니저는 “풍부한 경험과 네트워크로 국민연금의 위기 대응과 전략 결정에 힘을 보태야 할 베테랑 운용역은 떠나고 그 자리를 신참급 직원이 채운다”고 했다.

현재 남아있는 운용역이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건 더 큰 리스크 요인이다. 지난해 6월 기준 국민연금 기금운용 인력의 64.7%가 가족을 서울 등 타지역에 남겨두고 혼자 전주에서 생활 중이다.

선장도, 선원도 부족한데 국민연금의 힘은 점점 강해지는 추세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해 12월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을 명시한 ‘적극적 주주 활동 가이드라인’을 의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특정 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은 그 자체로 시장에 부정적인 신호를 줄 가능성이 크고 기업 경영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개연성이 높다”며 “독립성이 취약한 현행 기금위 구조를 고려할 때 앞으로 정부는 물론 노동계와 시민단체도 국민연금에 영향력을 행사해 민간기업 경영에 개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