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미문의 위기가 오더라도, 준비된 기업은 살아남는다. 위기는 세상에 없던 트렌드를 제멋대로 창조하진 않는다. 이미 존재하던 트렌드를 가속할 뿐이다. 다가올 미래를 전폭적으로 준비했던 기업이라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같은 위기 상황은 오히려 호재다. 이제껏 준비해온 것을 실전에 내놓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앞당긴 미래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DT)이 대표적이다. 생산, 마케팅, 판매, 유통 과정이 모두 디지털 세계에서 이뤄진다. 예상하지 못한 변화상은 아니다. 다만 안일했던 기업이면 지금과 같은 격변의 시기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100년 그룹의 시계는 선제적으로 흘러간다. 1909년 설립된 뷰티 업계 1위 로레알 그룹(이하 로레알)은 일찍이 2010년부터 ‘디지털의 해’를 선포했다. 과감한 투자가 뒤따랐다. 당시 고용한 1600명의 디지털 인력을 전원 마케팅팀 투입. 현재까지 3만3000여 명의 직원이 디지털 교육을 받았다. 코로나19 이후 전자상거래 시장이 급속히 활성화되면서 이런 노력은 빛을 발했다. 2015년 전체 매출의 5%에 불과하던 전자상거래 매출은 5년 만에 25%로 훌쩍 늘었다.

모든 결정의 주체는 장 폴 아공 로레알 그룹 회장. 42년 근속 ‘로레알맨’이다. 1978년 입사 이후 최고경영자(CEO)직에 2006년 올랐다. CEO 경력만 14년. 로레알의 역사로 보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다. 역대 4대 CEO 평균 임기는 30년이다(건강상 문제로 일찍 물러난 샤를 즈비악 전 CEO 제외). 로레알이 갑작스러운 위기도 장기적 안목으로 이겨내는 비결이다.

아공 회장을 6월 26일 진행된 ‘미래를 위한 로레알’ 디지털 콘퍼런스 이후 서면으로 단독 인터뷰했다. 이날은 로레알이 코로나19 사태 앞에서도 담담히 10년 장기 계획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아공 회장은 인터뷰에서 “안정성과 지속성은 우리가 사는 뷰카(VUCA·변동적이고 복잡하며 불확실하고 모호한 사회) 세계에서 중요한 자산”이라면서 “우리가 장기적인 전략을 실천할 수 있는 이유”라고 밝혔다.

아공 회장의 국내 인터뷰는 2018년 5월 로레알이 한국의 패션·뷰티 브랜드 ‘스타일난다’를 인수한 이후 처음이었다. 아공 회장은 스타일난다의 김소희 전 대표를 아시아의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에게 영감을 주는 ‘창조적 지휘자’라고 평가했다. 코로나19의 브랜드 매출 영향에 대해선 “마스크 착용, 재택근무, 외부 모임 감소로 립스틱 사용이 줄면서 메이크업 부문이 영향을 받았지만, 피부 관리에 대한 수요로 스킨케어 부문은 잘 버텨줬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이후 뷰티 시장에 대해선 ‘견고한 성장’을 확신했다.


CEO만 14년 경력이다. 오랜 경력의 비결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회사’ 로레알을 14년째 이끌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비결과는 전혀 관련 없다. 로레알의 리더십과 거버넌스 방식이라고 봐야 한다. 로레알은 탄탄한 주주 기반과 창업주 일가 베탕쿠르 메이여가(家)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지난 110여 년 동안 로레알에 회장 겸 CEO는 5명밖에 없었다. 이러한 안정성과 지속성은 우리가 사는 뷰카 세계에서 중요한 자산이다. 우리가 장기적인 전략을 실천할 수 있는 이유다.”

코로나19로 뷰티 업계의 타격이 크다.
“로레알에서 42년 동안 나는 수많은 위기를 거쳐왔다. 시장은 이번에도 다시금 회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전 세계적으로 헤어살롱, 향수숍, 백화점과 공항 면세점이 대규모로 문을 닫는 공급 위기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좋은 소식은 소비자의 뷰티 수요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이다. 뷰티 시장은 지난 20년 동안 평균 4% 이상 성장했다. 다른 소비재 산업보다 높은 성장률이다. 세계화, 중산층·상류층의 성장, 인구의 고령화, 남성 소비 등 이전과 동일한 근본적인 경제·인구·사회적 요인이 경제 회복을 주도할 것이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나는 100% 확신이 있다.”

로레알의 2020년 상반기 매출은 130억7000만유로(18조3700억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7% 감소했다. 타격이 있었지만 아공 회장은 당장의 위기에 연연하지 않았다. 로레알에 위기는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것이었다. 코로나19로 변화한 뷰티 업계 트렌드는 이미 로레알이 준비한 내용이었다. 아공 회장은 “확실한 것은 이번 위기가 ‘이미 존재하던’ 트렌드의 ‘가속장치(accelerator)’로 작용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19로 인한 뷰티 업계 변화는.
“카테고리와 채널 변화가 있다. 우선 카테고리별로 살펴보자. 마스크 착용, 재택근무, 외부 모임 감소로 립스틱 사용이 줄어들면서 메이크업 부문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반면 피부 관리에 대한 수요는 여전해서 스킨케어 부문은 잘 버텨줬다.”


코로나19→전자상거래 활성화→대기업 브랜드 ‘기회’

채널 변화는 무엇인가.
“디지털과 전자상거래의 호황이다. 가장 중요한 변화다. 소비자들은 소셜미디어로 브랜드와 소통하고 온라인으로 좋아하는 제품을 구매한다. 로레알로서는 진심으로 좋은 일이다. 우리는 디지털과 전자상거래 부문에서 이미 ‘챔피언’이다.”

2010년 ‘디지털의 해’를 선포하고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을 준비했다고.
“그렇다. 현재까지 성과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디지털 혁명은 엄청난 모험이자 근본적인 변화였다. 디지털은 로레알의 사업구조를 완전히 바꿨고 이는 엄청난 사업 기회를 제공했다. 2020년 상반기 기준 전자상거래는 지난해 상반기보다 65% 성장했다. 매출의 25% 수준이다. 디지털은 브랜드의 ‘촉진제’ 역할을 한다. 대기업 브랜드는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더욱 위상을 높인다.”

온라인상에서는 숨은 기업이 두각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지 않나. 대기업의 전통 브랜드보다 스타트업의 혁신적인 브랜드가 기회를 잡을 것 같은데.
“많은 사람이 디지털과 전자상거래가 작은 브랜드의 부상과 대기업 브랜드의 쇠퇴를 야기할 거라고 말했다. 로레알은 언제나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옳았다. 지난해 로레알 브랜드의 매출 증가율은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이는 코로나19 위기를 맞이한 현재도 마찬가지다. 현재 약국이나 드럭스토어에서 판매하는 ‘더모코스메틱(피부과학(dermatology)과 화장품(cosmetic)의 합성어로 기능성 약국 화장품)’ 브랜드가 이전보다 인기를 끌고 있다. 건강이 전 세계적인 1위 관심사로 부상한 만큼 성능·건강·안전·품질을 모두 충족하는 솔루션이 더욱 주목받는다. 혼란의 시기엔 검증된 대기업 브랜드가 안심을 준다.”


2020년 로레알 그룹이 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선보인 ‘페르소’. 사진 로레알
2020년 로레알 그룹이 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선보인 ‘페르소’. 사진 로레알

디지털 혁신으로 업(業)의 전환

디지털 혁신은 업의 성격 또한 바꾸고 있다. 로레알은 화장품 제조뿐만 아니라 서비스 기업으로 거듭났다. 2018년 가상현실(VR) 기술 기업 모디페이스(Modiface) 인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로레알은 모디페이스의 기술을 기반으로 3D 가상 메이크업과 같은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올해는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 처음 나타나 인공지능(AI) 기반 스킨케어 진단 기기 ‘페르소’를 선보였다. 아공 회장은 “이와 같은 신규 서비스 출시가 신제품(화장품) 디자인만큼이나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디지털 부문의 계획은.
“‘뷰티테크’의 선구자이자 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페르소가 이 여정으로 내딛는 다음 단계다. 이는 뷰티 기업으로서 모든 소비자에게 맞춤형 뷰티 경험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자와 시장에 적응하고자 데이터를 이용해 민첩성을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 향후 엄청난 경쟁 우위로 작용하리라 생각한다.”

로레알은 AI, 클라우드 서비스, 사물인터넷(IoT)을 이용해 데이터를 추출하고 소비자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실제 상용화한 사례도 있다. 랑콤 매장에 비치된 AI 기반 파운데이션 추천 기기 ‘랑콤 쉐이드파인더’는 소비자에게 파운데이션 톤을 추천하는 동시에 피부톤 정보를 본사에 보낸다. 제품군이 소비자 니즈를 포괄하지 못하는 경우 추후 신제품을 출시하기 위해서다.


스타일난다 인수로 아시아 포트폴리오 보완

기업 가치 평가 기관 브랜드파이낸스에 따르면, 로레알은 2020년 5월 기준 뷰티 업계 기업 가치 1위다. 코로나19의 영향 평가를 거친 결과다. 매출 기여도의 32.3%를 차지하는 아시아 시장에서 견조한 성장세가 나타난 덕분이다. 실제 올해 2분기 로레알의 중국 시장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 성장했다. 아시아 시장이 코로나19의 버팀목이 되어준 셈이다.

2018년 로레알이 인수한 한국 기업 스타일난다도 한몫했다. 올해만 해도 스타일난다의 메이크업 브랜드 3CE(쓰리씨이)의 저력이 무섭다. 스타일난다는 중국 상반기 최대 온라인 쇼핑 페스티벌 ‘618 쇼핑절’에서 올해 3CE의 매출이 지난해보다 300% 증가했다고 밝힌 바 있다.


스타일난다 인수 배경이 궁금하다.
“스타일난다는 서울의 바이브, 엣지, 창의성을 담아내는 독특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다. 한국, 중국을 넘어 여러 지역 밀레니얼 세대의 메이크업 수요를 맞추는 완벽한 위치에 있다. 로레알의 국제적 포트폴리오를 보완하는 작업이었다.”

김소희 전 대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실무에 참여하고 있다.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는 현재 스타일난다의 ‘창조적 지휘자’다. 아시아의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에게 영감을 주는 독특한 뷰티·패션 감수성을 바탕으로 브랜드의 성공적 확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의 역할에 감사한다.”

추가로 M&A를 고려하는 한국 기업이 있을까.
“언제나 기존 포트폴리오를 보완하고 그룹의 유기적 성장을 도울 브랜드를 탐색한다. 향후 M&A 계획은 언급이 어렵다는 점을 양해해달라.”

코로나19가 M&A의 기회로 작용할까.
“코로나19 위기가 뷰티 업계 구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단정 짓는 것은 시기상조다. 합병 사례가 생길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인수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이다. 또한 업계의 리더로서 모든 잠재적 인수건은 먼저 제안이 들어온다.”


경영의 영감은 ‘시작점을 선점하라’ 철학에서

재직 기간에 디지털 혁신, 공격적 M&A 등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영감을 얻는 발로가 있나.
“첫 번째,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로레알의 ‘철학’. 우리는 이를 ‘시작점을 선점하라(Seize what starts)’라고 부른다. 두 번째, 대기업이면서도 스타트업의 기업가정신과 확장성을 갖춘 ‘접근 방식’. 세 번째, 중앙 집중적인 전략을 쓰면서도 분산된 운영 ‘조직’. 전 세계 트렌드를 초기 단계부터 포착할 수 있는 방법이다. 네 번째, ‘직감’이다. 디지털의 폭발적 성장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직감, 기후·사회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는 직감 말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조직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인도주의적 전통에 기반한 ‘신념’도 중요하다.”

아공 회장에게 기후·사회 문제는 코로나19만큼이나 곧 다가올 위기다. 이를 선제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향후 로레알의 과제라는 입장이다. 로레알은 10개년 계획 ‘미래를 위한 로레알’을 통해 2030년까지 제품 포장용 플라스틱에 100% 재활용 자원·바이오 기반 자원을 활용하고, 2016년 대비 온실 가스 배출량을 50% 절감하겠다는 방침이다. 전 직원에게 생활임금을 보장하는 내용도 계획에 담겨 있다. 생활임금은 물가상승률과 가계소득·지출을 고려한 실제 생활이 가능한, 최소 수준의 임금으로 최저임금보다 높게 책정된다.

전 직원에게 생활임금 보장을 약속한 점이 인상 깊었는데.
“당사 직원뿐 아니라 전략적 협력업체의 직원에게 생활임금을 보장할 계획이다. 많은 나라에서 최저임금은 실제로 너무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노동자가 자신과 부양가족의 기본적인 니즈(주택, 식료품, 의료, 의복, 교통 등)를 감당할 수 없다. 로레알은 독립 전문 기관 페어웨이지 네트워크(Fairwage Network)에서 포괄적인 최신 데이터를 제공받아 생활임금 전략을 정의‧마련하고 적용할 계획이다.”


장 폴 아공 회장은 누구?

장 폴 아공 회장은 파리경영대학원(HEC Paris) 졸업 이후 1978년 로레알에 입사했다. 입사 3년 만에 당시 실적이 최악이었던 그리스 지사장을 맡아 위기관리 능력을 인정받았다. 아시아 금융 위기가 터진 1997년에는 아시아 지사장을 맡았다. 2001년 미국 지사장 때는 9·11 테러 이후 모든 매출이 곤두박질한 상황에서 백화점 대신 미용실과 대중용품 시장을 공략해 성장을 끌어냈다. 2006년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이후 2011년 회장을 겸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