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8시에 장사를 마치면 오토바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평일 중 이틀은 가게를 닫고 막노동을 해요.”
10월 26일 오후 서울 대현동 이화여대 앞. 이곳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는 박상준(가명·48)씨는 2014년부터 장사를 했지만, 이런 불경기는 처음이라며 울상을 지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만 하더라도 월평균 2000만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지난 2월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부터 매출이 급감했고, 지난 8월에는 월 매출이 200만원대로 쪼그라들었다. 임대인에게 사정을 호소해 월세를 20% 낮췄지만, 그마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박씨는 지난 9월 5000만원을 대출해 생활비에 보탰다고 한다.
관광객과 학생들로 항상 붐볐던 서울 대표 대학 상권인 이대 앞은 오후 6시에도 조용했다. 몇 안 되는 학생들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상인들은 휑한 가게를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취재를 위해 들어간 옷가게에선 “오늘 첫 손님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같은 날 저녁 찾은 서울 대표 대학가인 안암동과 회기동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8월 안암동에 카페를 개업한 유근형(가명)씨는 “이 자리가 ‘금싸라기 땅’이라 5년 전부터 대기했다가 들어왔는데, 공사 중 코로나19가 터졌다”며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왔지만, 매출이 예상치의 25%에도 못 미쳐 임대인과 임대료를 협상해 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대학가 상권이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학생과 교직원 등으로 한정된 소비 수요가 비대면 수업으로 사라진 데다 대학가의 주 소비자였던 외국인 학생들마저 최근 자국으로 돌아가면서 급격하게 소비자가 줄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19년 해외 유학생은 16만165명으로 2016년보다 53.1% 늘었다. 하지만 올해는 15만3695명으로 전년보다 4% 줄며, 2014년 이후 처음으로 유학생 수가 줄었다. 특히 교환 연수생 등 비학위과정 유학생 수가 32.1% 감소했다.
이대 앞 문구점 주인 신모씨는 “5년 전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태로 중국인 학생이 빠져나가면서 매출이 줄었다”며 “이제 막 회복하는 찰나에 코로나19가 찾아와 매출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가 상권이 전 업종에 걸쳐 ‘저가 경쟁’ 중인 점도 불황의 늪을 더 깊게 만들었다. 저가 공세로 주머니 가벼운 학생들을 노리던 대학가 상점들은 코로나19에 따른 원재료 가격 상승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대 앞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한모씨는 “요즘 다른 상권이나 프랜차이즈들은 세일을 해 살 길을 찾지만, 대학가 상인들은 이미 가격을 더 낮출 수 없을 만큼 낮춰서 장사해왔다”고 말했다.
이대 앞 A부동산 공인중개업소의 정금수 실장은 “최근 계약금을 다 낸 사람도 입점을 미룰 정도로 대학가 상권 경기가 좋지 않다”며 “지난 3월과 비교하면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이어 “1층 ‘명당’ 자리가 20곳 이상 비었는데도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임대료를 알아보는 정도를 제외하면 장사하려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코로나19에 적응할 수밖에”
상황이 이렇자 대학가 상인들도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배달 범위를 확대해 방문 손님 손실분을 배달로 메꾸는가 하면 업종을 비대면 중심으로 바꿔 인건비를 줄이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이대 앞 B일식집의 채동균(26) 매니저는 “배달 가능 지역의 범위를 늘려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며 “방문 손님은 줄었지만, 배달 수요가 그나마 늘어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비슷한 매출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24시 무인 인쇄소’ ‘무인 스터디 카페’ 등 종업원이 없고, 소비자끼리 아예 마주치지 않도록 영업하는 가게도 잇따라 생기고 있다. 안암동에는 6개월 전만 해도 대형 카페가 있던 자리에 24시 무인 인쇄소가 생겼다. 문서 작업부터 인쇄까지 모두 소비자가 하는 식이다. 무인 스터디 카페는 커피를 만들어주는 바리스타가 아예 없다. 소비자가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신다. 올해 이 거리에만 다양한 형태의 무인 상점이 생겨났다.
이처럼 새롭게 변화한 대학가 풍경에 온라인 재학생 커뮤니티에는 ‘추억의 장소’가 사라졌다는 게시글이 연일 올라온다. 회기동에서 만난 신재우(25)씨는 “취업 준비 중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는데 자주 가던 식당이 없어져 놀랐다”며 “코로나19 이후 대학가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다를 것 같다”고 말했다.
임대료 갈등도 빈번해
장사가 안되다 보니 임대료를 깎아달라는 임차인과 못 깎아준다는 임대인 간의 갈등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 ‘착한 임대인 운동’을 장려하고 있지만, 막상 현실에선 월세를 깎는 게 쉽진 않다.
이대 앞에 상가를 갖고 있는 임건호(가명)씨는 “나도 대출받아 상가를 샀기 때문에 매달 이자를 갚아나가야 한다”며 “임차인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임대료를 자꾸 낮추면 건물 가격이 떨어져 차라리 공실로 두는 게 낫다”고 했다.
김인만부동산연구소의 김인만 소장은 “지금은 임차인과 임대인을 갈등 관계가 아닌 ‘을’ 대 ‘을’의 관계로 봐야 한다”며 “임차인에게 임대료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임대인에게도 은행 이자 면제 등의 인센티브를 줘야 상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임대료 갈등이 해결되지 않자 정부는 지난 9월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하 상임법)’을 개정했다. 임차인이 6개월간 임대료를 연체할 때 따르는 각종 불이익을 한시적으로 면제받을 수 있게 하고, 임대료를 조정할 수 있는 근거에 코로나19와 같은 ‘제1급 감염병으로 인한 경제 사정’이 추가된 것이다.
하지만 개정안의 실효성을 두고 현장의 반응은 차갑다. 상임법 개정 후 임차인·임대인 간 임대료 조정이 가능해졌지만, 강제 조항이 아니기에 민사 소송으로 이어지더라도 승소 확률이 낮고 비용이 많이 들어 소상공인이 시도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부분적인 법안 개정보다는 보유세, 공시지가 등을 현실화해서 코로나19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안암동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강민주(51)씨는 “임차인은 임대료가 일시적으로 면제돼도 결국 보증금이 깎이고, 임대인은 임대료를 낮춰도 추후 임대료 인상에 제약이 걸릴 뿐 이득이 없으니 나 같아도 안 내려줄 것 같다”며 “정부가 보다 큰 그림을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