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1년 넘게 이어지는 상황에서 드디어 백신이 등장했다. 긴장감 속에 한 해를 넘긴 사람들 눈에 백신은 ‘백의를 입은 신’과 같았다. 인류의 희망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매우 격렬했고, 각국의 백신 확보는 국력에 비례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UN) 사무총장은 전 세계 코로나19 백신 접종의 75%를 힘 있는 10개국이 차지한 사실을 지적하며 “매우 불균등하고 불공정하다. 백신 평등은 국제 사회가 중대한 시점에 치러야 할 최대의 도덕 시험”이라고 했다.
현재 한국을 비롯한 100여 개국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돌입한 상태다.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나라가 자국의 차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이코노미조선’은 백신 이기주의에 밀려 작은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겨보기로 했다. 미리암 알리아 국경없는의사회 예방접종 및 감염병 대응 자문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한 이유다.
소아과 간호사 출신인 미리암 알리아는 2005년부터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모잠비크·시리아 등 빈민국을 돌며 감염병 환자를 돌보고 예방접종을 지휘했다. 그는 “빈민국이 코로나19 백신 대기 명단에서도 맨 끝에 서 있다”며 백신 접근이 힘의 논리로 이뤄지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부유국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코로나19 백신 개발 프로젝트에 막대한 공적 자금과 자선기금이 투입됐다. 그런데도 고소득 국가들은 제약 회사와 양자 간 비밀협약을 체결해 백신을 선점했다. 게다가 이들 국가는 전체 인구가 접종하는 데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을 확보했다. 힘이 약한 나라는 공정한 방법으로 백신에 접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백신을 전 세계가 고루 나누지 않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안전할 때까지는 누구도 안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만 면역력을 확보하는 거로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집단 접종의 효과를 본 경험이 많겠다.
“물론이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매년 수백만 명의 아동을 대상으로 예방접종을 실시한다. 최근 경험으로는 2019~2020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진행한 대규모 홍역 예방접종 프로젝트가 생각난다.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도 콩고는 어떠한 예방접종도 해 본 적 없는 아동이 많은 나라다. 콩고에 들어가 첫 3개월 동안은 백신 확보에 어려움이 있어 감염 사례 관리만 했다. 이후 간신히 접종을 시작했는데, 접종 2주 만에 홍역 발생률이 제로(0)로 떨어지더라. 모잠비크의 경우 2019년 아프리카 남부를 강타한 사이클론(cyclone) ‘이다이’의 피해를 크게 입었다. 그런데 이다이가 물러가자마자 콜레라가 창궐해 많은 모잠비크 국민이 고통을 겪었다. 콜레라 예방접종은 정기 예방접종 리스트에 포함돼 있지 않다. 외부에서 백신을 어렵게 구해와 접종했는데, 열흘 만에 발생 정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한국만 해도 홍역이나 콜레라는 만나기 힘든 질병인데.
“예방과 치료가 어렵지 않은 환경이니까. 빈민국은 다르다. 국경없는의사회가 활동하는 지역에서는 치료에 필수적인 의약품이나 기본 장비가 없어 환자가 허망하게 사망하는 일이 많다. 지금의 ‘코로나19 백신 이기주의’가 아쉬운 이유다. 최빈국은 코로나19 백신 대기 명단에서도 맨 끝이다. 현재 남아프리카 국가들은 의료 역량을 넘어서는 변이 바이러스의 빠른 확산 속도에 힘겹게 대응하고 있다. 반면 고소득 국가들은 총인구수를 웃도는 백신 비축분을 쌓고 있다.”
티에리 코펜스 국경없는의사회 한국 사무총장에 따르면 최근 감염력이 강한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가 남아프리카에 급격히 확산해 모잠비크·에스와티니·말라위 등이 위기에 몰렸다. 에스와티니의 경우 10만 명당 누적 확진자 수가 1394.7명(2021년 2월 기준)에 이르고, 모잠비크는 신규 확진자 수가 작년 1차 확산 때보다 7배 급증했다.
부유국 국민 중에는 코로나19 백신을 믿지 못하겠다며 접종을 피하는 사례도 있다.
“새로 나온 백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백신의 안전성과 효능을 의심하고 질문할 권리가 있다. 더구나 코로나19 백신은 단기간에 개발되지 않았나. 다만 비논리적이고 막연한 음모론은 홍역 정도도 막지 못해 사망하는 아이가 많은 사회를 보지 못한 사람이 쉽게 꺼낼 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지구 어딘가에는 아직도 말라리아 백신이 없어 자식이 죽고, 그런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예방접종에 나서는 이들이 있다.”
예방접종에 왜 목숨을 거나.
“2013년 시리아 반정부군 거점인 알레포에서 홍역이 유행했다. 국경없는의사회가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는 수시로 폭격이 있었다. 우리는 한 건물 지하에서 예방접종을 진행했다. 많은 선량한 시민이 무장단체의 공격을 무릅쓰고, 검문소를 지나고, 도시를 가로질러 예방접종을 하러 와야 했다. 분쟁이 만성적으로 일어나는 콩고나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환자뿐 아니라 의료진도 위험하다. 무장단체를 만나면 납치당하거나 돈을 빼앗긴다. 우리가 주민을 안전하게 찾아가거나 주민이 우리를 찾아오도록 하려면 여러 이해관계자와 협상해야 한다. 아이의 예방접종을 위해 보건소까지 15㎞ 이상 걸어오는 부모를 만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의료진도 사명감 없이는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의 활동 지역은 의료 지원이 절실하고, 그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이 대부분이다. 예방접종이 사망률을 낮추고 신생아 수 증가에 기여하는 걸 보면서 의료진은 현장에서 버틸 힘을 얻는다. 내 경우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어느 날 야간 당직을 서다가 우연히 국경없는의사회 포스터를 본 게 (국경없는의사회 합류의) 계기가 됐다. 영양실조에 관한 내용이었고, 포스터 하단에는 ‘만약 이 사진이 당신의 분노를 일으킨다면, 당신은 이미 국경없는의사회 일원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길로 곧장 구호 현장으로 뛰어갔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증언(témoignage)’은 인도주의적·의료적 지원만큼이나 국경없는의사회의 중요한 활동이다. 구호 현장에서 목격한 위기에 대해 목소리 내지 못하는 사람을 대신해 증언하는 것이다. 우리의 증언이 쌓여 각국 의료 정책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이 인터뷰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코로나19 백신의 평등한 보급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