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한한 글로벌 빅테크 마이크로소프트(MS)의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CEO)가 짧은 일정 속에서도 만난 스타트업이 있다. 3차원(3D) 패션 디자인 업체 ‘클로버추얼패션’이다.
2009년 KAIST 컴퓨터공학과에서 3D로 의상을 디지털화하는 기술을 연구 중이던 오승우와 일찌감치 ‘될 기술’을 알아본 벤처기업인 부정혁이 손잡고 만든 이 회사는 매출의 90% 이상이 해외에서 나올 정도로 일찌감치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망고, 아디다스, 휴고보스 같은 의류 업체부터 영화 ‘아바타’ ‘반지의 제왕’ 등을 제작한 웨타디지털, 게임 개발·유통사 유비소프트 같은 내로라하는 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유럽, 북미 등 전 세계 10개국에 12개 오피스를 두고 있으며 현재 미국 법인에 있는 김지홍 대표가 글로벌 CEO 역할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 운영과 기술을 총괄하며 회사를 이끌고 있다. 서울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어떤 시장이 있을지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클로버추얼패션의 기술을 설명해 달라.
“우리 기술의 핵심은 가상으로 옷 만드는 방식을 실제처럼 구현하는 것이다. 그동안 CG로 옷을 만드는 방식은 찰흙을 빚듯이 주름 하나하나를 모델링한 것이었다. 실제 옷처럼 보이지만 빚어 놓은 조각처럼 보였다. 우리 소프트웨어는 실제 옷을 만드는 도면 그대로, 소잉(바느질) 방식 그대로 원단을 시뮬레이션해서 가상 아바타에 입힌다. 실제 사람이 입은 것과 똑같고, 입었을 때 주름도 더 사실적이다. 이런 과정은 실제 옷을 만드는 데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 기술을 쓰면 가상에서도 의상을 만들 수 있지만, 실제 옷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상과 실제를 연결하는 지점에 우리 기술의 핵심이 있다.”
해외 매출이 대부분인데 처음부터 해외를 공략했나.
“우리는 자본이나 네트워크 없이 기술만 가지고 시작했다. 이런 기술이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유튜브나 회사 홈페이지에 올려 노출하는 식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우리 기술을 흥미 있게 보고 연락이 왔는데, 대부분 해외였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가상 캐릭터를 꾸며서 노는 아마추어 커뮤니티가 있었는데, 그쪽에서 처음으로 연락이 왔다. 캐릭터를 꾸밀 때 옷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간 아마추어 수준이었던 옷을 갑자기 전문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니 얼마나 신나고 자랑하고 싶었겠나. 우리 소프트웨어를 가져다가 만든 캐릭터를 여기저기 커뮤니티에 자랑했고, 그러면서 ‘반지의 제왕’을 만든 웨타디지털에서도 연락이 왔다. 웨타디지털은 우리 소프트웨어를 쓰기 위해 영화사 최초로 패션 디자이너를 고용하기도 했다. 영화 속 캐릭터 의상도 실제 의상을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2014년까지 총 62억원을 투자받은 이후 오랫동안 자금 유치가 없었는데.
“우리 소프트웨어를 활용했을 때 내는 연간 라이선스 비용이 기본 비즈니스 모델이다. 통상 소프트웨어는 한 번 설치할 때 돈을 내면 끝이지만, 우린 창업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돈을 내는 구독 모델을 만들었다. 사용자가 쓰기만 하면 수익은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투자받지 않을 수 있었다. 수익 대부분은 재투자하는 형태로 회사를 키웠다. 커머스처럼 자본을 투입해 목표 달성을 앞당길 수 있는 사업 모델이라면 투자가 필수적일 것이다. 우리는 기술 기반의 회사고, 어느 정도 세상이 변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비유하자면, 임산부 10명이 있어도 한 달 만에 아기를 낳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기다림이 필요한 업종도 있다. 우리가 2009년 회사를 설립할 때 이미 예상했던, 가상과 현실의 융합, 즉 최근 유행처럼 나온 ‘메타버스(metaverse·현실과 가상이 혼합된 세계)’가 지금에서야 활성화되고 있지 않나.”
필요에 따라 가상을 활용하는 메타버스 시대가 정말 열릴까.
“코로나19 시대가 오면서 오프라인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온라인으로 대체되는 걸 보면서 사람들이 가상 활동도 실제와 같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옷은 동물이나 기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정체성을 표현하는 도구로 자리잡고 있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2~3년 전 유명 디자이너가 온라인 한정판으로 옷을 10벌 정도, 각 300만원쯤에 판 일이 있다. 진짜 옷이 아니고, 가상 옷이었다. 디자이너는 사진을 받아다가 가상의 옷을 합성해 다시 보내줬다. 사람들은 한정판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싶었던 것 아니겠나. 실제 옷을 받아서 입고 사진 찍을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패션의 기능을 100% 다 한 것이다.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런 일은 앞으로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MS 사티아 나델라 CEO가 방한했을 때도 만났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나.
“우리 기술은 게임이나 영화 속 의상이 아니라 실제 의상을 만드는 데도 쓰이는데, 이를 활용하면 물리적 원단이나 샘플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환경에 도움이 된다. 나델라 CEO 기조연설 주제가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가능하도록 하는 마이크로소프트 클라우드(Doing More with Less with the Microsoft Cloud)’였다. 이런 주제에 맞게 MS의 기술을 잘 활용 중인 기업으로 초청받았다. 향후 MS의 업무용 메신저 ‘팀즈’ 속 아바타 의상을 우리 소프트웨어와 연결하는 식의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소프트웨어를 넘어 플랫폼으로도 변신 중이다.
“일종의 큰 저수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유저(사용자)들이 콘텐츠를 각자의 목적에 따라 만드는 데서 끝이 아니고 결과물을 저장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결과물을 다른 사람이 활용하도록 해 수익을 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옷 만드는 사람인데 이를 바이어(구매자)에게 직접 보여주는 대신 ‘클로셋’이라는 플랫폼에서 모델을 바꿔서 입혀 보이고, 워킹·원단도 바꿔서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클로셋 커넥트’라는 플랫폼도 있다. 나이키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로블록스, 제페토 등에서도 입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기 다른 커뮤니티의 포맷을 자동으로 연동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일정 수수료를 취할 수 있지만, 플랫폼을 만든 더 큰 이유는 유저들의 데이터다. 옷은 그 사람의 기분부터 취향, 능력, 요즘 하고 있는 운동, 어떤 아이돌을 좋아하는지, 남자 친구랑 헤어졌는지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그걸 우리가 운영하는 판에서 모두 취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하게 큰 가치라고 생각한다.”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려는 스타트업에 조언한다면.
“모든 기업은 생존해야 한다. 시장이 크면 클수록 생존 확률도 높아진다. 우리는 어떤 시장이 있을까, 어떤 수요가 있을까라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출발했다. 그랬더니 상상도 못 하는 유저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들었다.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다고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글로벌로 시야를 확장하면 어딘가에 분명히 시장이 있다. 그 시장에서 시작해 조금씩 확장해나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