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문헌에서 찾아낸 기록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출발점인 고조선의 활동 무대가 중국 하북성(河北省) 동남쪽 요서(遼西) 지역까지 이르렀음은 물론 삼한, 부여, 고구려, 백제 또한 요서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가 있다. 바로 심백강(沈伯綱·59) 민족문화연구원장이다.

중국 사료 <사고전서>에서 한국 고대사 새롭게 밝혀내

고조선(古朝鮮)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우리 고대사의 주요 쟁점 중 하나다. 고조선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 경계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국내학계에서는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른바 ‘강단사학(講壇史學)’으로 불리는 이병도·이기백·노태돈의 입장이다. 이에 맞서 민족사학자들은 요동설(신채호), 요서설(정인보·리지린·윤내현)을 주장한다.

최근 고조선의 서쪽 변경(邊境)이 민족사학의 요서설에서 주장하는 것 보다 중국 대륙 쪽으로 더 들어간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받고 있다. 20여년 동안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疆域)을 연구한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은 “고조선의 주무대는 중국 대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했다.

- 고조선의 영토는 현 중국의 하북성 동남쪽, 요령성의 서쪽, 즉 요서 지역까지 미쳤다.
- 고조선의 영토는 현 중국의 하북성 동남쪽, 요령성의 서쪽, 즉 요서 지역까지 미쳤다.

낙랑군 수성현은 고조선 강역의 실마리
고조선의 강역은 낙랑군(樂浪郡)의 위치에 달려 있다. 기원전 108년 한(漢) 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해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을 설치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낙랑의 영토가 고조선의 영토인 셈이다.

그는 “한사군의 낙랑은 한국사의 척추에 해당한다”며 “낙랑이 바로 서면 한국사가 바로 서고, 낙랑이 뒤틀리면 한국사 전체가 뒤틀린다”고 강조했다. “낙랑은 고구려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그 위치가 중요합니다. 강단사학의 주장처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고구려의 발상지는 대동강 부근이 되고, 다른 곳에 있었다면 그곳이 발상지가 되기 때문이죠. 낙랑은 한반도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현 중국의 하북성 동남쪽, 요령성(遼寧省)의 서쪽, 즉 요서 지역에 있었어요.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면 고조선도 당연히 그곳에 있었던 거죠.”

곧 낙랑군은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秦皇島)시 노룡(盧龍)현 산해관(山海關) 일대에서 서쪽으로 당산(唐山)시, 천진시를 지나 북경 남쪽의 보정(保定)시 수성진(遂城鎭)에 이르는 지역에 발해를 끼고 동에서 서로 펼쳐진 지역이라는 얘기다.

현재의 통설인 대동강 낙랑설은 한사군인 낙랑, 임둔, 진번, 현도가 압록강이나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에 대한 반론인 <한단고기>는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일본 학계에서도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심 원장의 주장이 주목받는 것은 중국의 권위 있는 사료(史料)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가 바로 그것이다. <사고전서>는 18세기 중후반 청나라 건륭제 때 10여년에 걸쳐 청 이전의 중국 사료·사서 3400여종, 8만여권을 집대성한 책이다.

심 원장은 “<사고전서>에는 낙랑이 중국의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말하는 대목이 20여개의 각기 다른 자료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또 사고전서에는 북경 북쪽의 조선하(朝鮮河), 시라무렌강 유역의 조선국(朝鮮國),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조선성(朝鮮城) 등 요서조선에 대한 기록이 넘쳐 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전한서(前漢書)>에는 ‘한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낙랑·현도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진태강지리지>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두 사료에 나오는 수성현·갈석산의 위치를 찾던 그는 <사고전서>의 관련 사료들을 훑어본 결과, 현재의 하북성 남쪽에 낙랑군의 수성현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 수성현 갈석산은 정인보 등이 주장한 현재 진황도시 창려(昌黎)현에 있는 갈석산이 아니라, 하북성 남쪽지방으로, 오늘의 호타하(河) 유역 북쪽의 보정시 인근에 위치하는 백석산(白石山)이라는 것이다. 백석산은 한 무제 때에는 갈석산으로 불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사고전서>를 읽고 보정시 수성현 지역 등을 수 차례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정인보 등은 현재의 창려현 갈석산을 한사군 설치 당시 ‘낙랑군 수성현에 있던 갈석산’으로 봤다. 그러나 창려현 갈석산은 한 무제 때에는 게석산(揭石山)이었는데 이후(수·당대)에 갈석산으로 개칭됐다는 기록이 <사고전서>에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백제 영토도 요서 포함
오늘날 보정시 부근이 낙랑군이라는 근거는 더 있다. “수성현에서 장성(長城)이 시작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천리장성을 연결해 쌓은 것이 만리장성입니다. 연나라 장성이 가장 동쪽에 있었는데, 그 기점이 바로 수성입니다.”

중국 요서 지역이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고구려, 백제의 영토도 요서 지역으로 확대된다. 그가 잘라 말했다. “한반도에 자리를 잡았다고 알려진 부여, 고구려, 백제의 영토는 요서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문헌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습니다.”

중국 고대의 문물과 제도를 다루고 있는 <통전(通典)>에는 북위(北魏)시대에 고구려가 요서의 평주(平州)에 도읍을 정한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시대를 거쳤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당나라 때 고구려를 쳐서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고 하는데, 당시 고구려 평양을 쳤다는 것은 현재의 평양이 아닌 요서 산해관 지역의 평양을 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또한 <정개양(鄭開陽)>의 <조선고(朝鮮考)> 등 여러 문헌에 그대로 실려 있다.

위만이 조선에 올 때 건너왔다는 패수(浿水)도 한반도의 청천강이 아니라 북경 북쪽 지역에 있었던 조선하(朝鮮河)라는 강일 가능성이 크다. 심 원장은 송나라 때 펴낸 <태평환우기()>나 <무경총요(武經總要)>에 하북성 노룡현 서쪽 북경 부근에 조선하가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내세웠다. 원나라 말기까지는 조선하라는 명칭이 존속했지만, 명·청시대에 이르러 조하(朝河)로 변경돼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오늘날 요동·요서의 구분은 심양 앞에 남북으로 흐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진시황 시절이나 전국시대에는 오늘날의 요하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요수(遼水)는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요동·요서를 나누는 요하는 서남쪽으로 흐르지 않습니까. 기록으로 본다면 조하가 바로 요수인 겁니다.”

우리 역사는 어쩌다 이렇게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조선시대에는 사대주의가 만연해 우리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어요. 일본 강점기엔 일본이 고조선의 역사 중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2000년의 역사를 신화라거나 말이 안 된다며 반토막을 내버렸죠. 이런 일제의 반도사관을 지금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겁니다. 강단사학계가 그동안 사료 부족을 내세워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논리를 70년 가까이 이어온 셈이죠. 강단사학이 <사고전서>에 기록된 사료를 인정하면 그동안 주장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는 겁니다.”

고대사는 사료가 생명이다. 사료가 뒷받침되지 않은 역사 서술은 소설에 불과하다. 그의 주장은 그가 직접 10여년 동안 모은 사료를 기반으로 한다. <사고전서> 등 중국의 사료에 기록된 대로 본다면 요하는 조하이며, 노룡현 지역에 고조선이 있었다는 것이 딱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강단사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사료가 없다고 핑계를 댔고, 사료를 내놓으면 오류(誤謬)나 오기(誤記)라고 주장했다.


- 심백강 원장은 “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일제 식민사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만큼 있는 그대로의 역사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 심백강 원장은 “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일제 식민사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만큼 있는 그대로의 역사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20여년 동안 고대사 연구

심 원장은 1983년부터 10년 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연구실에서 연구직 전문위원으로 있던 한학자였다. 그가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나온 것은 학자적 소신에서 비롯됐다. “<삼국유사>를 읽다가 고조선 대목에 이은 뒷장에서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孤竹國)이었다’는 대목을 봤어요. <소학>에는 백이·숙제가 고죽국 사람으로 나오거든요. 그때부터 고조선과 고구려사에 관심을 갖게 됐죠.”

그런데 어느 누구도 고구려와 고죽국, 고조선과 고죽국의 관계를 제대로 연구한 학자가 없었다. 국내에 고죽국에 관련된 논문은 전무했다. 한국 고대사에 커다란 공백이 있었던 것이다. 학자로서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1992년 정신문화연구원을 그만두고, 이후 줄곧 고대사 연구에 몰두했다. 대만의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책은 다 읽어봤다.

“그래도 부족했어요. 그때 마침 중국에 있던 지인이 <사고전서>를 전해주더군요. 그동안 이빨 빠진 듯 구멍이 숭숭 뚫려 있던 고대사가 맞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고전서>에서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부분을 모두 추려내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라는 500페이지짜리 5권을 펴냈다. 하지만 이렇다 할 관심을 끌지 못했다. 모두 한문으로 된 책이라 역사학자마저도 이를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지난 6월과 8월 사료의 원문과 번역문, 해설문, 주석을 실어 <사고전서 자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이라는 책을 펴냈다. <전한서>, <사기>, <후한서>를 비롯한 여러 중국의 정통 사서에 나온 고조선과 낙랑에 대한 기록을 모두 추려내 편찬한, 한 개인의 힘으로는 실로 벅차고 고단한 작업이었다. 지난 11월에는 이를 모두 집대성한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 역사>라는 책을 냈다.

중국의 고전을 정확하게 번역하고 상세한 주석을 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한문 독해 실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심 원장은 <퇴계전서>, <율곡전서>, <조선왕조실록> 등 국내 주요 고전과 역사 기록물을 번역했다.

그는 “신채호·정인보 같은 학자들이 생전에 <사고전서>를 접할 수 있었다면, 우리 고대사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5년 전만 해도 이러한 주장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져 다행입니다.”

그는 후학에 대한 기대가 컸다. <사고전서>를 더 연구하면 우리 고대사에 대한 자료를 더 많이 찾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를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응할 수 있고, 우리 역사도 바로 세울 수 있다. 중국이 우리 고대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왜곡하고 있지만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일제 식민사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를 단절하고 축소하고 왜곡한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국사 교과서가 잘못돼 민족정신을 훼손시키면 그보다 더 심각한 사태는 없습니다. 잘못 가르치고 있거나 당연히 가르쳐야 할 내용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바로잡아야죠.”

그는 “역사학자와 한학자로 구성된 역사문화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역사를 바로잡고, 교과서도 개정해야 한다”며 “역사 교과서 개정은 한 개인의 힘으로선 힘든 작업인 만큼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 중심의 반쪽짜리 한국사 교과서가 아니라 하북성의 요서를 호령하고 웅대했던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제혁명과 정치혁명을 통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것처럼 역사혁명을 통해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영어와 중국어로도 번역한 책을 펴낼 계획이다.

“우리 역사를 과대포장하자는 게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가르치자는 겁니다. 그래서 자랑스런 역사는 재현하고, 치욕스런 역사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거죠.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국민의 의지입니다. 역사를 바로잡는 데 우리 국민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나서야 합니다. 역사를 바로 세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회복하는 역사 광복은, 남북통일과 함께 이 시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