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KID) 원장은 대한민국 경제 신화의 ‘숨은 주역(主役)’이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치적(治積)인 굵직한 경제개발 계획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당시 그에게 조국은 삶의 목적이자 희망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한 곳이었지만 자신에게는 ‘1호 국비 장학생’이라는 기회를 주었던 나라이기에 미력(微力)이나마 언젠가는 보답해야 할 대상이었다. 힘들었던 지난 날,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세계 주요 강대국들에게 외면당할 때마다 그가 절망하지 않은 이유는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조국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다. 힘들 때마다 그는 ‘대한민국이 언젠가 세계가 놀랄 경제대국으로 반듯하게 설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키웠다. 서독(현재 독일)정부로부터 첫 경제협력 차관을 받은 지 50년이 지난 지금, 백 원장의 꿈은 현실이 됐다. 그래서일까. 경기도 양평 팔당댐에 가면 기분이 좋은 나머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라며 고복수의 ‘짝사랑’을 부르는 박정희 대통령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은 한국 경제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뒤로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방문 당시 사진이 걸려 있다.
-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은 한국 경제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뒤로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방문 당시 사진이 걸려 있다.
- 1964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의 서독 국빈방문 당시, 에르하르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통역하고 있는 백영훈 원장(가운데).
- 1964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의 서독 국빈방문 당시, 에르하르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통역하고 있는 백영훈 원장(가운데).

올 초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KID) 원장은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펑펑 울었다. 동(同) 시대를 살았기에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갱도 붕괴로 쓰러진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의 입에서 탄가루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에서 백 원장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광부·간호사 파독(派獨)을 기획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못사는 나라였던 시절, 독일 코메르츠은행(Commerzbank)에 예치된 파독 광부·간호사들의 한 달 치 월급을 담보로 받아온 3000만 달러 경제협력 차관은 경제 발전의 희망이 됐다. ‘맞아! 광부 개개인의 삶이 이토록 처절하고 힘들었지’라고 옛 생각을 하니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백 원장과 독일(당시 서독)의 인연은 각별하다. 그에게 독일은 한국 다음으로 소중한 나라다. 자신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 준 은인과 같은 나라다. 조국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부국(富國)의 반열에 오르리란 희망을 준 곳이 바로 독일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좌우 이념에 의해 나눠진 분단국가라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기에 독일은 그에게 사람만이 희망이자, 자산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줬다. 실제로 우리 경제 도약의 발판은 독일이 마련해줬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언제나 백 원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려대 상대와 이듬해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청년 백영훈에게 1956년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해다. 당시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전후(戰後)였기에 정치, 사회 모두 혼란스러웠으며 경제는 처참했다. 1955년 방한(訪韓)한 유엔 한국재건위원회(UNKRA)에서 특별조사단장을 맡은 인도 대표 메논이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겠는가”라고 결론 내릴 정도로 대한민국의 경제상황은 심각했다. 조사를 마친 메논은 ‘한국에서 희망이란 허황된 꿈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대학을 다니던 청년 백영훈은 고려대 시절 은사로부터 서독 경제 발전상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서독은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이자, 전쟁을 경험한 나라다. 비록 미국의 마셜플랜(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에 행한 대외원조계획)에 따라 지원을 받았지만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내 ‘라인 강의 기적’을 만들었기에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청년 백영훈의 가슴이 순간 흔들렸다.

‘도대체 어떤 나라이기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과연 서독의 저력은 무엇일까.’

그러던 중 청년은 1956년 어느 날 신문에 난 국비장학생 모집 공고를 보게 된다. 15명이 응시하고 한 명만 뽑는 시험에서 첫 국비장학생의 영광은 그의 차지가 됐다. 물론 행선지는 서독이었다.

“1956년 겨울 당시 여의도비행장에서 주머니에 달랑 10달러를 넣고 홍콩으로 가는 노스웨스트항공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주변에 누가 국제선을 타본 사람이 있었어야죠. 기내식도 돈 내고 먹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스튜어디스가 주는 음식은 무조건 사양하고 6시간 동안 쫄쫄 굶으며 홍콩까지 간 기억이 납니다. 홍콩에 도착해 노점에서 바나나를 사먹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그리고 거기서 다시 태국항공, 인도항공 등으로 갈아타고 이탈리아 로마까지 가는 데 꼬박 3일이 걸렸습니다. 로마에서는 루프트한자를 타고 서독으로 들어갔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눈물 나는 일입니다.”

1959년 백 원장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뉘른베르크에 위치한 에를랑겐-뉘른베르크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해방 이후 경제학으로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는 백 원장이 최초다. 우여곡절 끝에 박사학위는 받았지만 꿈에 그리는 고국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귀국행 비행기를 탈 만한 경제적 여력이 없어서였다. 백 원장의 딱한 소식은 당시 손원일 초대 서독대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백 원장은 이승만 정부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게 1959년 12월 무렵이다. 28세의 나이에 드디어 그는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에 임용됐다. 


- 백영훈 원장이 1961년 경제협력 사절단과 함께 서독(현 독일)을 방문했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백영훈 원장이 1961년 경제협력 사절단과 함께 서독(현 독일)을 방문했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해방 후 독일 경제학 박사 1호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사회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장면 정부를 몰아낸다는 명분을 내걸고 쿠데타를 감행한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과 기성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명분을 내건 군부가 빠른 시간 내 여론을 수습하는 길은 경제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발(發) 쿠데타가 아시아 전역(全域)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미국 케네디 정부는 군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은커녕 돈줄부터 죄기 시작했다. 또 다른 원조 루트를 찾아야 한다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 군부의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서독이었다. 그리고 서독과 돈독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독일어가 유창한 친독(親獨)인사부터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백 원장(당시 중앙대 교수)과 군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백 원장은 즉각 서독 차관을 유치하기 위한 전략 마련에 돌입했다. 하지만 국제 신인도 자체가 전혀 없었던 당시 한국에 독일이 선뜻 돈을 빌려주기란 불가능했다. 다행히 당시 서독 재무성 장관이었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1897~1977)는 경제학자 출신으로 백 원장의 독일 유학시절 은사였던 프리츠 포이크트(Fritz Voigt) 교수와 친분이 있었다.

“에르하르트 장관과 면담을 주선해달라며 교수님을 찾아가 1주일 동안 울면서 애원하다시피 했습니다. ‘국가가 날 파견했으니 좀 도와 달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았어요. 미국 케네디 정부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독일 정부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겠죠. 아무리 요청해도 안 되니까 나중에는 사모님(포이크트 교수의 부인)까지 설득했어요. 그래서 다행히 에르하르트 장관 대신 베스트릭(Westrik) 재무성 차관과의 면담이 주선됐죠.”

1961년 11월2일 한국과 서독은 역사적인 3000만 달러 규모의 경제협력 차관 제공 협약을 체결했다. 우여곡절 끝에 차관을 이끌어낸 당시가 생각났는지 백 원장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그러나 얼마 못가 난관은 다시 등장했다. 경제협력 차관을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지급보증 문제에 부딪쳤던 것이다. 당시 서독 정부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해서는 제3국 은행의 지급보증 이행 약속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전 세계 그 어떤 은행으로부터도 지급보증을 받을 능력이 없었다. 

“정래혁 당시 상공부 장관을 비롯해 대표단을 서울로 보내고 혼자 서독에 남아 한 20여일을 전전긍긍했어요. ‘어떻게 받은 차관인데’라고 생각하니 눈물도 나고…. 그러던 중 함께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슈미트라는 친구가 저에게 대뜸 ‘너희 나라에 실업자 많지?’라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지’라고 대답했더니 다음날 노동부 국장을 데리고 와서 서류를 내미는 거예요. 거기에는 차관 제공의 담보로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파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죠.”

산업화가 한창이던 당시 서독은 중요 지하자원인 석탄을 캐낼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러나 지하 1㎞를 내려가 지열(地熱) 40℃를 이겨내며 작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근 국가에서 노동력을 수입해 와서 현장에 투입해도 고된 노동 강도 때문에 며칠 만에 그만두기 일쑤였다. 때문에 당시 파독 광부, 간호사의 한 달 치 월급을 담보로 잡고 차관을 제공하는 것은 한국-서독 양국 모두에게 ‘윈-윈’(Win-Win)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에 등장하는 광부 ‘덕수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함께 파견된 간호사들도 몸을 사리지 않고 환자 치료에 나서자 서독 언론은 연일 이들의 활약상을 보도하며 ‘코리아의 천사들’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집권 기민당 정부는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공식 초청했다. 서독이 아시아의 가난한 분단국가 정상을 국빈으로 초청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 백영훈 원장은 곤노 도쿄대 교수의 조언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도체산업 육성을 건의했다.
- 백영훈 원장은 곤노 도쿄대 교수의 조언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도체산업 육성을 건의했다.



광부·간호사 월급 담보로 원조 차관 받아

화제(話題)가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이 국빈 자격으로 독일을 방문한 것으로 흐르자 백 원장이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정확히 50년 전 통역 자격으로 박 전 대통령과 서독을 방문한 당시가 떠올라서였을까. 그는 인터뷰에서 함보른 탄광 공회당(公會堂)에서 파독 근로자를 대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 여러분이 이 먼 타지까지 나와 고생이 많습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라며 눈물을 흘린 것과 본-쾰른 간 아우토반(Autobahn)을 타고 가던 중 박정희 대통령이 중간에 내려 땅바닥에 입맞춤을 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독재를 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국가 경제를 키우기 위한 노력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1964년 방독(訪獨)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죽고 있다’며 울먹이자 에르하르트(당시 서독 총리)가 감명 받은 듯 손을 잡으며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제가 옆에서 통역을 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해요.”

당시 서독으로부터 제공 받았던 3000만 달러 경제협력 차관은 경제 도약의 발판이 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 자금으로 당시 박정희 정부는 나주 비료공장을 비롯해, 인천 한국기계, 삼척 동양시멘트 공장 등 전국 여섯 곳을 기간산업 대상지로 확정하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1964년 서독 방문에서 “한국이 경제를 성장시키려면 고속도로와 같은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당시 칼 하인리히 뤼브케 (Kahl Heinrich Lubke·1894~1972) 대통령의 조언을 받아들여 박정희 정부는 1968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고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세웠다.

이밖에 당시 유럽에서 가발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데서 착안, 전국적으로 가발 생산을 유도하도록 한 것도 백 원장의 아이디어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서독 차관 도입 3년 만인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월남전 특수(特需)를 맞은 국내 건설업계의 물꼬를 중동지역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준 것도 백 원장의 공이 컸다. 무분별한 국토 난개발을 우려해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제도를 기획한 이도 백 원장이다.

백 원장은 곤노 아키라 도쿄대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자산업 육성을 제안한 일화도 털어놓았다.

“하루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저를 불러 지한파(知韓派) 일본인 학자를 알라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수소문해 5~6명을 추렸는데, 곤노 아키라 교수가 바로 그 중 한 사람이었죠. 당시 곤노 교수가 그러더군요. 한국경제가 성장하려면 전자산업, 반도체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러면서 곤노 교수는 일본보다 한국이 반도체 성공에 유리한 이유로 3가지를 들었어요. 우선 반도체를 만들려면 공기가 깨끗해야 하는데, 일본은 태평양에서 소금기가 섞인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죠. 그리고 두 번째로 일본의 지하수는 상당수가 흙이 섞인 반면 한국은 화강암반수로 물이 일본보다 깨끗하니 유리하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경북 안동에 댐을 만들어 인근에 공단을 조성하라고 구체적으로 제안했습니다.마지막 세 번째로 ‘일본, 중국인이 나무젓가락을 쓰는 것과 달리 한국사람들은 쇠 젓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손재주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의 탁견(卓見)에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대통령께 바로 보고 드렸더니 경남 마산과 인천 부평을 수출자유구역으로 정하고 관련 산업을 육성하시더군요.”

백 원장이 원장으로 있는 KID는 지난 1965년 설립된 국내 최초 경제연구원이다. KID는 경부고속도로 등의 물류 인프라와 구미공단, 여천공단 등 산업공단을 개발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밖에도 KID는 중소기업중앙회 설립을 돕고, 중소기업 전담은행인 기업은행을 만드는 것도 제안했다. 


“제조업 시대는 갔다, 이제는 농업이다”

경제 도약의 산파(産婆) 역할을 한 백 원장은 현 경제상황에 대해 “제조업과 재벌 주도의 시대는 갔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농업 △물류업 △문화관광산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특히 그는 농업혁명이야말로 한국 경제를 4만 달러 시대로 이끌어줄 확실한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전국의 수많은 야산에 유실수를 심어 질 좋은 과일을 많이 생산해야 합니다. FTA(자유무역협정)로 농업의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는데, 저는 이런 때일수록 농업에 길이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농업 혁명은 정부 주도가 아닌 범국민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농업은 21세기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평택항 등 중국과 인접한 지역을 개발해 물류산업을 키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네덜란드처럼 말이죠.”

이와는 별도로 백 원장은 반세기 넘게 동반자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독일과의 긴밀한 협력을 위해 경기도 양평에 300가구 규모의 독일인 마을을 조성하는 사업도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15~17세기가 스페인, 18~19세기가 영국, 20세기가 미국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아시아·태평양의 시대라고 합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나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한 나라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왜냐면 한국사회에는 아직까지 도덕성이 살아 있고, 문화에 혼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쓰는 한글은 표현력이 풍부하죠.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 경제는 지금보다 한층 더 성장할 겁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앉은 책상 옆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적힌 작은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내 一生(일생) 祖國(조국)과 民族(민족)을 爲(위)하여
1974. 5.20. 大統領(대통령) 朴正熙(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기 위해 생전에 즐겨 쓴 표현이지만, 백 원장이 지난 반세기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이유를 설명하는 문구(文句)로도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백영훈 원장은…

1930년 전북 김제 생, 55년 고려대 경제학과 졸, 56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58년 독일 에를랑겐-뉘른베르크대 경제학 박사, 59~76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82년~ 현재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 9·10대 국회의원, 2002년 독일 대십자훈장 수상.
저서 : <한강에 흐르는 라인 강의 기적>, <대한민국에 고함>, <조국 근대화의 언덕에서>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