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동 동서한방병원 이사장은 “급성질환은 양방이 효과를 거두겠지만, 만성질환은 한방이 크게 주목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박상동 동서한방병원 이사장은 “급성질환은 양방이 효과를 거두겠지만, 만성질환은 한방이 크게 주목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1999년 봄.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아들과 함께 병원을 찾아왔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그는 손에 수건을 들고 얼굴을 연신 문지르고 있었다.

“원장님, 저~ 좀 살려주세요. 말 좀 똑바로 하게 해주세요…. 이틀 전부터 몸 왼쪽이 힘이 없어요. 어지러우면서 약간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해 춘곤증 정도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몸이 푹 주저앉지 않겠습니까.”

남자의 말투는 이미 어눌해진 상태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분명 또렷한 말투는 아니었다.

남자는 한의사로 보이는 사람의 의사 가운을 붙잡고 통사정을 했다.

“고쳐드릴 테니 편안한 맘부터 가지세요.”

한의사는 남자를 진정시킨 뒤 침으로 손끝에 피를 냈다. 피를 빼내 혈액순환을 돕는 이른바 사혈(瀉血) 요법이다. 그런 다음 침대에 눕히고는 구급혈에 침을 놓았다. 20분 정도 흘렀을까. 침을 빼니 남자의 손발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말도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고맙습니다. 원장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남자에게 한의사는 충고의 말을 이어갔다.

“일과성 뇌허혈이라서 다행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증상이라 바로잡을 수 있었지만 방치하면 재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뇌경색으로 진행될 수도 있고요. 입원해 치료를 받는 것이 환자분을 위해 도움이 될 겁니다. 행여나 돈 걱정 때문에 그렇다면 그냥 쉬어간다고 생각하고 치료부터 받으시죠.”

고민 끝에 남자는 입원을 결정했다. 하지만 입원비가 없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말처럼 무작정 공짜로 지낼 수만은 없었다. 결국 남자는 병원비 대신에 매일 빵과 우유를 사와 진료실 앞에 쪽지와 함께 놓았다.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있었다.

“원장님, 배고플 때 드세요. 제 마음을 표시할 게 이것밖에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입원 1주일 만에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다. 남자를 치료한 한의사는 국내 중풍 치료 최고 권위자로 손꼽히는 박상동(朴尙東) 동서한방병원 이사장이다. 1971년 동서한방병원 전신인 박상동한방의원을 연 박 이사장은 지금까지 중풍 치료에만 주력했다. 그 결과 동서한방병원은 중풍 치료 전문의료 기관으로 유명해졌다.

현재 병원이 들어선 서울 연희동 본원 부지는 조선조 2대 국왕인 정종이 동생인 태종에게 양위한 뒤 살았던 연희궁(衍禧宮)이 있던 자리다. <증보문헌비고> 등에 따르면, 연희궁은 조선조 국왕들이 사냥 전 잠시 휴식을 취하던 휴양소 용도로 쓰였다. 박 이사장이 이곳에 병원을 세운 것은 1984년 무렵이다. 그전까지 박 이사장은 서울 세종로 광화문 사거리 세광빌딩에서 박상동한방의원을 운영했다.

박 이사장이 중풍 치료에 남다른 실력을 선보인 것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중풍은 한번 걸리면 절대로 완치할 수 없는 무서운 질병이었어요. 그러니 다들 기피할 수밖에요. 하지만 저는 왠지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전국에서 중풍 치료에 전문가라고 하는 한의원은 다 찾아가, 눈으로 직접 어떻게 치료하는지 봤습니다. 그걸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훗날 한방의원 운영에 큰 도움이 된 겁니다.”

광화문 시절 그의 한방의원은 건물 9층 꼭대기에 있었다. 한의원 입지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엘리베이터 없이 오로지 계단을 이용해 한의원을 찾아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환자를 잘 본다는 소문 덕분에 박 이사장은 처음부터 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입소문이 나자 박 이사장은 중풍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한방병원 설립을 결심했다. 이렇게 생겨난 것이 동서한방병원이다. 당시 일개 한방의원이 특정 질환 치료를 위해 독자적으로 한방병원을 설립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1984년 3월 10일 동서한방병원은 국내 의학계의 큰 관심 속에 50병상 임직원 60명, 한방과 양방 등 9개 진료과로 구성된 한·양방 협진 전문 의료기관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 박상동 이사장(오른쪽)이 김남일 학장과 중풍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박상동 이사장(오른쪽)이 김남일 학장과 중풍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식생활 변화로 20~30대 중풍 환자 늘어나
박 이사장에 따르면, 중풍의 원인은 지나치게 짜게 먹는 식습관과 관련이 깊다. 그는 “요즘은 환경과 식생활 변화 등으로 20~30대 젊은 층에서도 중풍 환자가 늘어나는 추세”라면서 “한쪽 손이나 다리가 저리고 힘이 없거나, 기억력이 떨어졌다고 생각되면 전문병원을 찾아가 검진을 받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앞서 예로 든 60대 남자처럼 일과성 뇌허혈 발작(TIA)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 TIA 증상을 경험한 환자 중 10~30%는 6개월 이내에 뇌경색이 발병한다. 그렇다면 TIA가 생기는 원인은 무엇일까. 박 이사장은 “심장, 대동맥, 경동맥 등에서 혈액이 응고돼 만들어진 혈전이 뇌로 가는 혈관을 막는 것과 뇌혈관 중 좁아진 부위에 순간적으로 혈류가 감소하면서 뇌에 혈액공급이 줄어지는 경우”라고 설명했다.

박 이사장은 중풍 치료에 있어 침, 뜸, 한약 외에 아로마테라피를 활용한 향기요법도 사용한다. 그는 <동의보감> 신형장부도에 등장하는 옥침관, 녹려관, 미려관 등 삼관대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관대는 오장육부와 양생(養生·오래 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병에 걸리지 않게 노력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기가 상체와 하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요한 통로다. <동의보감> 내경편에는 일시적으로 목이 쉬어 말을 못하는 경우 족소음경맥에 침을 놓으라고 돼 있다. 박 이사장에 따르면, 말을 못하게 되는 것은 탁한 기운이 위로 치밀어 혀(舌)쪽으로 몰린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족소음경맥은 혀와 연결돼 있다. 이 부위의 혈맥을 찔러 나쁜 피를 내보내면 금세 언어 구사가 가능해진다.

2004년 박 이사장은 가톨릭의대 신경외과 전신수 교수팀과 공동으로 양릉천이라는 혈 자리에 침을 꽂는 침술이 중풍 치료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살펴보는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팀은 MRI(자기공명영상) 기기를 활용해 양릉천에 침을 놓았을 때 뇌의 운동피질이 활성화되는 것을 의학적으로 증명했다.

<동의보감> 침구편을 보면, 무릎 바깥쪽에 위치한 양릉천은 근육관련 질병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 양릉천을 침으로 자극하면 족소양담경이라는 혈을 따라 옆머리와 눈, 귀, 열병, 정신병이 치료되는 데 효과가 있다. 박 이사장은 “머리 쪽에 피가 돌지 않아 중풍이 왔는데, 하체에 침을 놓아 치료한다는 것에 대해 양방 의료진이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MRI 기기로 입증하자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 박 이사장은 “중풍의 원인은 지나치게 짜게 먹는 식습관과 관련이 깊다”고 말했다.
- 박 이사장은 “중풍의 원인은 지나치게 짜게 먹는 식습관과 관련이 깊다”고 말했다.

중풍 환자에게 침 특효 MRI로 입증
박 이사장은 한의학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했다. 1990년부터 8년에 걸쳐 대한한방병원협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한의사 전문의제도(1996년)를 추진해 관철시켰다. 한의사를 군의관 내지는 공중보건의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박 이사장의 아이디어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65년 동양의과대학(경희대 한의대 전신) 총학생회장 시절에는 의료법 제14조 제2항을 개정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개정 법률안은 한의사 면허자격을 ‘국공립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과대학 과정 중 최종 2년간 한방의학과에서 한방의학을 전공한 자로서 한의학사의 학위를 받고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로 규정했다. 한의대를 의과대 아래로 두는 조치는 한의계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박 이사장은 단식 투쟁을 통해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의료법 제14조 제2항은 개정돼야 하며 동시에 한의과대를 일반의과대와 같은 6년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정부는 한의계의 항의를 받아들여 관련법을 개정했다.

한의사 외에도 박 이사장은 1971년 연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아 세무사로도 활동했다. 실제로 박 이사장은 서울 신촌에서 서강회계사무소를 개설, 운영했다.

중풍 치료에 산소치료기를 도입한 것은 동서한방병원이 국내 최초다. 산소요법이란 특수기기 내 대기압보다 높은 기압환경을 만들어 고농도(100%) 산소를 일정시간 동안 계속 흡입하게 하는 치료법이다. 러시아 우주센터에서 최초로 개발된 산소기기를 국내에 들여오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기계 값도 비싸지만 기기가 차지할 공간도 상당했다. 특히 산소탱크를 설치할 공간이 많이 필요했다. 여기에 러시아 기술자 두 명도 상주시켜야 했다.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고농도의 산소를 불어넣으면 혈중 용해되는 산소나 헤모글로빈과 결합하는 산소가 늘어나 각 세포 조직들의 재생력이 향상되는 효과가 있다. 특히 산소기기는 뇌졸중, 만성질환이나 치매성노인질환, 당뇨합병증 환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박 이사장은 “한방의 경쟁자는 더 이상 양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두 학문 간 소모적인 대결구도는 바뀌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우리 병원에서 근무한 양방 의사들은 침, 뜸 등 한방의 효능에 대해 진심으로 공감을 합니다. 한약을 먹으면 간이 상한다든지, 상당수 한의원들이 중금속에 오염된 중국산 약재를 쓴다는 식의 음해는 갈등만 부추길 뿐이죠. 한의학에서 배울 점이 있으면 배워 양방 의학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봅니다.”

박 이사장은 이미 눈앞에 닥친 고령화 사회에는 만성질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급성질환은 양방이 효과를 거두겠지만, 만성질환에 있어서는 한방이 크게 주목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5000년 역사의 한방은 세계 의학으로 발전시킬 요건이 충분합니다. 지금도 한방은 양방에서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을 자연치료 방식으로 고치고 있죠. 최근 연구에 따르면 퇴행성 질환에 있어 약침이 큰 효과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정부도 보험 관련 규정을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한의원에서 치료받는 것 상당수를 비급여로 막고 있으면 이는 국민건강 증진 차원에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박상동 이사장은
1940년 경북 의성 출생, 1966년 경희대 한의과대 졸, 1971년 연세대 경제학 석사, 1999년 경희대 한의학 박사, 1985년 중국문화대 경제학 박사, 1965년 경희대 총학생회장, 1988년 국제라이온스협회 309(한국)복합지구 총재협의회 의장, 1996년 대한한방병원협회장, 2002년 경희대 총동문회 회장 역임, 1984년~현재 동서한방병원(제민의료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