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9일 경기 고양 사법연수원 9층 석좌교수 집무실에 들어서자 그윽한 먹향이 먼저 기자를 맞이했다. 먹향을 따라 말끔한 정장, 발가락 양말에 슬리퍼를 신은 노신사가 인사를 건넸다. 올 9월 16일 32년간 법관 생활을 마치고 사법연수원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 민일영 전 대법관(60·사법연수원 10기)이다. 처음 보는 기자에게 “어서 와요”하며 손을 잡아 주었을 땐 최고 법관의 권위보다는 아버지 같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민일영 전 대법관은 퇴임식에서 “법관은 당사자가 법정에 섰을 때 엄숙함을 느끼게 하되 재판장을 마주했을 때의 온화함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민 전 대법관은 그의 당부 말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민 전 대법관은 1983년 서울민사지법에서 판사를 시작해 대구고법 판사,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 서울고법 판사, 서울지법·대전고법·서울고법 부장판사, 법원도서관장, 청주지법원장 등 요직을 거쳤다. 2009년 9월 대법관이 됐다.

민 전 대법관에게 대법관으로 살던 삶과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법관의 모습, 또 만능주의로 오해 받을 수도 있는 사법적극주의 등에 대해 물었다.

월화수목금금금 “아버지 같이 살고 싶진 않아요”
퇴임식에서 민 전 대법관은 사법 신뢰를 높이기 위해 상고법원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고법원은 상고심(3심) 사건 중 단순한 사건만을 별도로 맡는 법원을 말한다. 그는 “올 연말까지 대법원에 4만2000건의 사건이 접수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대법관 13명과 재판연구관들이 아무리 ‘월화수목금금금’ 일해도 벅찬 살인적인 수치. 현재 상황으론 사법 신뢰를 언급하는 자체가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월화수목금금금’ 생활에서 벗어난 그가 퇴임 후 두 달을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했다. 보통 고위 법조인들은 공직을 마치면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경우가 많아 “어디 좋은 곳 다녀오셨나요”라고 물었다.

“그것도 일이야. 해외여행 안 갔어. 쉬고 싶어서 잠만 잤어.”

시간 날 때마다 잠만 잤다니 대법관 생활이 얼마나 고됐는지 일화 소개를 부탁했다. 민 전 대법관은 공익법무관으로 복무 중인 큰 아들과 대화를 소개했다. 일요일 늦은 밤에도 집에서 기록을 넘기고 있는 민 전 대법관에게 큰 아들이 “아버지는 명색이 최고 법관인데 일요일 밤 늦은 시간까지 서면을 봐야 하니 나는 그렇게 일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행히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다니는 작은 아들은 민 전 대법관에게 “아버지 같은 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6년간 새벽 1시에 잠자리에 들어 6시에 일어났다. 대법관 전원이 모여 논의하는 전원합의체 주심이라도 맡게 되면 잠을 더 줄여야 했다. 전원합의체는 주심 대법관이 자료와 법리를 준비해 대법원장은 물론 다른 대법관에게 질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대법관에겐 자존심을 건 프리젠테이션이다.

“법관이 법밖에 몰라, 무식하다”
잠이 부족해도 오랫동안 이어온 판소리와 서예는 꾸준히 했을 거란 생각에 판소리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소리꾼이 분위기 환기를 위해 손으로 부채를 ‘딱’하고 손으로 치는 듯하다.

“법관들이 너무 무식해. 법밖에 아는 것이 없어.”

그는 사법연수원 1학년이나 법관 연수생 등 후배 판사들에게 취미를 가질 것을 권한다. 그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법관은 삶을 윤택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 전 대법관의 취미는 판소리와 서예다. 그러나 대법관 재임 6년 동안 그는 두가지 취미를 동시에 이어갈 수 없었다.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취미생활을 이전보다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영화 서편제를 보고 감동 받아 시작한 판소리는 그를 판소리 전도사로 만들었다. 법원 행사가 있으면 민 전 대법관은 행사 기획 판사에게 판소리를 강력 추천했다. 몇 해 전 사법연수원 특강에도 민 전 대법관의 권유로 판소리가 포함됐는데 특강 후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그해 가장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접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우리 소리를 접하면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후배 법관이 판소리의 매력을 알았으면 하는 그의 바람은 판소리의 소통 능력 때문이다. 서양 공연은 정해진 시간에만 박수를 치는 등 형식에 치중하지만 판소리는 공연 도중에도 “좋다”, “얼씨구” 하며 같이 어울릴 수 있다. 소리꾼과 북 치는 고수, 관객이 하나가 된다.

민 전 대법관은 “법관의 판결도 판소리처럼 가슴에 와 닿아야 사법신뢰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연거푸 강조했다.

‘청송지본 재어성의’ 판소리처럼 공감 가야 사법신뢰 회복
민 전 대법관은 민사 항소부에 있을 때 사무관들이 피하고 싶은 법관 1위였다. 다른 재판부는 오후 6시면 재판이 끝났지만 민 전 대법관 재판은 오후 9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사무관이 불만을 토로하면 민 전 대법관은 “당사자들은 법원 오는 것이 평생 한 번일 수도 있는데 일주일에 한번 늦게 퇴근하는 것이 뭐가 대수냐”고 꾸짖었다. 그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 중 ‘청송지본 재어성의(聽訟之本 在於誠意·재판의 근본은 성의를 갖고 듣는 것에 있다)’를 법관의 최고 덕목으로 꼽는다.

민 전 대법관은 “보통 판사들이 수백건의 사건을 가지고 있지만 아는 내용이라고 말 못하게 하거나 오래 걸리니 서면으로 내라고 하면 누가 승복하겠냐”고 지적했다. 민 전 대법관은 “재판(裁判)이 아니라 청송(聽訟)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며 “송사를 충분히 듣지 않으면 재판 당사자들이 납득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민 전 대법관은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성의껏 설명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민이 보기엔 재판용어가 외계어”라며 “변호사가 있다고 자기들끼리 아는 전문 용어로만 재판을 진행하면 당사자들은 재판이 잘 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판사가 풀어서 친절하게 설명해 줘야 한다”고 했다. 그는 판사들이 정성을 다해 듣지 않으면 사법신뢰는 요원하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의 진정한 역할은 전원합의체
민 전 대법관은 대법원이 제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전원합의체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했다. 통상임금 적용 기준, 변호사의 형사사건 성공보수 약정 무효, 가정파탄에 책임 있는 배우자의 이혼청구 여부(유책주의) 등 전원합의체에서 내린 판결은 사회의 새로운 기준이 됐다.

전원합의체는 사법 최고의결기관으로, 대법원장과 대법관 13명이 참여한다. 대법원은 4명이 하나의 소부를 이뤄 재판한다. 대법원에 올라온 사건들은 각 소부에서 먼저 심리한다. 소부 대법관들의 이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사건이 종전에 대법원에서 판시한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을 경우 전원합의체에서 논의하게 된다. 주요 사건이 대법관 전원의 판단을 받게 되면 대법원 판결에 무게가 실리게 된다. 판결문에 반대의견이 명시돼 소수자 권익보호에도 바람직하다.

전원합의체 판결은 혼란을 일으키는 이슈에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2013년 통상임금 범위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 판결이 그랬고, 2006년 새만금 간척종합개발사업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판결, 2012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적법 판결도 그랬다. 몇 년 동안 빚어진 사회적 갈등이 전원합의체 판결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일각에서는 사법권의 권한이 커져 입법부의 권한까지 행사하는 사법적극주의가 확대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에 대해 민 전 대법관은 “사법적극주의로 비치는 판결은 사법부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법원으로 넘어온 사건이 대부분”이라며 “법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됐다”고 꼬집었다.

민 전 대법관은 지난 6년간 대법관으로 재직하면서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사업’, ‘안기부 엑스파일’ 등 사건에서 전원합의체 주심을 맡았다.

대법원이 변호사의 형사사건 성공보수 약정을 무효로 본 판결에 대한 법조계 반발을 그에게 전했다. 그는 성공보수 약정 무효는 선진 사법으로 가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민 전 대법관은 “너무 창피한 일”이라며 “문명국가에서 성공보수를 인정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밖에 없었다. 이제 일본만 남았다”고 했다. 그는 “혼란이 생길 수 있지만 지금까지 그 혼란이 무서워 가야 할 길을 안 간 것”이라며 “대법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고도 했다.

그는 “예전에는 법조인들이 일본 제도와 책을 공부했지만 이제는 일본이 우리나라 사법제도를 배우러 오고 있다”며 “선진 사법의 길은 일본이 아닌 세계 기준에 맞춰야 한다”고 했다.

사법연수원 앞으로 역할은 법관연수
민 전 대법관은 사법연수원에서 재판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통해 법관으로서의 사명감과 자긍심을 고양하기 위한 강의를 하고 있다. 민 전 대법관은 바람직한 재판구현 방법, 법정언행에 관한 연수를 확대·강화할 계획이다.

민 전 대법관은 “사법고시 폐지로 연수생이 들어오지 않아도 사법연수원 기능에는 영향이 없다”며 “연수원 원래 기능은 법관연수 기능이 더 컸다”고 설명했다.

그는 외국 법관 강의에도 특강에 나선다. 연수원은 베트남, 네팔, 몽골 등 아시아 국가 뿐 아니라 페루, 콜롬비아 등 남미 국가, 나이지리아, 르완다 등 아프리카 국가 법조인을 초청해 연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연수원이 로스쿨 지원 업무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판소리 만큼이나 서예를 좋아한다. 그는 서예가 스트레스 해소에 특효약이라고 소개했다. 판사의 판결이 한 개인이나 법인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판사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민 전 대법관은 “서예에 집중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일종의 머리 ‘포맷’”이라고 했다.

품위유지 7000원이면 충분, 호 바꾼 사연
대법관 출신의 품위유지비용은 얼마나 들까. 그에게 물었다. “서예가 끝나고 예술의 전당 앞 백반집에서 밥을 먹는데 7000원이야. 고등어 구이도 나오고 가정식 백반인데 맛이 좋아. 1만원씩 내는데 남는 3000원은 모아서 연말에 파티를 열지.”

그는 예술의 전당에 있는 서예 교실을 다닌다. 10대도 있고 80대도 있다. 그의 호는 ‘범의(凡衣)’였다. 법관이지만 평범한 옷을 입고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으로 판단하자는 뜻이다. 법관 30여년 동안 그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판결에 임했는지 보여주는 호다.

앞으로 꿈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최고 법관까지 했는데 무슨 꿈이 있겠어. 장강은 앞 물결이 뒷물결에 물러나게 돼 있는 거야”라고 했다. 그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법복을 벗고 호도 바꿨다. 또 우(又), 백성 민(民) ‘우민’이다. 법관에서 다시 일반 국민이 됐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