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조동혁 한솔그룹 명예회장
왼쪽부터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조동혁 한솔그룹 명예회장

종이 산업이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종이는 정보의 기록과 저장 공간에서 물건을 담는 도구로 바뀌고 있다. 종이의 역할이 달라진 것이다.

한솔그룹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룹 주력 회사 한솔제지는 2000년대 중반부터 성장 절벽에 부딪쳤다. 내수 시장은 포화 상태에 이른데다 싼 가격을 무기로 한 중국 업체들의 거센 추격까지 받았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지 몇 년 만에 주력 사업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 빠졌다. 작년 한 해 동안 한솔그룹은 지주사 전환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상대적으로 각 계열사들은 숨고르기를 한 시간이었다.

이제 오너 일가의 그룹 지배력이 다시 확대되고, 지주사 전환 작업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10년 전 한솔제지가 눈을 돌렸던 고부가가치 종이 사업은 빛을 보고 있다. 그룹 장자격인 한솔제지는 빚에 허덕이던 동생들을 돕던 일을 지주회사 한솔홀딩스에 맡기고 한 단계 도약을 준비 중이다.

선대 회장인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새한제지를 인수한 지 반세기가 지났고, 사명을 전주제지로 바꾸면서 이건희 회장의 삼성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지도 25년이 흘렀다. 한솔그룹은 그동안 재계 순위 10위권에서 50위권으로 추락했지만 ‘내실 경영’이라 말했던 고난의 시절에서는 벗어나고 있다.


한솔그룹의 정신적 지주 이인희 고문 경영 이끄는 삼남 조동길 회장

‘범 삼성가(家)’란 테두리에 속하는 한솔그룹은 큰 부침 없이 수십년을 버텼다. 항상 꾸준한 수요가 있는 제지업을 주력으로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한솔그룹을 이끌어 온 이병철 회장의 장녀 이인희(88) 고문의 리더십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이 고문은 1991년 전주제지를 삼성그룹에서 분리한 뒤 한솔이란 이름 아래 종합제지회사로 키웠다. 선대 회장의 ‘인재 경영’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한솔 식구들의 처우도 삼성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유지했다. 한솔제지는 맹렬히 추격하는 다른 제지업체들을 따돌리고 1위를 고수했다.

그러나 한솔그룹도 1998년에 불어닥친 외환위기를 피하진 못했다. 이때는 한솔그룹이 본격적인 외형 확장에 나선 시기였다. 이 고문의 장남 조동혁(66) 한솔그룹 명예회장, 차남 조동만(63) 한솔그룹 전 부회장, 삼남 조동길(61) 한솔그룹 회장은 각각 한솔의 금융업, 정보기술(IT)사업, 제지사업을 맡았다. 한솔의 본격적인 3세 경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금융업과 IT가 외환위기라는 한파를 이겨내지 못했다. 제지업 국내 1위라는 한솔그룹의 탄탄한 뿌리가 휘청일 정도였다. 결국 이 고문이 다시 전면에 나서서 회사를 살려냈다. 뼈를 깎는 고통이 따랐지만, 과감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당시 PCS 018 사업자였던 한솔엠닷컴은 KT에 넘겼고, 선대 회장이 제지업을 시작한 이유였던 신문용지 사업부문도 팔았다.

이후 한솔그룹은 조동길 회장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회사 살리기에 앞장섰던 이 고문은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 고문은 간간이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한솔그룹 관계자는 “이 고문이 그룹 공식 행사에 마지막으로 참석한 건 2013년 5월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SAN) 개관식”이라고 했다.

조 회장의 한솔은 외형과 내실 모두 성장세를 기록했다. 조 회장은 2002년 취임 때 2조원대이던 그룹 연매출을 5조원까지 키웠다.

조 회장은 한솔그룹 핵심인 한솔제지, 한솔아트원제지, 한솔페이퍼텍 등 제지사업군을 강화하면서 조금씩 외연을 넓혀갔다. 친환경 건축자재 기업인 한솔홈데코, 화학소재를 생산하는 한솔케미칼, IT부품 등 소재를 공급하는 한솔테크닉스 등 소재사업군과 물류 기업 한솔로지스틱스 등을 차례 차례 세웠다.

그리고 창립 50주년인 작년 한솔그룹은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본격 시동을 걸었다.


지주사 전환에 숨가빴던 한솔의 2015년

한솔그룹은 작년 1월 1일 한솔제지의 투자 부문과 사업부문 분할이라는 이정표를 제시했다.

‘한솔로지스틱스→한솔제지→한솔EME→한솔로지스틱스’로 이뤄진 그룹의 순환출자 구조를 ‘지주회사→자회사→손자회사’의 3단계 구조로 만드는 대장정에 돌입한 것이다.

지주사 전환 작업은 한솔제지 존속회사가 사명을 바꾼 한솔홀딩스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자회사의 투자부문과 사업부문을 인적 분할한 뒤 지주사 또는 자회사끼리 합병하는 방식으로 작업 속도를 높였다.

한솔홀딩스는 한솔제지 사업부문의 신설 법인을 자회사로 두고, 한솔로지스틱스도 작년 3월 투자부문과 사업부문으로 인적 분할해 투자부문을 한솔홀딩스와 합병했다. 한솔홀딩스 아래 한솔제지와 한솔로지스틱스 등이 자회사로 있는 지주사의 큰 틀이 마련된 것이다.

이후 한솔그룹은 홀딩스의 자회사인 한솔테크닉스와 한솔라이팅, 한솔EME 간 분할과 합병을 진행했다. 공정거래법은 자회사가 지주사와 다른 자회사의 지분을 함께 보유하는 걸 금지하고 있다.

한솔라이팅은 사업부문을 한솔테크닉스와 합병했고, 한솔테크닉스가 가진 한솔라이팅의 투자부문 주식은 한솔홀딩스 몫으로 넘겼다.

작년 9월에는 한솔홀딩스가 한솔EME와 함께 지분을 보유했던 한솔신텍의 유상증자에 단독 참여, 지분율을 23.6%에서 25.2%로 늘렸다. 한솔EME의 한솔신텍 지분율은 20% 이하로 낮아졌다. 한솔홀딩스는 한솔신텍도 자회사로 거느리게 됐다.

조 회장, 이 고문 등 오너 일가는 작업 착수 1년이 지난 2016년 2월 한솔홀딩스의 최대주주가 됐다. 최대주주에서 물러난 지 6개월 만이었다.

오너가의 최대주주 복귀는 작년 12월 29일 마무리한 한솔홀딩스 유상 증자와 주식 스왑을 통해 이뤄졌다.

한솔홀딩스는 유상증자를 통해 한솔제지의 지분율을 15.33%에서 28.03%로 늘리고, 지분이 없던 한솔로지스틱스의 지분을 7.89%까지 보유했다. 한솔홀딩스는 작년 12월 22일부터 올해 1월 29일까지 진행했던 한솔제지 보통주 210만주, 한솔로지스틱스 130만주 공개 매수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 고문과 조 회장은 주식 스왑을 통해 한솔홀딩스 지분을 크게 늘렸다. 조 회장의 한솔홀딩스 지분은 4.16%에서 6.54%로 증가했고, 이 고문 지분도 2.46%에서 4.68%로 대폭 늘었다.
한솔홀딩스는 한솔제지 지분 20% 이상을 확보해 공정거래법에 정해진 지주사 전환 요건(상장사 20%, 비상장사 40% 이상 보유)을 갖추는 데 한발 더 다가섰고, 오너 일가는 지주사 지분을 늘리며 그룹 지배력을 높였다.

한솔그룹이 새로운 도약을 다짐한 게 2015년이라면, 2016년은 그룹 역사에 획을 긋는 한해가 될 전망이다. 한솔그룹의 지주사 전환 작업은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남은 작업은 자회사 몇개의 지분을 정리하는 것이다. 올해 안에 지주사 체제로 탈바꿈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라고 했다.


지주사 전환 뒤 전세계 10위권 제지업체로 도약 목표

지주사 전환 뒤에도 한솔그룹의 사업 방향이 큰 틀에서 달라지진 않을 전망이다. 한솔제지는 여전히 한솔그룹의 현재이자 미래로 평가받고 있다. 한솔제지가 그룹 성장의 원동력이 돼야 한다는 게 한솔그룹 안팎의 분석이다. 삼성그룹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위상만큼이나 한솔제지의 그룹 내 위상은 막강하다. 국내 제지업계 1위라는 지위도 여전히 공고하다.

그러나 해외로 눈을 돌리면 한솔제지의 숨은 고민을 엿볼 수 있다. 한솔제지의 해외 영향력은 미미하다 못해 초라할 정도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 1위가 세계 10위권 밖으로 벗어난 경우는 이제 흔치 않다. 그러나 한솔제지는 전세계 제지업체 순위에서 40위권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거꾸로 한솔그룹은 “한솔제지의 성장 잠재력이 그만큼 크다”고 해석한다. 지주사 전환 작업에 분산됐던 그룹 역량을 주력인 한솔제지에 투입할 계획이다. 그룹 전체 매출의 50%를 웃도는 해외 시장에 집중하면 승산이 충분하다고 한솔 고위 관계자는 말한다.

한솔제지는 일단 시장이 계속 팽창하고 있는 포장 용지 분야 시장 점유율을 늘려갈 계획이다.

‘종이는 끝났다’는 일반적인 시각과 달리 포장 용지는 오히려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삼성 갤럭시 휴대전화를 담는 상자, 붉은색 오리온 초코파이 상자, 아모레퍼시픽의 화장품 상자 모두 한솔제지의 작품이다. 현재 40% 초반인 포장용지 시장 점유율을 5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단기 목표를 잡았다.

감열지 등 특수용지 사업도 빼놓을 수 없다. 감열지는 매년 5%씩 성장하는 제지업계 유망 시장이다. 감열지는 열에 반응해 색이 변하는 특수지다. 카드 영수증, 고속도로 통행권, 은행 순번 대기표 등에 쓰인다. 한솔제지는 유럽 감열지업체 3곳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제지업 시장 본토로 뛰어들었다. 유럽 시장은 제지업 강자들이 즐비한 곳이다. 한솔제지는 2013년 9월 유럽 최대 감열지 가공·유통업체 샤데스(Schades)를 인수한 데 이어 2014년 8월 네덜란드 최대 라벨 가공·유통업체인 텔롤(Telrol)을 샀다. 작년에는 유럽 두번째 감열지 회사인 R+S Group도 사들였다.

한솔제지는 해외업체 인수를 통해 확보한 유럽 본토 네트워크와 자사의 세계 3위 감열지 생산능력이 맞물리면 고객 확보와 생산 확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솔 고위 관계자는 “특수용지 시장이 계속 팽창하는 만큼 한솔제지도 함께 뛰어오를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삼성맨, LG맨, 한솔맨… 출신 가리지 않는 능력별 포진 CEO

한솔그룹의 인재 중시 철학은 선대 회장인 고 이병철 회장의 철학과 닮았다. 삼성 출신, LG 출신, 정통 한솔맨을 가리지 않는다.

삼성그룹 출신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은 선우영석(72) 한솔홀딩스 대표이사(부회장)다. 선우 부회장은 1993년 한솔그룹에 몸담기 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등을 거쳤다. 그가 한솔그룹에서 처음 맡은 역할은 그룹 대외 업무였다. 삼성물산 해외부문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한솔그룹 초창기 시스템 구축을 주도했다. 그가 한솔그룹으로 옮긴 지 3년 만에 한솔제지는 국내 제지업계 최초로 1억달러 수출탑을 수상했고, 1998년에는 5억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선우 부회장은 지주사 전환이 마무리되면 향후 그룹 내 각 자회사들의 원활한 경영활동을 지원하고 그룹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솔의 주력사업을 이끌고 있는 이상훈(64) 한솔제지 대표이사는 LG케미칼(현 LG화학) 출신이자 화학 분야 전문가다.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그는 LG를 떠난 뒤 한국바스프 화학·무역사업부문 사장을 거쳤다. 2010년부터는 태광산업 대표이사를 역임하는 등 줄곧 화학 관련업계에 몸 담아온 인물이다.

조동길 회장은 이상훈 대표가 화학업계에서 보여준 경영 성과를 높이 평가해 영입에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 회장은 제지업계 바깥 인물이 오히려 제지업계의 당면 과제를 냉철히 바라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박원환(62) 한솔케미칼 대표이사는 한양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솔그룹에 입사한 정통 한솔맨이다. 한솔케미칼 경영지원본부장을 거쳐 2011년 한솔케미칼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민병규(61) 한솔로지스틱스 대표이사는 삼성그룹과 제일제당, CJ 등을 두루 거쳤다. CJ GLS에서 영업, 전략, 혁신 등 물류업 전반을 두루 경험하고 대표이사까지 지낸 물류통이다.

이상용(62) 한솔테크닉스 대표이사는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삼성광주전자(현 삼성전자 광주사업장) 대표이사(전무)와 삼성전자 글로벌 제조기술팀장을 역임했다. 이 대표는 빠른 결단을 통한 ‘스피드 경영’을 선호해 전자업계 전문가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천현(56) 한솔홈데코 대표이사는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전주제지에 입사, 한솔제지 경영지원본부장, 한솔아트원제지 대표이사를 거쳐 2015년부터 한솔홈데코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