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하 경기과학고, 도쿄대 전자공학, MIT 미디어랩 석사, 삼성전자 VD사업부 인터랙션 그룹장·수석연구원 / 4월 4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진하 스페이셜 공동 창업자 겸 CPO. 사진 이민아 기자
이진하
경기과학고, 도쿄대 전자공학, MIT 미디어랩 석사, 삼성전자 VD사업부 인터랙션 그룹장·수석연구원 / 4월 4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진하 스페이셜 공동 창업자 겸 CPO. 사진 이민아 기자

미국 뉴욕에 위치한 스타트업 ‘스페이셜(Spatial)’은 동명의 증강현실(AR) 회의 솔루션 ‘스페이셜’을 개발·공급한다. 안경처럼 생긴 AR 기기만 있다면, 앉은 자리에서 멀리 있는 동료와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회의를 할 수 있는 서비스다. AR 기기 속 대화 상대의 모습은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나타난다. 영화 ‘아이언맨’과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주인공처럼 허공에 손짓을 하면 사진과 영상, 자료 등 데이터를 불러와 회의 상대에게 보여줄 수 있다. 마치 만나서 회의하는 것처럼 협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스페이셜은 올해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 2019에서 이 서비스를 선보였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자신들의 야심작인 신형 AR 기기 ‘홀로렌즈 2’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스페이셜의 공동 창업자인 아난드 아가라왈라 최고경영자(CEO)가 무대에 올라 원격회의를 연결하자, 무대에 동양인 남성의 홀로그램이 등장했다. 스페이셜의 공동 창업자, 이진하(31) 최고제품책임자(CPO)였다. 이 CPO는 실제로 무대에 오르지 않고, 무대 뒤 작은 방에서 AR 기기를 쓰고 있었다.

이날 무대에서 아가라왈라 CEO와 이 CPO의 홀로그램은 마치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튕겨 자료를 공유하는 등 회의하는 모습을 시연했다. 홀로렌즈를 이용한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 미국에도 여럿 있지만, 무대에 올랐던 곳은 스페이셜이 유일했다. 사티아 나델라 MS CEO는 “의미 있는 기술을 만들었다”며 MWC 무대를 준비 중이던 이 CPO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과거 이 CPO를 MS로 영입하려 했던 홀로렌즈 개발 책임자 알렉스 키프만 MS 펠로우는 “우리 회사에 안 오고 창업하길 잘한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MWC 이후 한 달이 좀 넘게 지난 4월 4일, 스페이셜의 이 CPO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국에 1년 만에 왔다”는 그는 “4일 하루에만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10개의 미팅을 했다”고 말했다. 캐리어에는 스페이셜 서비스를 시연하기 위한 홀로렌즈 2가 들어있었다. 진한 쌍꺼풀 눈이 잔뜩 충혈돼 있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홀로그램으로 MWC 무대에 섰던 소감에 대해 묻자 “어두운 방에 혼자 남아 시작 신호였던 ‘하이 진하(Hi, Jinha)’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잘 안 되면 어쩌지’ 하며 솔직히 무서웠다”면서 웃었다. 그는 “그동안 채팅이나 영상통화 같은 2차원의 모니터 속 원격회의에서 한계와 답답함을 느꼈다”면서 “스페이셜로 AR을 이용한 3차원 원격회의를 하면 아이디어를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게 더 쉽다”고 말했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2012년 MIT 미디어랩에서 공부하던 중 삼성전자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VD)사업부로 입사해 3년 만에 부장급인 수석연구원이 됐다. 삼성전자 내 최연소 수석연구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20대에 이미 △2015년 세계경제포럼 ‘올해의 차세대 지도자’ △2014년 MIT 테크놀로지리뷰 ‘세상을 바꿀 혁신가 35인’ △2014년 패스트컴퍼니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 32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 2019에 등장한 이진하 CPO의 홀로그램. 사진 스페이셜
올해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 2019에 등장한 이진하 CPO의 홀로그램. 사진 스페이셜

명문 경기과학고 수석 졸업에, 삼성전자 최연소 부장 등 이력이 화려하다. 본인을 천재라고 생각하나.
“전혀. 이공계 학문에 위화감을 느끼며 살았고, 노력으로 극복했다. 한창 공부할 땐 잘 모르겠으면 시험지를 다 외워버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재능으로 쉽게 무언가를 성취했다기 보다는, 내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실현시켜보겠다는 끈질긴 태도를 유지했다. 내 아이디어를 몹시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싶다.”

스페이셜 같은 아이디어의 영감은 어디서 얻나. 영화인가.
“영화처럼 직접적인 영감의 소재는 싫어한다. 책이나 자연이 영감의 원천이다. 아이디어를 기술로 구현하는 건 ‘엔지니어’의 일이다. 나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영화 제작자들조차 상상하지 못하는 서비스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서비스를 공개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때 보람을 느낀다. 쉴 때는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가고, 명상을 하며 쉬려고 한다. 스마트폰을 끊고 힘든 캠핑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한다.”

현재 스페이셜을 사용하는 회사들이 있나.
“바비인형을 만드는 세계적인 장난감 회사 ‘마텔’은 올해 2월 말부터 스페이셜의 정식 버전을 쓰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기업 포드의 벤처 인큐베이터 조직인 포드X와 MS도 시범 이용을 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스페이셜을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마텔은 왜 스페이셜과 정식 계약을 맺었다고 생각하나.
“스페이셜을 시범 사용하는 동안 제품 생산에 걸리는 기간을 절반 이하로 줄였기 때문이다. 마텔은 전 세계 다양한 도시에 디자이너·공장생산담당자·엔지니어 등 각 부문이 흩어져서 일한다. 공장은 중국에, 디자이너는 미국 본사에 있는 식이다. 이 때문에 신제품을 만들 때 수개월이 걸렸다. 디자인을 마치면 엔지니어가 3D프린터로 모형을 만들고, 중국 공장에 전달한 후 임원들 간 협의를 마무리하기까지 의견을 수없이 교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페이셜을 이용하니, 이 과정을 2~3주로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전화, 채팅, 영상통화 같은 원격회의 방식(2차원)이 있다. 그런데 왜 AR(3차원)로 회의를 해야 하는 건가.
“기업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복잡다단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2차원 원격회의로도 의사소통이나 정보교류 정도는 충분히 이뤄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답답함을 느낀다. 채팅으로 회의하려면, 자신이 생각하는 관념을 타자기로 입력해야만 한다. 또, 여러 명이 영상통화로 회의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실제 대면회의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끊거나, 자료를 함께 찾아보면서 의견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작은 불편이 쌓이면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3차원 회의로 대면회의 수준의 비즈니스 미팅을 할 수 있다면, 훨씬 업무 효율이 높아진다. 머릿속 생각을 언어가 아닌 그림이나 영상, 몸짓 등의 시각적인 요소들로 바로 보여줄 수 있다.”

스페이셜을 기업에서 도입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나.
“안경처럼 쓸 AR 기기만 있으면 된다. 회사에 아무것도 새로 설치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직 AR 기기 가격이 비싸서 대중화되지는 않았다(홀로렌즈 2 가격은 약 390만원). 비싼 가격 탓에 가정보다는 AR 회의가 꼭 필요한 기업에서 먼저 사용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AR 기기도 PC의 대중화 역사를 따라가지 않을까. PC도 처음에 사무실 등 업무환경에서 쓰이다가, 가격이 점차 낮아지며 가정으로 보급됐다.”

스페이셜의 기술이 보편화되면 미래에는 굳이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되겠다.
“그렇다. 앉은 자리가 회의실이 된다.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은 ‘비즈니스 출장(travel)’을 줄이는 것이다. 출근할 필요도 줄어들 테니, 교통수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환경 오염 요인들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이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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