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이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전기차 배터리 공장 전경. 사진 SK이노베이션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전기차 배터리 공장 전경. 사진 SK이노베이션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과 지난해 4월부터 1년 가까이 끌어오던 전기차 배터리 특허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2월 14일(현지시각) 두 회사 간 진행 중인 ‘2차전지(재활용이 가능한 배터리) 영업 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해 SK이노베이션에 ‘조기 패소 판결(Default Judgment)’을 내리면서 팽팽했던 소송전의 양상이 급변한 것. ITC는 이날 LG화학 측이 요청한 조기 패소 판결을 승인하는 ‘예비 결정(Initial Determination)’을 했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의 구체적인 근거는 추후 공개된다. 최종 판결은 올해 10월 5일 전에 내려질 예정이다.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접기에는 잃을 게 너무 많은 만큼, 최종 패소 판결을 피하고자 LG화학과 화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대세다.

이번 분쟁의 핵심은 ‘인력 빼가기’ 논란이다. LG화학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2017년부터 2년 동안 LG화학 출신 임직원 76명을 채용했고 추가 영입을 진행했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입사 지원 서류에 2차전지 양산 기술 등 LG화학의 주요 영업 비밀을 상세하게 쓰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이직을 앞둔 직원들이 회사 시스템에서 1인당 400여 건에서 1900여 건의 핵심 기술 관련 문서를 내려받았다고도 주장했다.

이에 대해 SK이노베이션은 ‘정당한 이직’이라는 입장으로 맞섰다. SK이노베이션은 투명한 공개 채용 절차를 통해 국내외에서 경력 직원을 채용하고 있으며 직원 이동은 처우 개선과 미래 발전 가능성 등을 고려한 당사자 의사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직해온 인력들은 전 회사에서 비밀 유지 각서를 쓰고 오기 때문에 영업 비밀을 유출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후 양사는 국내외에서 총 9건의 소송전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ITC가 LG화학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리고 이번 판결은 변동 없이 최종 패소 판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ITC 통계 자료에 따르면 특허 소송의 경우 예비 판결이 최종 판결로 유지되는 비율은 90%, 영업 비밀 소송은 100%다.

패소가 확정되면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이 요청한 대로 전기차 배터리 부품·소재 등을 미국으로 수출할 수 없다. 이는 미국에서의 전기차 배터리 생산 완전 중단을 뜻한다. SK이노베이션이 현재까지 미국 전기차 배터리 공장에 투자했거나 검토 중인 금액은 3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을 유지하려면 LG화학과 합의하는 것 말고는 사실상 대안이 없다.

일각에서는 미국 내 전기차 배터리 생산 공장을 늘리려고 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SK이노베이션의 미국 사업을 위해 ITC 판결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이 최종 패소할 경우 미국 내 공익성이 침해받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ITC 판결로 SK이노베이션의 제품 판매가 막힐 경우 SK이노베이션이 2조원을 들여 미국 조지아주에 세우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생산 공장 등이 무용지물이 돼 결국 미국 내 고용 창출 효과 등도 함께 사라진다는 논리다.

그러나 LG화학도 미국 완성차 업체 제너럴모터스(GM)와 전기차 배터리 생산을 위한 조인트벤처(JV) 설립을 통해 미국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데다, SK이노베이션이 대규모 투자에서 대책 없이 미국 행정부의 거부권 행사 하나만 바라보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은 작다.

SK이노베이션은 2월 16일 입장문을 통해 “LG화학을 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해 협력해야 할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기조는 변함없을 것”이라며 협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다만 앞으로의 협상 과정에서 양사가 원만하게 합의할 수 있느냐엔 문제가 있다. LG 화학 측이 요구하는 건 ‘영업 비밀 빼내기 사실 인정·사과·손해배상’ 등 3개 조건이다. 양사는 지난해 9월 합의를 위한 실무진·최고경영자(CEO) 협상을 진행했지만, 의견이 갈리며 무산된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엔 양측의 입장이 대등했기 때문에 협상 결렬 여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LG화학 쪽으로 기울었다”며 “이제 SK이노베이션은 합의할 수밖에 없고 LG화학은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는 입장인 만큼, 조만간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대로 매듭지어야 국가 경쟁력에 도움

합의가 불발될 경우 국가적인 손실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스위스 금융 기업 UBS 분석에 따르면 전기차 배터리는 전기차 부품 가격의 43%를 차지하는 핵심 부품이다.

전기차 배터리는 현재 한국 수출을 떠받치고 있는 메모리반도체의 세계 시장 규모를 뛰어넘을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꼽힌다.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IHS마킷은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 규모가 연평균 25%씩 성장해 2025년 1600억달러(약 182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2025년 1490억달러(약 169조원) 시장을 형성할 전망인 메모리반도체를 능가한다.

한국 기업은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배터리 시장 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글로벌 전기차 탑재 배터리 사용량 순위에서 LG화학과 삼성SDI, SK이노베이션이 각각 3위와 5위, 10위를 차지했다. 1위는 중국 CATL, 2위는 일본 파나소닉이었다.

이번 소송전이 ‘끝까지’ 갈 경우 수백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소송 비용뿐 아니라 불확실성 지속으로 SK이노베이션뿐 아니라 LG화학에도 부담이 된다. 자칫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과 일본 업체에 시장을 뺏길 수도 있다.

다만 이번 문제에서 시비를 제대로 가려야만 장기적으로 한국 기업의 발전에 도움 될 것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국내 기업 간 문제라고 해서 특허 침해 문제를 정면에서 논의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먼저 연구·개발 투자에 나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뜩이나 ‘인력 빼가기’에 혈안이 된 중국 등 해외 기업에는 오히려 희소식이 될 수 있다. 한국 기업과 정부가 특허 문제를 가볍게 본다는 인상을 남기면, 장기적인 피해는 고스란히 국내 기업의 몫이 된다는 것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잘못이 있었다면 이를 인정하고 양사가 진지하게 대화하고 정당한 보상을 논의하는 등 제대로 된 합의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plus point

특허 전쟁 한창인 글로벌 기업

특허 침해를 둘러싼 기업 간 소송전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글로벌 기업은 특허 전쟁을 통해 경쟁력을 키우고 성장하기도 한다. 삼성전자와 애플은 2012년부터 7년간 특허 전쟁을 지속하면서도 글로벌 전자·정보기술(IT) 업계를 대표하는 양대 기업으로 거듭났다. LG전자와 삼성전자도 40여 년간 가전 시장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서로 소송을 걸면서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도약했다.

이는 하나의 특허가 가지는 가치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미국 무선통신기술 개발 업체 퀄컴은 특허 로열티로만 매년 수조원을 챙기고 있다. 지난해 마무리된 퀄컴과 애플의 소송액 규모가 무려 34조원에 달했던 것도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김문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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