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구찌 핸드백을 멘 ‘엑소’ 카이, 힙합 가수 에이셉 라키(오른쪽)와 구찌의 회장 겸 CEO 마르코 비자리, 구찌 크루즈 2020 패션쇼에 참석한 기타리스트 스티브 래시. 사진 구찌
왼쪽부터 구찌 핸드백을 멘 ‘엑소’ 카이, 힙합 가수 에이셉 라키(오른쪽)와 구찌의 회장 겸 CEO 마르코 비자리, 구찌 크루즈 2020 패션쇼에 참석한 기타리스트 스티브 래시. 사진 구찌

‘여자 핸드백을 든 남자’는 언제나 논쟁거리다. 대개는 남자답지 못해 꼴불견이라는 의견과 여자 친구의 부탁을 들어줘 매너 있다는 의견으로 갈리는데, 모두 시각적인 불편함을 전제로 한다. 여자 가방을 든 남자가 이상해 보인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이를 이해할 수 있나 없나를 따지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론 이런 논쟁이 불필요할 것 같다. 그 핸드백이 남자의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남자의 가방이 작아지고 있다. 처음엔 허리에 둘러매는 패니 팩(fanny pack)이 나오더니, 목에 거는 가방에 여성용 핸드백처럼 긴 끈을 몸에 가로질러 매는 크로스 보디 백(cross-body bag)까지 등장했다. 작은 남성용 가방을 뜻하는 ‘머스(murse)’라는 용어도 생겨났다. 남자(man)와 지갑(purse)을 합친 신조어다.

작은 가방의 유행은 지난해 열린 2020년 봄·여름 남성복 패션쇼에서 감지된 바 있다. 디오르와 펜디는 기존의 여성 가방을 남성 가방으로 재해석해 선보였고, 발렌티노와 MSGM은 목걸이처럼 목에 거는 가방을, 셀린과 자크뮈스는 그물과 짚으로 만든 해변용 가방을 내놨다. 모두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것들이다. 미국 일간지 뉴욕포스트는 “크로스 보디 백, 패니 팩, 톱 핸들 토트(top-handle totes·손잡이가 있는 가방) 등이 이번 패션쇼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트렌드 중 하나”라며 “머스는 남성을 위한 새로운 액세서리”라고 했다.

보통의 한국 남자라면 경악할 수도 있지만, 이 유행을 선도한 이는 다름 아닌 K팝(K-pop) 스타들이다. 예쁘고 세련된 외모를 한 남자 아이돌들은 일찌감치 여성용 옷과 액세서리를 착용해 이목을 끌었다. 패션 아이콘으로 명성이 높은 그룹 빅뱅의 지드래곤은 샤넬의 여성용 트위드 재킷과 가방을 즐기다 샤넬 홍보대사가 됐고, 중성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패션계의 주목을 받는 엑소의 카이는 한 행사장에 작은 구찌 핸드백을 메고 참석했다가 품절시켜 ‘완판남’이란 칭호를 얻었다. 그런가 하면 세계적인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뷔와 제이홉은 여성용 가방인 보테가베네타의 카세트백을 공항 패션으로 선보였다. 이 가방은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잇백(It bag·최신 유행 가방)으로 꼽히는 것으로, 임세령 대상 전무가 들어 주목받은 바 있다. “플렉스(Flex)해 버렸지 뭐야”라는 말을 유행시킨 래퍼 염따도 앙증맞은 샤넬 체인 백을 어깨에 걸쳤다.

아이돌과 힙합 뮤지션이 탐하던 여성용 핸드백을 남성복 브랜드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유는 젠더리스(genderless)의 영향이 크다. 성별을 구분 짓지 않고 개성을 드러내는 문화가 정착하면서 남성과 여성은 물론 제3의 성까지 포용하는 ‘모두를 위한 패션’이 업계 전반에 퍼진 것이다. 그 이면에는 성별·인종·크기 등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성 소수자와 장애인, 소수 민족을 포용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담겼다. 


1 루이비통의 2020 봄·여름 남성복 광고. 사진 루이비통 / 2 프라다의 2020 봄·여름 남성복 광고. 사진 프라다 / 3 펜디 2020 봄·여름 남성복 패션쇼. 사진 펜디 / 4 남녀 공용 가방인 버버리의 스몰 호스페리 프린트 퀼팅 롤라백. 사진 버버리 / 5 여성용 가방 같은 디오르의 새들백. 사진 디오르
1 루이비통의 2020 봄·여름 남성복 광고. 사진 루이비통
2프라다의 2020 봄·여름 남성복 광고. 사진 프라다
3 펜디 2020 봄·여름 남성복 패션쇼. 사진 펜디
4 남녀 공용 가방인 버버리의 스몰 호스페리 프린트 퀼팅 롤라백. 사진 버버리
5 여성용 가방 같은 디오르의 새들백. 사진 디오르

성(性) 경계 허문 ‘젠더리스’ 패션

실제로 2020 봄·여름 남성복 패션쇼에서는 핸드백 외에도 여성성을 상징하는 코드들이 대거 포착됐다. 루이비통은 파스텔톤과 꽃무늬, 흘러내리는 실루엣 등을 앞세워 부드러운 남성상을 제안했고, 톰브라운은 시그니처인 회색 슈트 대신 파스텔 색상의 재킷과 주름치마(심지어 미니스커트)를 남성 모델에게 입히는 파격을 보였다.

여성복에서도 젠더리스 코드가 짙게 드러났다. 몇 년째 여성복 시장에 등장하고 있는 어글리슈즈, 통 넓은 바지, 품이 넓은 오버사이즈 의류가 대표적이다. 젠더리스는 신(新)소비자로 떠오른 Z세대(1995년 이후 태어난 세대) 소비자의 성향이기도 하다. 미국 광고 회사 제이월터톰슨(JWT)의 조사에 따르면, Z세대 소비자의 56%가 성별을 따지지 않고 쇼핑한다고 했다. ‘Z세대 패션 아이콘’으로 꼽히는 팝 가수 빌리 아일리시(19)의 스타일을 보면 이해가 빠르다. 그는 여성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언제나 탈색한 머리와 헐렁한 옷을 고수한다.

일각에서는 ‘젠더리스가 패션의 미래’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래서일까? 이젠 패션 시장에서 성 중립 코드가 빠진 브랜드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SPA(제조·유통 일괄형) 브랜드 자라는 남녀 모두 입을 수 있는 ‘언젠더드 라인(Ungendered Line)’을 선보였으며, H&M은 성별 구분 없이 입는 ‘유나이티드 데님(United Denim)’을 판매한다. 여성용 구두와 주얼리로 시작한 국내 브랜드 슈콤마보니와 제이에스티나는 각각 남녀가 함께 착용할 수 있는 운동화와 가방을 출시해 남성 고객을 포용했다. 스니커즈로 유명한 컨버스는 올여름 젠더리스 의류 ‘셰입스(SHAPES)’를 출시할 예정이다. 기존에는 남성과 여성 의류를 구분해 14가지 사이즈를 출시했지만, 성별이 아닌 체형에 초점을 맞춰 사이즈를 4가지로 축소한다.

김은영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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