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 한국부라스 대표는 “사업을 시작한 후 거래처와의 약속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며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신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조성원
한국부라스 대표는 “사업을 시작한 후 거래처와의 약속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며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신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빵~ 칙칙폭폭~” 서울 노원구 공릉동 화랑대 철도공원 내 기차 테마 카페 ‘기차가 있는 풍경’. 사람 팔뚝만 한 모형 기차가 철도를 따라 달리며 테이블에 있는 손님에게 음료를 배달한다. 기적 소리부터 외관까지, 크기만 작지 실제 기차 모습 그대로다. 지난 9월 문을 연 이 카페는 코로나19 상황에도 음료 배달 모형 기차 덕에 어른과 아이들에게 인기다. 이 모형 기차를 한국부라스가 만들었다.

한국부라스를 세운 조성원(63) 대표는 47년간 철제 모형 기차만 제조해온 인물이다. 한국부라스는 금형(金型) 공정을 통해 500여 개의 모형 기차 부품을 만들어 조립한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모형 기차 시장에선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모형 기차 시장은 철도 산업 역사가 깊은 미국과 독일 등 유럽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한국부라스는 시장 선두 업체인 미국 라이오넬(Lionel)과 독일 메르클린(Märklin)에 모형 기차 완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공급한다. 외형은 크지 않지만 생산 규모로는 세계 1위라는 게 조 대표의 설명이다. 지난해 매출은 약 40억원. 미국과 독일 물량 대부분을 담당하는 중국 현지법인을 합하면 약 120억원에 달한다. 중국 법인은 제조 부문에 집중하고, 한국 본사는 ‘기차 카페’와 같은 모형 기차를 테마로 한 문화·오락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충남 부여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조 대표는 1975년 돈을 벌기 위해 중학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했다. 이후 서울 구로공단에 있는 모형 기차 제조 업체에 일자리를 구했다. 조 대표는 “배운 것도, 인맥도 없었다”며 “몸으로 부딪치며 기술을 익혀 나갔고 재미를 느꼈다”고 했다. 10년간 모형 기차 제조 업체에서 일하자 시장이 보이기 시작했고, 1984년 독립해 ‘내 사업’을 차렸다. 이후 조 대표는 성장을 위해 보다 큰 시장을 바라봤고, 1998년 미국, 2005년 무렵 독일에 진출했다. 코로나19로 수출이 위축되자 기차 카페 등으로 난관 돌파를 모색 중이다. ‘이코노미조선’이 11월 8일 경기도 시흥시 시화산업단지에 있는 한국부라스 본사에서 조 대표를 만났다.


업력이 47년이다. 첫 시작은.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해 모형 기차 제조 업체에서 일했다. 일할수록 ‘재미’를 느끼면서 모형 기차에 빠져들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이야기하는 이른바 ‘덕업일치(좋아하는 것과 직업의 일치)’를 이룬 셈이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못 이기고, 즐기는 자는 간절한 자를 못 이긴다고 하지 않나. 당시의 나는 간절했고 동시에 즐겼다.”

한국부라스 창업 배경은.
“조립, 재고 관리 등 회사에서 10년가량 일하다 보니 모형 기차 시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핵심 부품을 얼마나 빨리 조달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는 일본 모형 기차 브랜드로부터 부품을 받아 완제품을 조립하는 곳이었다. 일본 기업이 부품을 늦게 보내는 바람에 납기일을 맞추려고 밤을 새우는 경우도 많았다. 부품 조달만 잘하면 효율적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고, 1984년 한국부라스를 창업했다.”

한국부라스는 조 대표의 생각처럼 일본 업체에 완제품을 납품하며 순조롭게 돌아갔다. 하지만 한계에 부딪혔고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다. 매출은 1억~2억원 수준에 머물렀다. 성장을 고민하던 조 대표는 세계 모형 기차 시장 중 가장 큰 미국과 독일 시장 공략에 나섰다. 2021년 현재 한국부라스의 매출(중국 법인 포함)은 미국과 독일에서 약 90%가 발생한다. 조 대표는 “미국 진출은 한국부라스 성장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했다.

한국의 중소기업이 특별한 연고 없이 미국 시장을 파고들 수 있었던 전략은.
“무조건 1등 기업을 공략했다. 미국 모형 기차 시장 선두 업체 라이오넬과 거래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라이오넬이 참가하는 박람회에서 관계자를 만났지만 한국 중소기업이 모형 기차를 만든다고 하니 믿질 않았다. 며칠을 찾아가 우리가 제작한 샘플을 보여줬다. ‘진짜 너희가 만든 제품이 맞냐’며 몇 번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 달 후 거래 담당자와 미팅할 수 있었다. 미팅 날에 먼저 거래 조건을 제시했다. ‘시간을 주면 제품을 만들어 오겠다. 돈은 그때 달라. 만약 품질에 문제가 있다면 돈도 안 받겠다.’ 라이오넬 입장에선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리스크가 없는 거래였다. 금형 협력 업체를 달래가며 밤낮없이 일했고, 라이오넬과 약속한 6개월 후 원하는 품질의 모형 기차를 만들 수 있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라이오넬과 거래하고 있고, 한 번도 품질 문제로 반품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

기억에 남는 모형 기차는.
“2000년대 초반 약 480만원에 한정 판매한 ‘빅보이(Bigboy)’는 현재 모형 기차 수집가 사이에서 1000만원대에 거래된다. 실제 기차 빅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미국 증기기관차다.”

독일 시장에도 진출했다.
“미국에서 자리 잡은 후 2005년 무렵 독일에서 1위 모형 기차 제조 업체 메르클린을 공략했다. 사실 라이오넬과 거래한 실적을 바탕으로 이 기업과 비교적 쉽게 거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메르클린은 우리를 믿지 않았다. 대안으로 규모가 작은 현지 업체를 찾았고, 모형 기차 제조 및 판매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다. 프로젝트 비용은 절반씩 대고 우리가 모형 기차를 개발, 이 업체가 판매를 맡았다. 결과는 30억원의 매출, 대성공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메르클린과 거래를 시작할 수 있었다. 독일 진출 6년 후였다.”

한국부라스의 경쟁력은.
“가격과 정밀함이다. 우리는 부품 제조부터 조립까지 모두 하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을 갖췄다. 모형 기차를 만드는 데 약 500개 부품이 들어가고, 우리가 60%가량을 제조한다. 회사 설립 초기에는 협력 업체와 함께 금형 작업을 하고 부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품질을 맞추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품질이 들쑥날쑥한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거래하던 금형 업체를 인수해 품질을 높였다. 미국에 진출해 글로벌 기업과 거래하지 않았다면 품질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회사는 정체하면 그 순간 바로 끝이라는 걸 깨달았다.”

코로나19 여파는.
“독일은 나쁘지 않은데, 미국 시장에서 매출이 절반 줄었다. 6년간 운영하던 서울 종로구 삼청동 삼청기차박물관을 지난 3월 정리했고, 거기에 ‘기차 초밥 전문점’을 열 계획이다. 화랑대 철도공원 기차 카페처럼 모형 기차가 초밥을 실어나르고, 다양한 모형 기차로 매장을 꾸밀 것이다. 11월 중에 문을 연다.”

중국 법인도 운영 중이다. 한국 본사와 중국 법인의 역할은.
“2004년 중국에 별도 법인을 만들어 모형 기차를 생산한다. 한국에선 도저히 납품 단가를 맞추는 게 어려웠다. 이후 중국 생산량을 늘려나갔고, 현재 미국과 독일 물량 대부분을 생산한다. 중국은 모형 기차 제조를, 한국은 모형 기차를 테마로 한 문화 사업으로 방향을 잡았다. 물론 한국에서도 제조한다. 모형 기차를 활용해 사람들이 쉬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문화 사업을 하기 위해 이 공간을 구성하는 모형 기차와 그 기차가 달리는 철도, 자연 풍경 또는 도시 등의 배경을 만든다. 이를 디오라마(diorama)라고 한다. 미국 물량의 30%도 담당한다. 한국철도공사와 협력해 모형 기차 ‘KTX 산천’도 만들었다.”

한국에선 ‘기차 카페’와 같은 문화·오락 사업에 집중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노원구청의 요청으로 화랑대 철도공원에 조성될 스위스 마테호른과 융프라우 등을 배경으로 한 산악 터널과 철도를 달리는 기차 디오라마를 만들고 있다. 이후 영국, 한국 등을 주제로 한 디오라마도 만들 예정이다. 미국, 이탈리아 등 세계 국가의 주요 도시를 미니어처로 만든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미니어처 원더랜드’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게 최종 목표다. 이곳에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공간과 자연이 축소돼 있다. 물론 우리는 모형 기차를 중심으로 한다. ‘K-기차 원더랜드’라고 할 수 있겠다.”

박용선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