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수석부회장이 9월 7일(현지시각) 인도에서 열린 ‘무브(MOVE) 글로벌 모빌리티 서밋’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현대차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9월 7일(현지시각) 인도에서 열린 ‘무브(MOVE) 글로벌 모빌리티 서밋’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현대차

9월 14일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이 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섰다. 2009년 기아차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지 9년 만에 그룹 경영을 총괄하게 된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정 수석부회장은 경영 업무 전반을 총괄해 정몽구 회장을 보좌하게 된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재계에선 이번 수석부회장 승진을 ‘3세 경영’ 수순의 발판으로 보고 있다. 정 회장이 여전히 그룹 경영의 구심점이지만, 정 수석부회장이 그룹 경영 전반을 총괄하면서 사실상 그룹 회장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박상원 흥국증권 이사는 “특히 ‘수석’이라는 단어가 유의미하다”며 “정 회장이 최종의사결정권자라는 것을 나타내면서도 다른 부회장들보다 한 계단 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번 인사는 정몽구 회장의 건강, 글로벌 통상 문제와 시장 경쟁구도 변화, 미래 자동차 준비 등 급박하게 돌아가는 그룹 내외부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 이번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승진으로 인해 가장 먼저 부상한 것은 정몽구 회장의 건강 문제였다. 정 회장은 1938년생으로 고령에다 과거에 비해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정 회장은 2016년 12월 국정농단 청문회 참석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후 정 수석부회장이 해외법인장 회의 주재, 해외 출장 등을 전담하며 정 회장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매일 출근하지 않고, 중요 경영 현안 등에 따라 가끔 본사에 들를 정도로 과거에 비해 기력이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대차 관계자는 “정 회장의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정 회장인 건재한 상황에서 ‘승계’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차그룹 내 불문율이다.


정 수석부회장의 역할 어느 때보다 중요

1999년 옛 현대그룹에서 분가한 이래 현대차그룹의 최종의사결정자는 늘 정몽구 회장이었다. 하지만 올 초부터 정의선 수석부회장 체제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3월 정 수석부회장이 현대제철 등기이사로 재선임될 때, 정몽구 회장은 현대건설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정 회장이 맡고 있는 현대모비스와 현대자동차의 등기이사직도 각각 내년 3월과 2020년 3월에 내려놓으면서 승계를 완료할 가능성이 크다.

정 수석부회장은 그동안 다른 계열사의 경영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등 주요 계열사의 등기이사로 올라 있지만 공식 직책이 있는 계열사는 현대차가 유일하다. 하지만 앞으로 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으로서 현대차뿐만 아니라 자동차, 철강, 건설, 금융 등 모든 계열사의 경영을 총괄해야 한다.

특히, 최근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에선 정 수석부회장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인사 발표 후 이틀 만인 9월 16일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에서도 그의 강화된 역할이 드러난다. 정 수석부회장은 애초 문재인 대통령의 북한 방문에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미국의 자동차 관세 25% 부과 가능성이 커짐에 따라 윌버 로스 미국 상무장관과 의회 관계자 등을 만나는 데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정부가 무역확장법 232조를 이용해 자국에 수입되는 자동차에 최대 25%의 관세를 물리는 방안을 추진하자 관세 부과의 예외를 인정받거나 낮은 관세율을 적용받기 위해 총력전에 나선 상황이다. 현대차그룹이 최대 수출 시장인 미국으로부터 25% 관세를 적용받을 경우 무려 3조5000억원가량의 세금을 낼 수 있다. 관세 폭탄이 현실화될 경우 국내의 일부 공장이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다. 정 수석부회장이 상무장관과의 면담에서 관세 예외국으로 인정받거나 관세율을 크게 낮춘다면 현대차의 경쟁력은 물론 그의 리더십을 인정받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미래차 관련 사업 추진 탄력

정 수석부회장이 관심을 보여왔던 미래차 관련 사업 추진도 더욱 탄력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 수석부회장은 그동안 자율주행차와 모빌리티(이동성) 서비스 쪽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 왔다. 올해 초 미국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에서 인텔, 모빌아이, 엔비디아 등 자율주행 핵심 기술을 보유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잇달아 만났다. 최근 인도에서 개최된 ‘무브(MOVE) 글로벌 모빌리티 서밋’에서는 기조연설자로 나서 현대차를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계획을 직접 밝히기도 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글로벌 전문가를 지속적으로 영입하며 자율주행차, 커넥티드카, 친환경 전기차 등 미래 자동차에 사활을 걸고 있다. 특히 정 수석부회장이 현대차그룹의 신사업과 미래차 경쟁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면서 이를 담당하는 부사장급 임원들에게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연말 정기 임원인사에서 ‘중장기 리더 후보군’으로서 부사장 승진자를 대폭 늘린 데 이어 올해는 부사장을 중용하고 있다. 국내외 거센 도전과제를 헤쳐가려면 정 수석부회장과 호흡이 맞는 젊은 임원의 전진배치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기아차는 지난 7월 새 대표이사에 최준영 기아차 부사장을 내정했다. 이에 앞서 현대차는 3월 윤갑한 전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 후임으로 하언태 현대차 대표이사 부사장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고급차 제네시스사업부장인 맨프레드 피츠제럴드 부사장은 지난 5월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지난 3월에는 고성능사업부를 출범하면서 BMW M 북남미 사업총괄 출신 토마스 쉬미에라 부사장을 영입했다.

정 수석부회장 직속 조직이자 미래 성장 동력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전략기술본부장은 지영조 부사장이, 전략기술본부의 전초기지 격인 오픈이노베이션센터는 차인규 부사장이 각각 맡고 있다. 재계에선 부사장들이 각 분야에서 성과를 내면 현대차그룹의 ‘정의선 체제’가 공고해지지 않겠냐고 보고 있다.

특히 지영조 부사장처럼 정 수석부회장이 영입에 적극적이었던 삼성전자 출신도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출신 인사로는 송관웅 인포테인먼트 설계실장(이사), 안형기 차량지능화사업부 커넥티비티실장(이사) 등이 있다.

정 수석부회장이 그룹 전반을 총괄하게 되면서 올 연말 현재의 부회장단을 비롯 임원급 인사에 어떤 변화가 올지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정 회장의 사위인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을 제외하면 전문경영인 부회장은 김용환, 양웅철, 권문식, 윤여철 현대차 부회장과 우유철 현대제철 부회장 등 5명이다. 재계에서는 정 수석부회장이 그룹 내 2인자 자리에 오르면서 정 회장을 보좌했던 일부 부회장이 교체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주우진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품질·생산성 높이기보다 이제는 자동차 산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며 “정 수석부회장도 새로운 팀으로 미래 사업 분야 개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현대차그룹은 올 초 그룹 내 원로로 꼽히는 부회장단에 변화를 주면서 정의선 시대를 암시했다. 지난 1월 이형근 기아차 부회장과 김해진 현대파워텍 부회장이 고문으로 물러나면서 사실상 경영일선에서 퇴진했다.

정의선 수석부회장 앞에는 난제들이 산적해 있다. 현대차그룹을 경쟁력 제고와 함께 급변하는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룹을 이끌어가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한 숙제다. 당장 미국의 관세 부과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4차 산업혁명과 모빌리티(이동성) 등 미래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도 관건이다. 정부의 인허가에 막혀 사업 추진에 제동이 걸린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건립 문제도 풀어야 한다.

매출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해외 시장의 파고도 넘어서야 한다. 현대차는 올 들어 매출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지만, 영업이익 등 수익성은 급감하고 있다. 지난 상반기 영업이익은 1조6321억원으로 전년 동기에 비해 37.1%나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