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그룹의 슈웨체르 회장이 2004년 11월 르노삼성자동차의 신차 SM7 발표 등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이건희 삼성 회장을 만나 삼성 브랜드의 사용 연장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04년 11월30일 르노(Renault)의 슈웨체르 회장과 삼성 이건희 회장의 오찬 회동이 삼성의 영빈관인 승지원에서 있었다. 슈웨체르 회장은 2005년 5월 퇴임을 앞두고 SM7을 출시한 르노삼성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방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르노삼성의 고위 관계자는 “슈웨체르 회장과 이 회장의 회동은 르노측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2010년까지 르노삼성이 사용할 수 있는 삼성 브랜드를 2020년까지 10년 더 연장해 달라는 요구가 핵심”이었다고 전했다.

 삼성측은 슈웨체르 회장의 요청을 일단은 완곡하게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삼성 구조본 관계자는 “두 회장이 만난 것은 사실이나 업무에 관한 논의는 일체 언급하지 않기로 만나 안부만 주고받는 자리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삼성측은 이건희 회장과 슈웨체르 회장의 회동 및 SM7 한 대를 르노삼성측이 이 회장에게 선물한 것 등이 언론에 알려진 것과 관련, 구조본 재무팀 관계자를 통해 르노삼성측에 강력하게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측의 불만은, 회동 자체를 비공개로 하기로 한 것을 르노삼성측이 파기했고, SM7 마케팅에 이 회장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르노의 삼성 브랜드 사용은 2000년 르노가 삼성자동차 인수 협상을 하면서 르노측이 삼성의 일정 지분 보유 조건과 함께 내세운 선행 조건이었다. 삼성은 르노에 삼성 브랜드 사용을 허가하고 기간은 2000년부터 2010년까지로 정했으며, 삼성은 브랜드 로열티로 매출액의 0.8%를 르노로부터 받기로 했다. 브랜드 로열티는 당시 매각 협상의 주무였던 김인주 현 구조본 재무팀 사장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르노의 삼성 브랜드 사용 기간 연장 방안은 2000년 르노가 삼성자동차를 인수한 후부터 검토됐다.  

르노측이 삼성에게 러브콜을 하는 이유는 뭘까.

슈웨체르 르노회장은 이번 방한 때 르노그룹의 중국 진출과 관련한 언급을 했다. 그는 “르노삼성을 향후 아시아 허브로 키우며, 그룹이 준비 중인 중국 진출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시킬 예정”이라고 말했다. 슈웨체르 회장은 2000년, 2002년 방한 시에도 아시아 시장에서 르노삼성의 역할에 대해 언급했으나 진척된 것은 없다. 르노는 1999년 닛산을 인수하면서 본격화하기 시작한 국제화의 최종 결실을 신흥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에서 거두기를 원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르노그룹 산하에는 중국 사업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마땅한 회사가 없는 상황이다.

독일 기업 폭스바겐은 1960년대 미국에 진출해 실패한 후 생산 라인을 중국으로 이전했고,  GM은 20년간에 걸친 끈질긴 로비 끝에 중국 런칭에 성공했으며, 가장 뒤늦게 중국 시장에 뛰어든 현대자동차는 10여년 이상의 현지 시장 조사와 인맥 구축, 심지어는 한국에서 생활 터전을 잡은 한족 출신의 화교들을 활용한 중국 중앙 정부와의 교감 등으로 외국 기업 중 가장 빠르게 중국 시장에 진출했다.

르노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서유럽 내에서 저가 대중차 및 소형 상용차를 주로 생산하는 로컬(local)기업 수준이었고, 닛산은 도요타보다도 먼저 유럽에 현지 공장을 짓는 등 해외 사업에 눈을 떴으나 잇단 사업 실패로 막상 거대한 중국 시장을 앞에 두고는 해외 비중을 줄여나가야만 했다. 르노는 중국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 형성이 가능한 파트너가 필요했고, 중국 사업 경험이 있는 부품업체들을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르노삼성을 교두보로 활용한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와 관련해 르노삼성 관계자는 “르노가 2대 주주인 삼성에 기대하는 역할 중 하나가 중국 사업의 선봉에 서 주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삼성이 르노의 구애에 대해 차갑게 대하자 삼성 내부에서는 비판의 소리도 일부 흘러나오고 있다. 삼성이 자동차 사업의 주도권을 포기했다고 하지만 그룹 전체 사업 구도 측면에서는 르노와의 일정한 관계 발전이 있어야 한다는 근거에서다.

삼성그룹은 2000년 삼성자동차를 르노에 넘기고, 2001년 삼성 상용차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삼성전기에서 하던 자동차 부품 사업 부문을 철수시켰다. 당시 삼성전기에 근무했던 관계자는 “자동차 관련 설비를 중동, 인도 및 국내 업체 등에 매각했다”며 “최근 사내에서 다시 자동차 전장품 사업에 참여하려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전장 부품이나 전자제어 사업 부문을 계속 유지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삼성의 자동차 사업 얘기가 처음 나오기 시작하던 1994년 미국 미시간대학의 데이비드 콜(David Coll) 자동차산업연구소장은 “삼성그룹의 사업 특성상 자동차 비즈니스보다는 독일의 보쉬나 일본의 니혼덴소와 같은 자동차 부품 조립업에 참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참고로 르노와 닛산의 ‘연합 이사회’(Alliance Board)는 2002년 르노-닛산 구매본부(RNPO : Renault-Nissan Purchasing Organization)를 통해 부품 구입 예산으로 전년보다 무려 60억달러가 많은 210억달러를 책정했다. 

한편 재계 및 언론계 일각에서는 아직도 삼성의 자동차 사업 재진출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 전문가들은 “삼성 내에 자동차 사업을 포기한 주도 세력이 그룹 핵심에 있고, 삼성자동차의 부채 문제 또한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아 르노와의 협력 증진 여부와 상관없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와 함께 르노삼성에 대한 르노측의 경영 의지가 아직까지는 확고하다는 점도 삼성의 자동차 사업 재진출설에 제동을 걸고 있다.



SM5 후속 차종도 SM7과 같은 모델

르노삼성자동차의 SM5 시리즈가 2005년 단종될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에 출시됐으니 7년 만의 일이다. 르노삼성 관계자는 “2005년 4월경 SM5의 생산이 중단될 예정”이라며 “후속 차종은 SM7과 같은 티아나의 변형 모델”이라고 귀띔했다. 따라서 SM5 후속 차는 SM7의 전면 및 후면 디자인을 부분 수정하고, 엔진 배기량을 낮추며, 외관 디자인의 단순화 및 전장 부품 기능의 하향 조정 등을 통해 선보일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르노삼성측은 SM7 수요층이 SM5 후속 차종으로 이탈할 것을 염려하고 있다.

삼성자동차 시절 삼성은 SM5 이후의 차기 차종으로 닛산에 대형 고급 차종인 ‘시마’(사진)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닛산은 단순 기술 제휴 관계였던 삼성에 기술 공여를 함으로써 얻어지는 각종 수익이 목적이었기에 고급 승용차 기술을 이전함으로써 향후 돌아올 부메랑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7은 2000년 르노가 삼성자동차를 인수 후 상품 기획 단계부터 직접 참여한 최초의 차종이다. 르노삼성 관계자는 “SM7은 애초에 르노의 ‘라구나’를 기술 도입 차종으로 검토했으나 라구나는 해치백 스타일인데다 디자인이 국내 실정에 맞지 않아 배제됐다”고 전했다.

르노삼성은 티아나의 강점인 네오VQ 엔진을 탑재한 SM7을 ‘스포티 세단’으로 명명하고 초기 수요의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는 핵심 고객층을 강남의 젊은 전문직으로 설정하고 있다. 티아나가 일본에서 런칭할 때 ‘스포티 이미지의 중형차’로 포지셔닝한 것과 같은 전략이다.

SM7(2.3 및 3.5리터급)의 경쟁 차종으로는 GM대우의 ‘스테이츠맨’(2.8 및 3.6리터급), 현대의 그랜저 XG 후속차(2.7 및 3.3리터급)가 있다. 동일 차종 간 배기량 차이는 스테이츠맨이 800cc, 그랜저 XG 후속 차가 600cc, SM7은 1,200cc가 난다. 르노삼성은 국내 시장에 엄연히 존재하는 2.7, 3.0, 3.2~3.3 리터급 시장을 지나쳐 3.5 시장으로 곧바로 진입한 것이다. 적은 제품군으로 광의의 시장을 커버하다 보니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는 것을 르노삼성측도 인정한다.

르노삼성 관계자는 “SM7을 준대형 정도로 포지셔닝하고, 고급 대형차 시장은 추후 닛산의 시마급 등을 기술 도입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어야 한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SM7이 경쟁 차종들에 비해 너비가 협소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르노삼성측은 엔진 동력의 우수성을 앞에 내세운다. 순간 가속력 등이 특히 뛰어나고, 자체적으로 국내 고속도로 여건에서 250㎞ 이상의 스피드를 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르노삼성은 SM7을 다양한 옵션 및 가격대를 적용해 중형, 준대형, 대형 시장까지 아우르는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르노삼성 관계자는 “투자 비용 절감 차원에서 영업 부문의 직접 인력을 딜러제를 도입하여 감축한다는 방안을 세우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딜러제는 지금처럼 장기 불황, 상품군이 취약할 때는 도입 여부를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딜러제를 채택하고 있는 SUV 전문 메이커인 쌍용자동차가 경쟁사들의 SUV 시장 신규 참여로 인해 매출이 감소하자 영업 네트워크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SUV 및 엔진 프로젝트,

국제 기업으로 성장 여부 판가름

높은 수익성과 세계적인 추세 때문에 어떤 메이커이든 SUV(스포츠 유틸리티 비이클) 시장은 외면하기 어렵게 됐다. SUV는 단일 플랫폼으로 미니밴, 코치, 트럭을 만들 수 있다. 일정 수준 규모의 경제만 이룬다면 마진이 승용차보다 높다. 폭스바겐, BMW, 도요타, 심지어는 스포츠카 전문 메이커인 포르셰(Porsche), 마제라티(Maserati) 등도 SUV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2004년 국내 승용차 시장도 신차 3대 중 1대꼴로 SUV가 팔렸다. 르노삼성은 국내 SUV 시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중형급을 겨냥, 닛산의 중형 SUV인 무라노를 원했으나, 닛산은 컴팩트 SUV인 엑스-트레일을 기술 제공키로 했다. 이것이 결정된 시기가 2003년이었는데, 그 이후 국내 시장은 현대자동차의 투싼, 기아자동차의 뉴 스포티지와 같은 컴팩트 SUV 시장이 새롭게 형성됨으로써 르노삼성의 입지를 편하게 해주고 있다. 

르노삼성은 2004년 SUV 전문 메이커인 쌍용자동차 인수도 검토했으나, 르노그룹의 독자 개발 방식 정책 결정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닛산의 엔지니어링, 르노의 디자인, 르노삼성자동차의 생산력 등이 결합된 국제 얼라이언스 방식의 SUV 개발 성공 여부가 또한 관심 사항이다. 르노는 1979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의 SUV 전문 업체인 AMC에 자본 투자한 사업 경험이 있다. 유럽 자동차 메이커들이 다 그렇듯이 르노는 디젤 엔진 부문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르노는 SUV를 전략 차종으로 선정해 일부는 국내 시장에서 팔고 일부는 자신들의 해외 네트워크에 공급할 계획이다. 과거 GM이 대우자동차의 생산 경쟁력을 활용, 르망을 월드카로 전 세계에 공급했고, 포드가 기아자동차의 생산 라인을 활용하여 프라이드를 ‘페스티바’라는 브랜드로 동남아 및 남미 시장에 공급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르노와 닛산이 공동 개발 중인 직렬 4기통 2000cc 가솔린 엔진(M1G 프로젝트)은 국내에서 1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으로, SM5 후속 차에도 탑재할 계획이지만 르노 계열의 조립 라인에 공급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M1G 프로젝트는 르노와 닛산 간 3년 동안 공동 투자가 진행되어 왔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 자동차 업계는 비용 절감을 위한 아웃 소싱에 적극적이다. 엔진 같은 핵심 부품도 자체 제작하지 않고, 외부로부터 쇼핑(shopping)을 하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