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경영을 ‘트렌드(유행) 타기’라고도 합니다. 경영은 성공으로 가기 위한 툴(tool)일 테고 성공하려면 남보다 먼저 트렌드를 읽어야 할 테니까요. 트렌드는 현학적인 학문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연재하는고종원 조선일보 기자의 ‘풀어 쓴 경영 이야기’에서 그 해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내에서는 그리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미소년 스타로만 알았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2005년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가 있습니다. 미국 항공산업의 개척자인 하워드 휴즈의 일대기를 다룬 <애비에이터>(Aviator-항공인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까요?)라는 영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재벌이었던 하워드 휴즈는 직접 시험 비행을 하고 그 결과 온몸을 다치는 부상을 입어가면서까지 TWA라는 항공사를 일으킨 인물입니다. 러닝타임이 3시간 가량 되는 이 영화는 ‘집착’에 관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국내와 달리 미국에서는 ‘집착’을 주제로 한 영화가 히트를 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애비에이터>가 항공기에 관한 ‘집착’이라면 2002년 흥행한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숫자에 집착한 천재 수학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착을 한자로 나타내면 ‘벽(癖)’이 되지요. 도벽, 낭비벽 등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한자 자체에도 병을 뜻하는 부수가 들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역사상 ‘벽’이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18세기였습니다. 한양대 정민 교수(<미쳐야 미친다>의 저자)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글을 보면 18세기 마니아 지식인들은 꽃, 새, 칼, 물고기, 글씨 등을 광적으로 모으고 분석하고 분류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옥이라는 사람은 담배에 관한 지식을 총정리했고, 이서구라는 학자는 새에 관한 자료를 모았습니다. 이렇게 벽을 가지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18세기의 실학자였습니다. 우리나라 무술을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도 이덕무라는 학자의 ‘벽’에 힘입은 바 큽니다. 그런데 이덕무라는 인물은 실제 무술은 거의 못했다고 하는군요. 

 18세기에 이어 벽을 가진 사람이 나름대로 우리나라에서 평가를 받는 시대가 요즘이 아닌가 합니다. 18세기에는 문체반정이니 뭐니 해서 벽을 가진 사람들을 탄압했지만, 요즘은 나름대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있지 않습니까? 국가건 기업이건 간에 벽을 가진 사람을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었는가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8세기 조선에 ‘명분’이라는 거대담론 중심의 사회 분위기를 깨고 벽을 가진 인물들을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아는 시스템이 있었다면 19세기 들어 그렇게 허망하게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국력이 급성장한 20세기 중반 인물인 하워드 휴즈나 존 내쉬(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모델이 된 수학자)의 존재는 미국이라는 사회가 나름대로 ‘벽’을 가진 인물을 수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IT분야 한국 고객 입맛이 일본보다 훨씬 까다로워”

 “<겨울연가>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하겠다.”

 지난해 일본 프로야구 구단 다이에 호크스 구단을 인수한 손정의씨가 언론을 통해 한 얘기입니다. 한국계인 소프트 뱅크의 손정의씨가 일본에서 대표적인 IT기업인으로 이름이 높다는 사실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의 이 발언은 일본의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니폰>에 보도된 것인데 드라마 <겨울연가>의 성공 비결이 인터넷에 올라온 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결국엔 각본까지 수정한 결과 대히트로 연결됐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구단 운영에 팬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는 뜻이겠지요. 예를 들면 야구장에 20~30대의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인터넷으로 경기를 중계하도록 하되, 경기 중 감독만 보고 싶은 사람은 감독만, 투수만 보고 싶은 사람은 투수만 보게 하겠다는 겁니다. 나아가 투수교체 때는 네티즌이 추천한 선수를 기용하는 방안도 마련해보겠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팬들이 구단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류 드라마가 성공한 건 ‘다모 폐인’을 비롯해 드라마 ‘폐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고 그러한 의견이 드라마 제작에 반영돼 대중에 좀 더 어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스토리가 전개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모 폐인을 비롯해 장금이 폐인, 삼순이 폐인까지 모두 그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업과 소비자 간의 거리를 줄이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기업들은 성공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지난해 일본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만난 기술경영 전문가인 일본 AT커니의 부사장 야마모토 나오키씨도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IT분야에서는 한국 고객(특히 소비자)의 입맛이 일본보다 훨씬 까다로워 삼성전자나 LG전자의 경쟁력이 부쩍 높아졌다”고.

 실제 이 같은 사례는 많이 있습니다. 디지털 카메라의 작은 오류까지 찾아내는 능력은 국내의 디지털 카메라 폐인들이 세계 제일이라고 합니다. 또 최근 한국 자동차의 성능이 많이 좋아진 것도 자동차 마니아가 급증하면서 생긴 긍정적인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BMW나 벤츠가 최고의 성능으로 평가받는 것은 아우토반을 통해 광적으로 스피드를 즐기는 마니아들이 작은 결함이라도 발견하면 즉시 회사측에 수정을 가하라는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요. 



 21세기엔 壁을 가진 고객이 성공의 열쇠 쥐고 있다

 심지어 기업의 핵심요소를 벽을 가진 일반인들이 완성하도록 맡겨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펭귄으로 대표되는 리눅스의 심벌 마크가 그런 사례입니다. 1980년대 리눅스는 애초부터 심벌 마크를 사람들이 다양하게 변환시킬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그 결과 살찐 펭귄, 키 큰 펭귄 등 별의별 모습의 펭귄이 인터넷상에서 나돌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계속해서 의견을 제시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펭귄에 대해서는 자체적인 비판을 가하면서 펭귄의 모습은 점점 더 완성도가 높아졌습니다. 공개를 통해 ‘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하게 함으로써 가장 좋은 모양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기업들은 베타버전(시험판)을 먼저 내놓아 완성도를 높여가는 방법도 많이 사용합니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이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다 보면 제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며, 오류 가능성은 줄어들고 디자인도 세련돼진다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기업들이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아이디어-기획-시장조사-제품 디자인-제조-마케팅-판매의 단계를 밟습니다. 그런데 시장조사나 기획단계에서 적합했던 아이디어가 제품화될 때면 소비자들의 기호와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술에 매몰된 기업의 경우 기술적으로 우수하기만 하면 된다며 소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단계부터 고객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단순한 고객들이 아니라 ‘벽’을 가진 고객들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절반쯤은 이미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조선이 벽을 가진 인물들의 지식을 사회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면 21세기 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 이들을 제품 개발, 프로세스 개선 등에 자연스럽게 참여시킬 수 있는 채널을 만든다면 경쟁에서 압도적으로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속한 조직은 그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요. k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