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기술력을 가늠하는 척도 가운데 하나로 흔히 슈퍼컴퓨터 인프라를 꼽는다. 속도 경쟁의 시대에 시장에 얼마나 빨리 대응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경쟁력이고, 이를 위해서는 슈퍼컴퓨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서울대가 도입한 슈퍼컴퓨터가 국내 최고 성능의 컴퓨터 자리를 차지했다.
 서울대의 슈퍼컴퓨터 3호기는 5.15테라플롭스의 속도를 낸다. 슈퍼컴퓨터의 속도를 나타내는 단위인 플롭스(FLOPS)는 1초에 컴퓨터가 몇 번 연산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값이다. 5.15테라플롭스면 1초에 5조1500억회 연산을 한다는 뜻이다. 이는 일반 펜티엄급 컴퓨터보다 2만5000배 빠르다. 세계 슈퍼컴퓨터의 순위를 매기는 사이트인 ‘톱500 슈퍼컴퓨터’ 순위에선 51위권.

 서울대 3호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2003년 도입한 슈퍼컴퓨터가 국내 최고 성능을 자랑했다. 연산 속도는 초당 3조회. 국내 최고 속도지만 세계적인 수준과 비교하면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슈퍼컴의 성능은 흔히 국가경쟁력과 비교된다. 그동안은 전통적으로 미국이 슈퍼컴 분야에서 우위를 차지했으나 2002년 일본이 지구시뮬레이터를 발표하면서 1위 자리를 내줬다. 지구시뮬레이터의 연산 속도는 초당 36조회. 그러다 지난해 미국 에너지부의 IBM 슈퍼컴퓨터 ‘블루진’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 자리를 다시 탈환했다. 초당 연산 속도는 70조회에 이른다. 일본도 곧 되받아쳤다. 2011년까지 초당 1경(1조의 1만배)회 연산이 가능한 컴퓨터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500대 컴퓨터 중 14대를 랭크시키며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 중국에 이어 최다 슈퍼컴퓨터 보유국 중 하나가 됐다. 대수 기준으로 치면 14대로 6번째다. 성능 총합을 기준으로 하면 8위(29테라플롭스)를 차지한다. 하지만 1위인 미국(277대, 1040테라플롭스)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일본(23대, 129테라플롭스)은 물론 중국(19대, 53테라플롭스)과도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어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슈퍼컴 기반을 넓힐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주로 학문분야에서만 사용되던 슈퍼컴이 이제는 일반 기업에도 사용되면서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업체 GM은 지난해부터 초당 9조회의 연산 속도를 가진 IBM의 슈퍼컴퓨터를 자동차 안전성 실험에 사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현대자동차가 슈퍼컴을 이용해 최근 발표한 신차의 충돌실험을 시뮬레이션으로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설계작업에서 기존 시스템에 비해 비용 효율성이 크게 개선됐으며, 자동차의 차량충돌실험 등에 소요되는 시뮬레이션 응답시간도 기존에 비해 최대 40%까지 개선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자동차 외에도 삼성SDS·SK텔레콤 등이 슈퍼컴을 도입했다. 해외에서는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금융과 정유회사 등에서도 슈퍼컴퓨터 도입이 활발하다. 전문가들은 도입 가격이 크게 낮아진 데다 무한경쟁 시대에 더 빠르고 정확하게 고객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슈퍼컴퓨터의 도입이 본격화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에서도 HPC 도입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중소기업인 영우통신과 정원엔시스템이 슈퍼컴을 도입해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

 이진수 한국IBM 차장은 “기업들이 슈퍼컴퓨터를 도입해 보다 정밀한 설계와 예측에 앞다퉈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