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한 삼성물산 유통부문 대표이사, 홈플러스 대표이사 회장, 숙명학원 이사장(現) / 이승한 회장이 N&P그룹이 만든 새로운 공간 ‘북쌔즈’에서 경영과 통찰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진 박순욱 선임기자
이승한
삼성물산 유통부문 대표이사, 홈플러스 대표이사 회장, 숙명학원 이사장(現) / 이승한 회장이 N&P그룹이 만든 새로운 공간 ‘북쌔즈’에서 경영과 통찰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진 박순욱 선임기자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책방 ‘북쌔즈(Book Says)’는 서점·카페·공연장·강연장을 합친 복합문화공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카페가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오른쪽 벽면과 2층 서가를 가득 메운 책들을 보면 전형적인 ‘북카페’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천장의 예사롭지 않은 조명시설과 그랜드피아노가 있는 무대까지 갖춘 걸 보면 단순한 북카페는 또 아니다. 예술의전당 조명을 맡았던 기술자가 이곳의 조명설계를 담당했다고 하니, 무대장치에 꽤 공을 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금난새 지휘의 실내악 공연도 몇 차례 했고, 최근에는 영국의 유명 성악가 폴포츠도 이곳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철학 전공 교수의 인생 강의도 정례적으로 열리고 있다. 붙일 말이 따로 없어 복합문화공간이라고 하지만,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유사한 기능의 문화공간은 없다. 건물주의 창조성, 문화·예술에 관한 애착이 돋보이는 곳이다.

세상에 없는 특이한 공간인 북쌔즈의 주인은 이승한(73) 전 홈플러스 회장이다. 지금은 본사를 옮겼지만 홈플러스 본사가 몇 년 전까지 이곳 근처 빌딩에 있었다. 이 회장이 누군가? 이 회장은 1997년부터 2014년까지 17년 동안 홈플러스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국내 유통 업계 최장수 CEO 출신이다.

2014년 그가 홈플러스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몇 년 뒤 홈플러스는 본사를 옮겼지만, 그는 여전히 선릉역 근처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제 인생의 전성기를 이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 지역에 큰 애착이 있습니다. 이 주변에 직장인이 많지만 이렇다 할 문화공간이 하나도 없는 것이 북쌔즈를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2014년 홈플러스 회장직에서 물러난 직후 기업 경영 멘토링 사업을 하는 N&P(Next & Partners)그룹을 만들었다. N&P그룹은 경영연구를 전담하는 EoM경영연구원, 가족 멘토링 사업을 하는 UFCi연합가족상담연구소 그리고 작년 6월에 새로 문을 연 북쌔즈를 두고 있다.


선릉역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북쌔즈 내부. 사진 박순욱 선임기자
선릉역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북쌔즈 내부. 사진 박순욱 선임기자

복합문화공간 북쌔즈를 만든 이유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북쌔즈와 비슷한 기능의 공간이 없다. 사람들에게 자극과 영감을 주겠다는 N&P그룹의 사명을 보다 적극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오프라인 공간이 북쌔즈다. 차를 마시며 책도 읽고, 강연과 공연도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선릉역 일대에는 문화적 자산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다. 퇴근 후 ‘회식하는 문화’보다 ‘배움의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직장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겠다고 생각했다.”

경영과 책방은 어떤 관계가 있나.
“경영이란 결국 통찰력(insight)이라고 본다. 그런데, 통찰력을 얻는 지름길은 역시 책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세 가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하인드사이트(hindsight), 과거를 되돌아보는 조명력이다. 책만큼 과거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과거의 현자, 석학, 구루 등을 책만 보면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둘째는 현재를 직시하는 아이사이트(eyesight)다. 현실의 데이터나 의견, 견해 등을 통해 사실을 바라보는 현시력이다. 셋째는 포어사이트(foresight)다. 조명력과 현시력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힘, 즉 선견력이다. 이런 것들을 모두 책을 통해 구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능력을 모두 지니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통찰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경영과 통찰력의 상관성을 조금 더 얘기해달라.
“N&P그룹을 만든 이유는 한마디로 차세대 리더에게 통찰력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연구원 생활을 할 당시 비즈니스스쿨 교수들에게 한국 속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를 소개한 적이 있다. 마케팅, 재무, 운영, 인사, 영업 등 경영을 구성하는 각 요소 하나하나를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을 잘 엮어서 경영 전반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경영의 구슬 목걸이론(The Necklace of Management)’을 얘기한 것이다. 이것이 곧 통찰이다. 경영 수업은 목걸이를 만드는 것을 가르쳐야지, 목걸이를 구성하는 구슬 하나하나를 가르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경영은 목걸이를 만드는 통찰력을 기르는 것이다.”

기업가 정신이 가라앉아 있다.
“조리를 아는가?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쌀에 섞여 있는 돌을 골라내는 주방 도구다. 옛날에는 조리로 돌을 골라내도 간혹 밥에 돌이 섞여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밥을 먹다가 돌이 하나 나오면 ‘밥에 돌이 있네’ 하지만 돌이 세 개 정도 나오면 ‘밥에 돌이 천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밥 한 공기를 다 쏟아붓고 돌을 찾아도 돌은 많아봤자 서너 개일 뿐, 나머지는 전부 밥알이다. 지금 우리 기업들 신세가 이렇다고 본다. 한두 개 기업이 잘못한 일을 갖고 기업 전체를 나쁜 기업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기업가 정신이 살아날 리 없다. 그래서 정부가 기업인들이 기업가 정신을 가질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 생태계 조성에 보다 신경을 많이 써줬으면 한다.”

대기업 회장을 지내다 70대에 신생 기업을 만든 소감은.
“대기업의 체어맨(회장)이 의자에 앉아서 지시하는 사람이라면 작은 기업의 체어맨은 ‘의자를 들어 나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북쌔즈에서 공연이나 강연할 때 일손이 부족하면 나도 의자를 나른다. 그래서 그런지 한동안 팔이 뻐근했다. 작은 기업 리더에게는 솔선수범하는 서번트 리더십과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스펀지 리더십이 필요하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