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성을 강화한 기아차의 대형 세단 ‘더 K9’ 2021년형. 사진 기아차
상품성을 강화한 기아차의 대형 세단 ‘더 K9’ 2021년형. 사진 기아차

최근 기아차 직원들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K5, 셀토스, 쏘렌토 등에 이어 카니발까지 내놓은 신차마다 소위 대박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위축된 내수 시장에서도 두 자릿수의 가파른 판매 증가율을 보인다. 그런 기아차에도 ‘아픈 손가락’이 있다. 바로 브랜드를 대표하는 플래그십(최상위) 세단 K9이다. 최신 사양을 추가하고 다양한 멤버십 서비스와 K9 광고에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25승에 빛나는 박세리 프로를 등장시키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지만, 판매량은 바닥에 머물고 있다. 2021년형 모델이 새롭게 출시됐으나 올해 7월까지 5000대도 채 팔지 못했다. 경쟁 모델인 제네시스 G80의 한 달 판매량에도 못 미치는 성적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2021년형 더 K9을 살펴봤다. 외관은 기존 모델과 큰 차이가 없다. 5m가 넘는 거대한 차체를 기반으로, 풍부한 볼륨감과 섬세한 라인이 조화를 이룬다. 최근 출시된 기아차 디자인이 직선의 미학을 추구한다면, K9은 곡선의 고급스러움을 강조하고 있다. 측면으로 시선을 돌리면, 후륜 구동 기반의 균형 잡힌 비례감이 안정적이고 중후한 느낌을 전달한다. 여기에 19인치 휠 디자인은 패션 포인트다. 딱딱한 정장 구두보다 화려하고 감각적인 로퍼(굽이 낮고 발등에 끈이나 버클 장식 등이 없는 구두)를 신은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웅장한 품격을 추구하지만 세심한 세련미도 놓치지 않았다.

문을 열면 밝은 갈색 인테리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운전석 문에서 대시보드를 가로질러 조수석 문까지 길게 이어진 수평형 레이아웃이 공간감을 극대화한다. 균형 잡힌 인테리어와 값비싼 마감 소재 등을 통해 나만을 위한 서재 같은 공간을 연출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 속에 고속 무선 충전 시스템과 음성 인식 차량 제어 기능 등 새로운 편의 사양도 눈에 띈다. 앞서 쏘렌토 등에서 호평받았던 음성 인식 차량 제어 기능은 에어컨과 히터는 물론 창문, 선루프, 트렁크, 시트 열선 및 통풍까지 음성으로 제어할 수 있다. 이제 운전하는 것 외에 모든 것을 말로 조종하게 됐다. 현대·기아차가 카카오와 손을 잡고 만든 만큼 한국어도 잘 알아듣는다. 다만, 뒷좌석에서 가볍게 말하는 음성은 인식률이 떨어진다. 배에 힘을 살짝 주고 외쳐야 한다. 의전차량으로 사용되는 대형 세단인 만큼 뒷좌석 승객을 좀 더 고려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본격적인 시승에 나섰다. 시승차는 V6 람다Ⅱ 3.8 가솔린 엔진과 8단 자동변속기, AWD, 전자제어 서스펜션(충격흡수장치) 등이 탑재된 3.8 그랜드 플래티넘 모델이다.

3.8 엔진은 G80에 적용된 최신 2.5 터보 엔진이나 3.5 터보 엔진보다 힘은 부족하지만, 2t의 육중한 덩치를 끄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엔진 회전 질감은 한층 더 부드럽다. 중후한 저음으로 잘게 쪼개진 엔진음도 더 고급스럽다.

물론, 최근 출시되는 대형 고급 세단처럼 탄탄하고 역동적인 주행 성향은 아니다. 운전의 즐거움보다 편안한 승차감과 정숙성에 초점을 맞춘 쇼퍼드리븐(운전기사를 두고 차주가 뒷좌석에 타는 차)을 지향한다.

동승자에게 운전대를 넘기고 오른쪽 뒷좌석으로 향했다. 조수석을 최대한 앞으로 당긴 후 두 다리를 펴고 VIP 파워시트에 몸을 깊숙이 파묻는다. 머리부터 어깨, 등, 허리, 엉덩이, 무릎 뒤편까지 시트를 조절할 수 있어 웬만한 리클라이너 소파보다 더 편하다. 곳곳에 적용된 흡·차음재와 이중 접합 유리 때문인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도 부슬비처럼 느껴진다.

2021년형 더 K9은 최신 운전자 보조 시스템과 각종 고급 사양을 기본 장착했다. 처음에는 가장 저렴한 3.8 플래티넘 모델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타면 탈수록 옵션 욕심이 늘어난다. 운전석에서는 퀼팅 나파 가죽과 앰비언트 라이트, 리얼 우드 내장재 등을 묶은 프리미엄 컬렉션 패키지가 눈에 띄었고, 뒷좌석에 앉으니 VIP 시트와 윙아웃 헤드레스트 등을 포함한 VIP 시트 패키지가 끌린다. 여기에 서라운드 뷰 모니터와 헤드업 디스플레이 등 고객 선호 사양을 모은 베스트 셀렉션도 빼놓을 수 없다. 엔트리 3.8 플래티넘 모델에 프리미엄 컬렉션과 VIP 시트, 베스트 셀렉션 패키지 등을 모두 선택할 경우 가격은 6800만원이다. 이 가격에 이만한 상품성이라니 더 K9이 달라 보인다.

이렇게나 좋은데 왜 팔리지 않을까. 바로 기아차이기 때문이다. 고급차는 제품력이 아닌 브랜드로 승부가 결정된다. 고급차를 사는 이들은 자신을 나타내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가성비보다 가심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과거 폴크스바겐 페이톤이 그러했듯이 더 K9 역시 브랜드의 태생적 한계가 아쉬울 따름이다.

‘더 K9’ 2021년형 실내. 사진 기아차
‘더 K9’ 2021년형 실내. 사진 기아차
‘더 K9’ 2021년형 뒷모습. 사진 기아차
‘더 K9’ 2021년형 뒷모습. 사진 기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