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점유율 1위였던 블랙베리는 애플의 아이폰,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밀려 소비자에게 외면당했다. 사진 블룸버그
한때 점유율 1위였던 블랙베리는 애플의 아이폰,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밀려 소비자에게 외면당했다. 사진 블룸버그

블랙베리 주가가 17년 만에 급등하며 미국 투자자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 블랙베리는 12월 1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뉴욕 증시에서 44.6% 급등하며, 2003년 12월(51%) 이후 두 번째로 큰 상승률을 보였다. 12월 4일 종가는 8.52달러로, 52주 최고가를 기록했다. 올해 최저였던 3월 17일(2.9달러)과 비교할 때 193% 오른 셈이다.

블랙베리의 주가 상승은 아마존의 자회사 아마존웹서비스(AWS)와 협업 소식 덕분이다. 블랙베리는 12월 초 “아마존웹서비스와 다년간의 계약을 체결했으며, 지능형 차량용 데이터 플랫폼을 개발한다”고 발표하며 눈길을 끌었다. 한때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던 블랙베리가 차량용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바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마트폰 개척자’였던 블랙베리

블랙베리는 공학도 마이크 라자리디스와 더글라스 프레긴이 1984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워털루에서 설립한 회사다. 당시 사명은 ‘리서치인모션(RIM)’으로, 무선 데이터 통신 기술을 전문으로 했다.

RIM은 1999년 쿼티(Qwerty·PC용 키보드) 자판을 탑재한 양방향 호출기 ‘블랙베리 850’을 선보이며 반향을 일으켰다. 이동 중에도 이메일을 쓸 수 있어서 ‘내 손안의 이메일’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2000년 4월에는 ‘블랙베리 957’을 출시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을 열었다. 메일을 쓰기 편한 쿼티 키보드를 갖춘 데다 보안성이 우수해 업무용 휴대전화로 인기가 많았다.

블랙베리는 브래드 피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패리스 힐튼 등 많은 유명 인사가 사용하며 이름을 알렸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사용해 ‘오바마폰’으로 주목받았고, 롤렉스 시계, 몽블랑 만년필처럼 좋은 평판을 얻었다. 2008년에는 미국 스마트폰 점유율 1위(44.5%)를 기록할 만큼 독보적이었다.


기술 등한시하면서 몰락

하지만 영광은 길지 않았다. 거침없는 성장세를 보이던 RIM의 블랙베리는 애플의 아이폰이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마주하게 된다. 애플은 2007년 터치스크린을 갖춘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선보였다. 애플은 아이폰 사용자를 위한 ‘앱스토어’를 열고 소프트웨어 개발사에 문턱을 낮추면서 다양한 콘텐츠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구글도 2007년 모바일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를 발표했다. 이듬해부터는 삼성전자, LG전자, 모토롤라 등이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RIM은 모바일 생태계를 주름잡은 애플, 다양한 단말기 선택권을 가진 구글 안드로이드와의 경쟁에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RIM은 스마트폰 시장 지각변동에도 자체 운영체제와 쿼티 키보드를 고집했다. 주가는 2011년 한 해 동안 80% 하락했고, 이듬해 시장 점유율은 7.3%로 떨어졌다. RIM은 2013년 회사명을 블랙베리로 바꾸고, 뒤늦게 터치스크린을 탑재한 ‘블랙베리 Z10’을 내놨지만, 소비자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블랙베리는 ‘예쁜 쓰레기’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블랙베리의 연간 매출액은 2011년 199억달러(약 21조7100억원)였으나, 2014년 68억달러(약 7조4100억원)로, 2017년 13억달러(1조4100억원)로 지속해서 감소했다. 매출 하락으로 수천 명의 임직원을 해고하고, 운영센터를 폐쇄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2008년 140달러가 넘었던 주가도 내리막길만 걸었다.

블랙베리는 결국 2016년 자체 스마트폰 생산을 중단하고, 중국 TCL에 개발과 생산, 마케팅 권한을 넘기는 라이선스 계약을 했다. 하드웨어 아웃소싱으로 리스크 회피에 나선 것이다. 블랙베리는 대신 소프트웨어·서비스 업체로 변신하는 데 공을 들였다.

올해부터는 블랙베리 스마트폰을 찾아보기도 어렵게 됐다. 중국 TCL이 블랙베리와 파트너십을 종료하고, 블랙베리 스마트폰을 만들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블랙베리는 자사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고객을 위해 2022년 8월 31일까지 고객 서비스와 보증 지원을 유지하기로 했다.


스마트폰 대신 플랫폼 사업 진출

블랙베리는 스마트폰 단말기 사업을 포기하고, 자동차 및 보안 소프트웨어에 힘을 쏟고 있다. 자동차에 IT 기술을 접목한 커넥티드카와 자율주행차 시대가 오면 차량용 소프트웨어 시장 성장세가 가팔라질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블랙베리는 2010년 하만 인터내셔널로부터 운영체제인 ‘QNX’를 2억달러(약 2100억원)에 인수했다. 2015년부터는 QNX의 보안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워치독’ ‘앳호크’ ‘굿테크놀로지’ ‘인크립션’ ‘사일런스’ 등 보안 기업을 인수했다. 블랙베리는 현재까지 전 세계 1억7500만 대 차량에 QNX를 탑재했다.

블랙베리는 QNX를 앞세워 아마존웹서비스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블랙베리는 올해 초 “아마존웹서비스와 협업해 사물인터넷(IoT)을 적용한 차량용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개발한다”고 밝혔다. 12월 1일에는 “아마존웹서비스와 수년간 계약을 맺고 지능형 차량 데이터 플랫폼 ‘아이비(IVY)’를 공동개발, 마케팅하겠다”고 선언했다.

증권 업계 전문가들은 두 회사의 협업이 서로에게 ‘윈윈’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마존웹서비스는 커넥티드카 시장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경쟁사인 마이크로소프트(MS)보다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블랙베리는 아마존 클라우드와 협업해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운전자가 교통체증, 빙판길 등 도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돕는다. 위기 상황에 처한 운전자의 데이터를 수집하거나, 뒷좌석에 탄 유아를 감지해 운전자에게 안전장치 사용을 권유하기도 한다. 전기차 운전자는 아이비를 통해 여행 중 전기차 충전소를 예약하거나, 여행 계획에 맞춰 충전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두 회사는 다양한 브랜드의 차량에 탑재된 차량 앱과 커넥티드 서비스를 구축하고, 배포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블랙베리의 차량 소프트웨어 플랫폼과 보안 솔루션 사업은 실적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KB증권 글로벌주식팀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 블랙베리의 12개월 선행 자기자본이익률은 2011년 수준까지 상승했다. 잉여현금흐름도 2019년 흑자로 전환해 300만달러(약 32억원)를 기록했고, 올해는 700만달러(약 76억원)로 예상된다.

하지만 주식 투자에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미국 투자 전문 매체 모틀리 풀은 “블랙베리의 주가는 그간 사물인터넷이나 보안 관련 뉴스가 나오면 상승했다가 하락해 왔다”며 “두 기업의 협업이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낼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실제로 이익이 얼마나 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