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상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아시아리서치 본부장 서울대 경제학, ‘아시아 투자의 미래’ 저자
이필상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아시아리서치 본부장 서울대 경제학, ‘아시아 투자의 미래’ 저자

인도를 이해하려면 요가를 수행하거나 커리 종류를 아는 것보다 기업 하나를 잘 아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바로 인도 최대 기업 릴라이언스그룹(이하 릴라이언스)이다. 이 회사는 인도의 여러 제약 조건 아래서 사업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지금 인도는 모바일 인터넷에 기반을 둔 비즈니스 모델이 개화하고 있는데, 이를 주도하는 기업이 릴라이언스이기도 하다.

이 회사는 한동안 투자자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16년 이전까지만 해도 주력 사업이 정유·석유화학으로, 글로벌 가격 변동에 따라 기업 이익이 좌우되는 사업 모델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010년대 중반 이동통신에 무모할 정도의 투자를 감행하면서 순 부채가 30조원에 이를 정도로 재무적 위험이 커지기도 했다.

인도에서 부채 비율이 높은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조달 금리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인도 경제는 주력 수출 산업이 없어 매년 경상수지는 적자에다 자본은 만성적으로 부족했다.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이라도 은행 대출 이자는 연 10%를 훌쩍 넘었다. 해외에서 저렴하게 조달할 수도 있겠으나 인도 통화가 지속적으로 약세였기 때문에 헤지(hedge·위험 회피) 비용이 많이 들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인도는 아주 오래된 가족 기업들이 대를 이어서 내수 시장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오랫동안 쌓아온 브랜드 가치 덕분에 비교적 쉽게 잉여현금흐름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적당한 수준의 재투자를 하며 성장을 지속해왔다.

반면 인도의 스타트업은 아무리 좋은 사업 아이디어가 있어도 대출 비용이 워낙 많이 들기 때문에 고성장을 추구하기 어렵다. 세계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인적 자원이 넘치지만, 스타트업의 성장이 활발하지 않은 이유다.

릴라이언스가 무모해 보이는 투자를 강행하기 시작한 것은 이동통신 사업에 새로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2012년쯤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수십조원이 필요한 이동통신 인프라 투자를 직접 할까, 기존 통신사들을 인수하는 방식일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2015년 전후로 완전히 새로운 통신 인프라 구축을 위해 수십조원을 퍼붓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이 경악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돈을 쏟아 부은 신규 사업이 성공할 것이냐 여부는 둘째치고 만약 정상화 속도가 늦어진다면 이자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경악은 합당한 근거가 있었다. 오랫동안 인도 이동통신 산업 전체가 이익을 충분히 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인도 이동통신업은 10여 개 기업이 난립하며 가격 경쟁이 치열했다. 인도 사용자들이 내는 월 사용료(ARPU)는 2000원 수준에 불과했다. 반면 네트워크 투자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통신 장비 비용은 글로벌 선진국 기준으로 책정되기 마련이니,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등 기업 바르티에어텔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적자와 흑자 혹은 부도 사태를 반복했다. 업계 전체가 이렇게 안 좋은 상황이었으니 기존 통신사 어디도, 2010년대 초 선진국에서 보편화한 4G(4세대 이동통신) 네트워크에 투자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2016년쯤 주요 이동통신사인 아이디어(Idea)의 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인도의 모바일 인터넷은 이미 포화 상태라서 4G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인도 릴라이언스그룹의 무케시 암바니(왼쪽 두 번째) 회장. 과감한 투자로 인도 이동통신의 강자가 됐다. 사진 블룸버그
인도 릴라이언스그룹의 무케시 암바니(왼쪽 두 번째) 회장. 과감한 투자로 인도 이동통신의 강자가 됐다. 사진 블룸버그

레드오션에서 기회 찾은 릴라이언스

릴라이언스는 여기서 기회를 발견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3G 네트워크와 4G 네트워크가 제공할 수 있는 모바일 서비스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인터넷 서비스가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4G 네트워크가 반드시 필요했다.

돌이켜보면 미국에서 유튜브, 넷플릭스, 페이스북, 줌과 같은 인터넷 사업 모델이 대성공을 거둔 데에는 주요 선진국에 4G 네트워크가 충분히 깔린 덕분이었다. 한국이 소규모 경제에도 경쟁력 있는 인터넷 기업들을 다수 배출하는 것도 다른 나라보다 앞서 인프라를 깔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바일 인터넷이 소비자에게 얼마나 호감을 살지 간파한 릴라이언스는 후발 주자라 하더라도 남들보다 먼저 4G 네트워크에투자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릴라이언스의 베팅은 맞아떨어졌다. 릴라이언스는 2016년 처음으로 4G 서비스인 지오(Jio)를 선보이고서 고성장을 지속하더니 2019년 1위 기업이 됐고, 지금은 매출 점유율 40%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가 됐다.

이는 이동통신 산업 특성에 비춰보면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극적인 변화다. 이동통신 비즈니스 모델은 웬만하면 업체 간 점유율이 바뀌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통신사 간 점유율은 20년째 큰 변화가 없다. 예외가 있다면 일본 소프트뱅크가 2008년 애플과 독점 계약을 통해 아이폰을 최초로 도입하면서 시장 점유율을 4년 만에 18%에서 25%로 끌어올린 정도다. 여기에 비하면 릴라이언스가 4년 만에 점유율을 0%에서 40%로 만든 것은 그야말로 이동통신 업계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페이스북·구글로부터 수십억달러 유치

릴라이언스 지오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더 있다. 글로벌 주요 인터넷 사업자들로부터 지분 투자를 받았다는 점이다. 페이스북이 2020년 57억달러(약 6조4700억원)에 달하는 투자(지분율 9.9%)를 하기로 했고, 구글을 보유한 알파벳도 지오 플랫폼에 45억달러(약 5조1100억원)의 지분 투자를 했다. 페이스북, 알파벳은 무슨 사연이 있어서 통신사에 지분 투자를 하는 것일까? 이는 릴라이언스가 특수한 지위를 십분 활용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인프라 투자가 부실했던 인도는 대도시를 제외하고 사실상 유선망(브로드밴드)이 없다. 인도인 대부분은 이동통신 네트워크를 통해서야 비로소 처음 인터넷 서비스를 경험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쓸 만한 모바일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사업자는 딱 두 회사뿐이었다. 오래전부터 이동통신 강자였던 바르티에어텔과 신흥 강자 릴라이언스 지오 말이다. 이는 인도가 다른 선진국들과는 엄연히 다른 환경이라는 걸 의미한다. 다른 국가에서는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채널 혹은 사업자가 다수이기 때문에 페이스북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페이스북과 같은 인터넷 서비스 기업 입장에서는 만에 하나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인터넷 접근 채널을 가진 지오와 관계가 틀어지면 아예 인도에서 사업을 할 수 없는 최악의 위험을 안게 되는 것이다. 구글, 유튜브 등의 서비스를 하는 알파벳도 비슷한 상황이다. 알파벳의 경우 지분 투자를 이용해 지오 이용자에게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깐 구글폰을 공급할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인터넷 기업들이 인도 소비자와 만나기 위해서는 지오와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독점을 이용한 횡포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도 국민 입장에서는 지오 덕분에 비로소 인터넷 서비스를 즐기게 됐다는 인식이 더 강렬하다. 2016년까지만 하더라도 3G 모바일 데이터 1기가바이트(GB) 사용료가 300루피(약 4700원)였으나 지오가 출범한 2017년 이후로는 1GB 사용료가 30분의 1 수준인 10루피(약 160원)로 떨어졌다. 소비자 한 사람당 사용할 수 있는 인터넷 서비스는 급증했다. 과거 모바일 인터넷 가입자의 평균 인터넷 사용량이 월 1GB 수준이었으나 지금은 10GB 이상 급증했다.


릴라이언스 현금 유동성 살린 지오

지오 가입자가 4억 명을 넘어서자 릴라이언스의 현금흐름도 급격히 좋아졌다. 이동통신 사업의 매력은 매달 꼬박꼬박 현금이 들어온다는 점이지 않은가. 앞서 말한 전략적 지분 투자 20조원 유치를 더해 릴라이언스는 2021년에는 아예 순 현금 기업으로 전환할 것 같다. 한때 순 부채가 30조원에 달했던 회사가 4년 만에 이렇게 바뀐 것이다.

릴라이언스의 통신 사업 부문 지오는 한국 산업계와도 관련이 많다. 릴라이언스 지오가 2012년 4G 통신 장비 단독 공급자로 삼성전자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인도처럼 가난한 나라에서는 에릭슨 같은 비싼 유럽산 통신 장비를 쓰는 것은 부담되고 화웨이 같은 중국산 통신 장비를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인도의 기존 이동통신사 대부분은 화웨이 장비를 써왔다.

그런데도 릴라이언스 지오만 유독 중국 기업을 배제하고 한국 기업을 단독 통신 장비 벤더(판매사)로 선택했다. 단일 벤더 체제로 간다는 건 평균 단가를 낮추는 장점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기업에 의존하는 데서 발생하는 위험을 떠안아야 한다. 그럼에도 릴라이언스는 한국 제품을 단독 선택했다.

그런데 지난해 중국과 인도 간 국경 분쟁으로 인도에서 반중국 정서가 강해진 것을 돌이켜보면 릴라이언스는 몇 수 앞을 내다봤던 것일까. 혹시 필자가 릴라이언스 회장 무케시 암바니를 만나게 된다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계획이 다 있었군요?”


인도 수도 뉴델리의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다.
인도 수도 뉴델리의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다.

혁신 기업 인프라 만든 릴라이언스의 투자

릴라이언스 지오 성공 사례는 두 가지 중요한 함의가 있다. 첫째, 인도와 같이 자본 조달 비용이 높은 이머징 국가(신흥국)에서 기업의 공격적인 투자는 많은 리스크를 동반한다. 하지만 남들이 부채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저할 때, 빠른 실행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부채를 일으키고 투자에 성공할 때의 과실은 더욱 달콤하다.

둘째, 릴라이언스의 성공은 개별 기업 수준을 넘어선다. 4G 네트워크를 건설한 것은 인도 사회⋅경제적으로 엄청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인도와 같은 거대한 소비시장,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널려 있다시피한 조건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 인도 모바일 인터넷 서비스 회사가 없었다는 것은 놀랍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도 전역에 2019년까지도 4G 통신 네트워크 서비스가 제대로 깔리지 않았던 탓이다.

필자는 인도 기업들을 12년째 관찰해오면서 지루함을 느껴왔다. 이머징 국가답지 않게 스타트업의 성장을 목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릴라이언스가 주도한 4G 네트워크 그리고 조만간 깔릴 5G 네트워크를 통해 인도에서도 이제는 혁신적인 기업들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해본다.